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9화
"도망쳐!"
시몬이 카미바레즈의 손을 잡고 달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 쐐액! 하는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들렸다.
쿠우우웅!
쿠웅!
검은 십자가가 연달아 바닥이 박히며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프리스트가 칠흑을 쓴다고?'
시몬은 사태가 훨씬 더 심각해졌음을 느꼈다.
단순히 프리스트가 로크섬에 숨어들어온 정도가 아니다.
'......키젠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시몬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칠흑과 신성은 서로 충돌하는 힘이라서 둘 중 한 가지만 쓸 수 있다.
둘째. 그런 프리스트가 신성이 아닌 칠흑을 사용하고 있다.
즉, 외부에서 유입된 게 아니라 키젠 내부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란 뜻이다.
십중팔구 키젠의 정보를 빼돌리는 신성연방의 스파이.
키젠에서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 따윈 없다. 그래서 저 프리스트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금지된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기도를 올리고 있었으리라.
시몬과 카미바레즈는 운이 없게도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된 거고.
즉, 명확한 결론을 한 가지 도출하자면.
'잡히면 무조건 살해당한다!'
쐐액!
쐐애애액!
칠흑으로 이루어진 십자가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팔과 허벅지 쪽에 핏물이 튀며 쓰린 통증이 치밀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달리던 시몬의 눈이 부릅떠졌다. 갑자기 전면에서 뱀처럼 움직이는 뭔가가 보였다.
"조심해!"
시몬이 소리치며 허리를 젖혔다.
칠흑으로 이루어진 새까만 사슬이 불쑥 튀어나와 아슬아슬하게 시몬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시몬이 다시 허리를 세우며 옆을 보았다.
"괜찮......!"
그녀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시, 시몬!"
다리가 사슬에 매여 있었다. 두 사람이 급히 팔을 뻗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닿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었다.
이내 그녀가 무서운 속도로 멀어지며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크윽!"
시몬이 기겁하며 뛰어나갔다.
가까이 가보니 그녀는 나무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고, 검은 사슬이 그녀의 몸을 꽁꽁 묶고 있었다.
'카미가 잡혔다!'
시몬이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로브를 입은 프리스트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눌러쓴 후드의 어둠이 너무 짙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펑퍼짐한 로브 때문에 성별 및 신체 정보도 추정 불가. 겉모습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그때 프리스트가 왼팔을 들어 올렸다.
타닷!
즉시 시몬이 칠흑을 밟으며 나무 뒤로 숨었다. 쇄도하던 사슬이 나무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우웅! 우웅! 우웅!
상당히 수준 높은 실력자인지, 이번엔 허공에 수십 개가 넘는 십자가가 동시에 펼쳐졌다.
네크로맨서를 상징하는 칠흑의 힘으로 프리스트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구현하다니.
시몬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프리스트가 손바닥을 땅으로 향하는 것을 신호로, 십자가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끙!'
시몬은 아공간에서 스켈레톤의 숏소드를 꺼내 들고는 내달렸다.
바닥에 묘비처럼 박히는 십자가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타이밍에, 시몬의 측면으로 검은 궤적이 쇄도했다.
까앙!
시몬이 즉각 숏소드를 휘둘러 십자가를 쳐냈다. 손목에 저릿저릿한 감각이 치미는 것과 동시에 숏소드가 산산조각이 났다.
촤르르르르륵!
이번엔 좌우 방향에서 동시에 사슬이 날아왔다.
시몬은 즉시 바닥에 키스할 만큼 몸을 낮춰 피하고는, 바닥에 널린 돌 하나를 손에 쥐었다.
'칠흑 부여!'
우웅!
칠흑을 흘려보내 돌을 검게 물들인 시몬이 상체를 일으키는 동시에 힘껏 던졌다.
쐐애애액!
시몬은 간절한 마음으로 날아가는 돌을 바라보았다.
'닿아라! 얼굴을 드러내!'
차마 시몬이 반격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프리스트가 조금 늦게 고개를 꺾었다. 오른편의 후드 자락이 살짝 찢어졌지만, 아쉽게도 딱 그 정도뿐이었다.
"......."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프리스트에게서 짙은 분노가 느껴지는 듯했다.
허공에 더 많은 십자가들이 떠올랐다. 시몬이 피하려 몸을 일으켰지만 십자가가 펼쳐지는 범위는 정면을 넘어서 시몬의 머리 위까지 다다랐다.
이건, 피할 수 없다.
"후우우."
시몬이 체념한 듯 눈을 감고 두 팔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
프리스트의 후방에서 거대한 대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꽈아아아아아앙!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프리스트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칠흑을 방패처럼 둘러서 두 동강 나는 꼴은 면했지만, 시전 중이던 십자가들이 전부 흩어지거나 바닥에 잿더미를 남기며 떨어졌다.
[크흐흐흐흐! 괜찮나 소년!]
피어가 두 동공에서 흉흉한 푸른 불꽃을 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키에, 등에 두른 채 펄럭이는 무형의 망토. 그리고 손에 쥔 순백의 대검까지.
갑자기 등장한 고대급 언데드의 등장에, 프리스트는 역력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피어!'
[멀리 물러나 있거라! 아직 네게는 벅찬 상대다!]
피어가 거대한 대검을 얼굴 옆으로 치켜드는 자세를 취했다. 시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크하하하하! 이게 대체 얼마만의 전투인지 모르겠군! 자, 간다!]
피어가 바닥을 내디뎠다.
지면이 박살 나며 그의 몸이 총탄처럼 쇄도했다. 프리스트도 전면에 칠흑 방패를 형성했다.
쩌어어어어어어엉!
방패와 대검이 부딪히며, 대기가 울부짖고 지면이 뒤집혔다. 주위의 나무들이 뿌리째로 날아올랐다.
이미 시몬이 끼어들 수 있는 급의 전투가 아니었다.
미련을 버리고 등을 돌린 그는 카미바레즈에게 달려갔다. 방금 피어의 기습으로 십자가뿐만 아니라 사슬도 캔슬됐는지, 속박에서 풀려나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카미!"
다행히 그녀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시몬이 훌쩍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몇 번이고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몸은 걱정이 될 만큼 가벼웠다.
쿠우우웅!
옆으로 커다란 바위 잔해가 떨어지자 시몬은 좀 더 거리를 벌렸다. 피어와 프리스트가 격돌할 때마다 주위의 지형이 뒤바뀌고 있었다.
'피어! 어때요?'
[크으! 쉽지 않군!]
피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 녀석! 칠흑 마법만으로도 터무니없이 강하다! 교수급일지도 몰라!]
아무리 에이션트 언데드라고 해도, 막 봉인에서 풀려난 상태라 힘은 크게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피어는 군단의 관리자고, 원래 전투요원이 아니다. 상대가 정말로 키젠의 교수라면 어려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허무하게 아버지의 언데드를 잃을 수는 없었다.
'뭔가 방법이......!'
타개법을 찾고 있던 시몬의 동공이 일순 커졌다.
'피어! 프리스트와 떨어져요! 그리고 시간을 끌면서 어떻게든 소음을 일으키세요!'
[뭐?]
'설명할 시간 없어요! 빨리요!'
시몬을 믿어주는 건지, 피어는 군말 않고 프리스트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대검을 휘둘러 지면을 마구 솟구치게 하거나, 대기를 갈라서 폭음을 일으키는 등 소음을 일으켰다.
프리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힘을 낭비하는 꼴로 보이겠지만, 지금 살 방법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저쪽이다! 저기서 소리가 들렸어!"
"폭발음 같은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시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소란을 듣고 파수꾼들이 도착한 것이다.
몇 시간 전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피어를 몰아붙이고 있던 프리스트도 파수꾼들의 불빛을 발견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목격자가 많아지면 상황이 점점 더 꼬일 것이다. 결국 프리스트는 피어와의 전투를 중지하고 숲속으로 도망쳤다.
"쫓지 마세요 피어!"
시몬이 달려왔다. 대검을 바닥에 꽂은 채 숨을 헐떡이던 피어가 씩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문제없다! 그보다 여기 있으면 또 곤란한 상황이 올 것 같은데.]
"네, 그러네요."
사냥개들의 발소리와 파수꾼들의 불빛이 이제는 코앞까지 도달했다.
피어는 시몬과 카미바레즈를 한꺼번에 안아 들었다.
[여기서 벗어나마! 꽉 잡아라!]
피어가 바닥을 딛고 날아올랐다.
주위의 지형이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 * *
피어는 금지된 숲을 벗어나 키젠의 성벽이 보이는 지점에 두 사람을 데려다주었다.
[여기서부턴 나도 못 들어간다.]
피어가 두 사람을 내려주며 말했다.
[껄끄러운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광범위 감지마법이 있는 모양이군.]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미바레즈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피어. 덕분에 살았습니다."
[크흐흐! 계약자를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잃을 순 없지! 조심히 들어가라!]
"네, 감사해요."
피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경비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했기에, 시몬은 처음 출발했을 때처럼 마구간의 땅굴을 통과해서 성벽을 통과했다.
이내 사다리를 타고 천장의 짚을 걷어낸 시몬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 오셨습니까?"
마침 마구간의 말들에 물을 주고 있던 케빈이 시몬을 발견하고는 미소 지었다.
"혹시 딕은 들어왔나요?"
"아뇨, 갑자기 밖에 파수꾼들이 쫙 깔려서 이쪽으로는 안 왔습니다. 딕이라면 빙 둘러가는 다른 루트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케빈이 시몬의 품에 안겨 있는 카미바레즈를 가리켰다.
"그 아가씨는 괜찮은 건가요?"
"파수꾼들에 쫓겨서 살짝 무리했네요. 괜찮습니다."
시몬은 딕이 했던 것처럼 주머니의 동전 하나를 튕겨서 팁을 챙겨주었다. 비밀을 유지해 달라는 의미의 팁이었다.
케빈은 활짝 웃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마구간에서 빠져나온 시몬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중앙 병동으로 가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다치게 됐는지 추궁받을 게 뻔하고, 사실대로 대답하면 결국 교수들과 관계자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한밤중의 전투. 그 프리스트가 자신의 얼굴을 봤을지는 몰라도, 카미바레즈는 아직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를 다시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선, 치료를 해줄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믿을 만한 사람.......'
네프티스에게 가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만,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러 고민 끝에 시몬은 걸음을 옮겼다.
* * *
키젠 남학생 기숙사 1관 당직실.
"후아아암."
기숙사 관리원 레나는 하품을 쩍쩍하며 책상에 팔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야간 당직 근무 싫다아아아......."
청소 빨래, 청소 빨래, 청소 빨래. 물론 주요 업무는 기숙사 관리였지만, 귀족 도련님들의 수발을 드는 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질러져 있는 서류 한 장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기숙사 방에 여학생들 데려와서 삼 대 삼으로 뭐? 어휴, 미친 또라이 새끼들......."
요즘 애들은 참 귀여운 구석이 없었다.
그냥 넘어갈 사항이 아니라 담당 교수에게 보고하겠다고 하니까, 바로 자기네 가문 들먹이면서 협박하는 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 다 때려치우고 싶다아아......."
똑똑.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녀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달칵!
문이 열리자,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품에 안은 채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레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또, 또 남자 기숙사에 여학생을! 이게 무슨 짓입니......!"
흥분해서 소리치던 레나는 뒤늦게 남학생이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교복은 흙범벅에 피 흘린 상처까지 있었다.
"아...... 시, 시몬 학생?"
"도와주세요."
시몬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나가 허둥지둥 뛰어가서 당직실의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물건들을 치웠다. 시몬이 카미바레즈를 침대에 눕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 데려올 게 아니라 일단 병동에......!"
"문제가 좀 복잡해요."
시몬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병동에 데려갈 순 없어요."
"......."
키젠 기숙사 관리원 4년 차.
고액의 하수인 급여를 보고 들어왔다가 95%는 한 달 안에 도망친다는 이 악명높은 곳에서, 무려 4년을 버텼다.
그 시간 동안 레나는 정말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었고, 키젠의 어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키젠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했다.
그렇다. 정말로, 무슨 짓이든 다.
몸을 다쳐도 불이익을 피하고자 병동에 가지 않는 정도는 키젠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가요."
"네?"
레나가 시몬의 등을 떠밀었다. 시몬이 당황해서 말했다.
"자, 잠깐만요 레나! 저는......!"
"여학생 상처 치료해야 하니까 나가라고요!"
"아......."
시몬이 뻘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레나는 긴급 의료세트를 들고 침대 옆에 둔 다음, 시몬이 보지 못하도록 커튼을 촤륵 쳤다.
잠시 후 사락사락 카미바레즈의 교복이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커튼 너머로 레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불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까지거나 무릎까진 상처도 있는데, 이 허벅지의 상처는......."
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날카로운 거에 베인 상처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