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0화
시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한번 카미바레즈의 상처를 살펴본 레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른 학생들이랑 싸운 거죠? 문제가 있다면 아직 학생 보호기간일 때 처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끙끙 앓는다고 될 일이......."
"학생들이랑 싸운 건 아닙니다."
무려 키젠을 배신한 프리스트의 습격을 받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키젠이란 조직 자체가 뒤흔들릴 수 있는 비밀이었고, 여차하면 레나까지 위험해진다.
"그럼 뭔데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다 말씀드릴 순 없어요. 죄송해요."
"......."
레나는 굳은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커튼 너머로 시몬의 실루엣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수인이 학생들의 일에 관여해 봐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일단 치료부터.'
그녀는 서랍에서 응급처치 세트를 비롯해 여러 약품들을 꺼냈다. 거즈로 피를 닦아내고 능숙하게 상처를 소독했다.
잠들어 있는 카미바레즈가 인상을 구기며 '으으음' 소리를 냈다. 소독을 마치고 상처가 재생되는 슬라임 약품을 살살 펴 발라서 흉터가 남지 않도록 하고 밴드를 붙였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없었다. 가장 심한 허벅지는 붕대까지 둘둘 둘러두었다. 잠들어 있는 카미바레즈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시몬 학생."
레나가 커튼을 걷고 나왔다.
"옷 벗어요."
"......네, 네?"
시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쪽 상처도 봐야 할 거 아녜요. 상의 탈의하세요."
"아. 네!"
시몬은 오늘 여러 번 놀란다고 생각하며 교복을 벗었다. 재킷과 셔츠를 벗고, 교복 바지도 걷어서 무릎 위까지 올렸다.
"소독 먼저 할게요."
솜에 소독약을 묻힌 레나가 시몬 앞에 쪼그려 앉았다.
'크흠.'
막상 시몬의 벗은 몸을 보게 되니 어쩔 도리 없이 얼굴에 피가 쏠렸다.
아니, 학생이 쓸데없이 몸은 왜 이리 좋아.
저 나이에 이 복근은 뭔데.
'......아, 쪽팔려. 나대지 마 심장아.'
어른의 자존심이란 게 있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미성년자한테 흑심을 품을 순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로 상처를 소독했다. 중간중간 시몬이 비명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으으, 너무 아파요!"
"조금만 참아요."
레나가 시몬의 다리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엄살이 심한 게 꼬맹이는 꼬맹이인 모양이다.
이어서 상처의 소독을 마치고 약품을 잘 펴 바른 다음 붕대까지 둘러주었다.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니까 당분간은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시몬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학생이 하수인한테 경례라니, 레나는 조금 당황해서 한 발짝 물러났다가 이내 흠흠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건강보단 중요한 건 없어요. 일단 몸이 성해야 키젠에 살아남든 말든 하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네!"
"뒤에 여학생도 무사해요. 여자 기숙사 쪽에 믿을 만한 동료들을 불러서 조용히 데려가도록 할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시몬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렇게 시몬이 당직실 밖으로 나간 뒤, 레나는 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앉았다.
'......저 학생은 오래 볼 수 있으려나.'
키젠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여운이 그녀를 간질였다.
* * *
"시, 시몬! 무사했구나!"
시몬이 기숙사 방에 들어오자, 안절부절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던 딕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카미는?"
시몬은 침착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파수꾼들에게 쫓겨 숲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길을 잃었다는 이야기.
물론 프리스트에 대한 내용은 생략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카미바레즈와 따로 상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딕도 파수꾼들을 따돌리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홀로 실습실에 남겨진 메이린이 분노와 서러움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파수꾼들이 떴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녀도 이해해 주는 눈치였다.
결과적으로 딕도 로체스트에서 재료를 무사히 구했으니, 포션은 내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쿠웅!
"헉, 깜짝이야!"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카쟌 에드발트가 들어왔다.
목욕탕에 들렸는지,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덮고 있었다.
"오셨어요? 카쟌."
시몬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그는 대답 없이 교복을 휙휙 벗어 던지고 2층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누웠다.
그리고 딱 1분 만에 드르렁거리며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니까."
딕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침대로 갔다. 시몬도 카쟌의 잠든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불을 챙겨 침대로 향했다.
오늘 하루는 너무나 피곤했다.
* * *
다음 날 아침.
시몬은 딕에게 먼저 강의실로 가라고 말해놓고는 건물 입구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익은 A반 학생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헥토르와 그의 파벌들이 등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시몬을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늦네.'
벽시계를 바라보는 시몬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슬슬 수업시간이 가까워지는데 카미바레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몸이 너무 아파서? 아니면 어제 일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수업에 안 나오는 걸까?
사실 시몬도 어젯밤 금지된 숲에서 기도하는 프리스트의 모습을 떠올리면,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공포스러웠다. 어젯밤엔 악몽도 조금 꿨다.
그나마 시몬은 어머니가 프리스트였기에 기도하는 모습이 그럭저럭 익숙했지만, 카미바레즈에겐 몇 배나 정신적 충격이 컸을 것이다.
'수업 마치고 여학생 기숙사에 가봐야...... 응?'
그때 시몬의 옆으로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여학생이 보였다. 무척 익숙한 얼굴의 그녀는 시몬과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아, 시몬! 좋은 아침이에요!"
카미바레즈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시몬이 염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활기찬 모습이었다.
"......잠깐 나 좀 봐. 카미."
두 사람은 건물 뒤편의 조용한 공터로 장소를 옮겼다.
"어제 많이 놀랐지?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그냥 좀...... 꿈을 꾼 것 같아요."
"꿈?"
오랜만의 기분 좋은 밤 산책.
시몬과 사이좋게 버섯을 따던 일.
파수꾼에게 쫓겨서 도망치던 일.
시몬이 자신을 안고 절벽을 뛰어넘은 일.
마지막으로, 끔찍하기 그지없던 프리스트와 마주한 그 순간.
"꿈이 악몽으로 변하면서 기억이 끊기고 잠에서 깨어난 느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현실감이 조금 없네요."
그녀가 까친 팔꿈치를 슥슥 쓸어내리며 말했다.
'꿈처럼 받아들여서 충격이 덜 한 건가?'
뭐가 어떻게 됐건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시몬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 프리스트는 파수꾼들을 보고 도망쳤어. 일단은 네 얼굴을 못 봤을 가능성이 높아."
"아......."
"다른 사람들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행동해. 그 프리스트의 정체가 누군지는 내가 찾아낼게."
"저도......!"
갑자기 그녀가 바짝 다가와 까치발을 들었다.
"저도 시몬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으, 응?"
"제 얼굴이 들키지 않았다고 이 사건에서 저만 빠지라는 말은 너무해요! 이건 우리 둘의 일이잖아요!"
그녀의 기세에 시몬은 조금 놀라서 고개를 뒤로 뺐다.
"그, 그래. 알았어. 그때가 되면 부탁할게."
"네!"
그때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두 사람은 헐레벌떡 강의실로 뛰어갔다.
* * *
첫 수업은 바힐의 저주학이었다.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 어젯밤 금지된 숲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바힐은 이론 설명을 끝내고 바로 실습으로 넘어갔다.
"저번 이그저스트 수업에서는 교정구에 의존하는 학생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이번 시간엔 더 쉬운 저주로 연습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전이의 저주'는 칠흑을 대상 생명체에게 부여하는, 모든 저주의 기본이 되는 수식을 사용한다. 이 마법진을 교정구 없이 공중에 띄워서 성공시키는 게 이번 수업의 목적이었다.
'스으으읍.'
집중력을 끌어올린 시몬은 두 손바닥을 마주 보게 벌렸다.
마치 커다란 과일을 손에 들고 있는 느낌으로.
이제 양 손바닥에서 칠흑을 흘려보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야 했다.
시몬의 검푸른 칠흑이 흘러나가 마법진의 기본 단계인 '원'을 그렸다.
'......처음부터 빡세다.'
힘겹게 베이스가 되는 원을 깔아놓고, 그 중앙에 룬어를 그려 넣었다.
물론 마음먹은 만큼 잘되진 않았다. 룬어를 추가하려 하자 베이스가 반발작용을 보이며 흔들렸고, 손도 수전증이 온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도 시몬은 어눌하게나마 룬어와 수식을 써내려갔다. 원래는 깔끔하게 복사기에서 나온 그림처럼 되어야 하는데, 시몬의 마법진은 글자들이 자기 멋대로 꿈틀거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끙.'
일단 이대로라도 마법을 시전해 보기로 했다. 책상 위에는 곧게 솟은 장대 같은 식물이 놓여 있다.
칠흑을 먹고 자라는 식물인데, 전이의 저주에 성공하면 몸체에서 꽃봉오리가 핀다고 한다. 시몬은 간절한 마음으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펑!
그러나 발동은커녕, 마법진이 폭발하는 소리를 내며 흩어져 버렸다.
시몬은 아쉬움에 한숨을 삼켰다.
'역시 쉽지 않네.'
당장 다음 주에 사이클롭스를 잡아야 하는데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었다. 시몬은 이를 악물고 다시 두 손바닥을 펼쳤다.
"어때요? 할 만합니까?"
그때 어깨를 덮는 포근한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바힐이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시몬이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아, 네! 열심히 하고 있......."
"코어의 운용."
시몬의 말이 우뚝 멈췄다.
"코어의 운용이 미숙하니 칠흑의 경도가 떨어지고, 이어지는 마법진 구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아......."
가슴이 뛰었다. 계속 한계를 절감하던 부분이지만, 자신이 생각만 하는 것과 키젠 교수의 입에서 직접 듣는 건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코어 운용은 제대로 배울 만한 곳이 없을 겁니다. 키젠에서 가르쳐 주기엔 너무 기초이기도 하고, 사람마다 운용방식이 다르니까요."
바힐이 시몬의 어깨를 짚고 있는 손에서 검지를 세웠다.
"잠시 실례."
그러곤 검지로 시몬의 어깨를 꾹 눌렀다.
뚝.
순간 머릿속이 텅 비워지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 학생들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시몬의 몸은 교실과 동떨어진 공백의 세계에 표류했다.
"저주는 꼭 해롭기만 하다는 편견이 있죠. 관계자로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힐이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주위의 소음이 사라져서 그럴까,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선명하게 잘 들렸다.
"교수님, 이건......."
"놀라지 마세요. 감각 저주의 변형으로 시몬 학생의 감각을 극대화 시켰을 뿐입니다. 자, 그럼 다시 집중."
사근사근하게 울려 퍼지는 바힐의 목소리에, 시몬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대기 중의 마나를 몸으로 끌어모아 보세요."
시몬은 시키는 대로 마나를 체내로 끌어모았다. 이번엔 바힐이 왼손도 시몬의 어깨에 올려두었다.
"이제 마나를 코어에 통과시켜 볼 겁니다. 먼저 제가 하는 걸 잘 보세요."
체내의 마나 중에, 시몬이 통제하지 못하는 한 줄기의 마나가 느껴졌다. 그것이 심장 아래의 코어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대로 코어를 통과해 버리는 게 아니었다. 마나가 코어를 따라 회전하며 진득하게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시몬 학생의 칠흑은 보통 사람들과 다릅니다. 단순히 뽑아낸다는 이미지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러면......."
"순환."
코어에서 회전하던 마나가 자연스럽게 칠흑으로 변하며 외부로 방출되었다. 마치 검은 태양의 코로나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였다.
"변환, 변형, 변조라는 이미지를 버리세요. 코어를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하고, 살살 달래면서 이끌어나가세요. 자연스럽게 칠흑이 외부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아......!"
"자, 이번엔 시몬 학생의 차례입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체내의 마나에 집중했다.
변환이 아니라 순환. 순환하는 이미지.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새긴 말을, 시몬은 마나로 이미지화시켰다. 그의 의지에 반응하듯 마나가 코어에 흘러 들어가 흐르기 시작했다.
"코어를 힘들여 제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먹고, 관조하는 겁니다. 이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세요."
바힐의 말대로, 코어는 정말 자신의 힘으로 움직였다.
코어가 칠흑을 회전시키면서 주위의 마나를 끌어들였고 칠흑에도 점점 힘이 붙었다. 이내 코어의 내부가 꽉 차며 칠흑을 외부로 방출했다.
'아......!'
드디어.
시몬의 몸 안에서 검은 태양이 완성됐다.
"잘했습니다! 그럼 이번엔 감각을 50%로 떨어뜨려 볼까요?"
뿌옇던 시야가 돌아왔다.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에서, 이제는 옆자리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정도가 되었다.
"자, 다시 해보세요."
"네!"
시몬은 몇 번이고 반복했다. 감각과 집중력이 극대화됐을 때만큼 칠흑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에 감을 잡고 세 번째 만에 성공시켰다.
"칠흑은 기억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바힐이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마치 사람의 손발과 같죠. 수백 수천 번씩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칠흑이 습득된 흐름을 재현하려고 합니다. 신기하죠? 그러니 반복 연습과 올바른 습관을 들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기분이 좋았다.
깨달음이 머릿속에 쏙쏙 박히는 느낌.
그저 냉철하고 계산적인 인물인 줄 알았는데, 시몬은 바힐의 새로운 면모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내친김에 저주까지 해볼까요?"
바힐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시몬의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다른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오롯이 자신의 몸과 칠흑, 그리고 눈앞에 놓인 식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칠흑을 일으켜 보세요."
바힐의 목소리에 시몬이 두 손을 마주 보게 들었다. 칠흑이 손끝에서 물감처럼 뻗어 나왔다.
"제가 보조하고 있으니 안심하시길.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마법진을 완성해 보세요."
"아, 네!"
혼자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공중에 뜬 마법진은 흔들리지 않고 완벽히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시몬은 마음 놓고 원하는 만큼 칠흑을 일으킬 수 있었다.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쩔쩔매던 바로 몇 분 전의 일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마법진이 완성됐다.
"그럼, 발동하세요!"
이내 모든 감각이 돌아오자, 시몬이 눈을 부릅뜨며 마법진을 일으켰다.
전격을 연상케 하는 한 줄기의 칠흑이 번쩍! 쏘아져 나가 식물에 명중했다.
화아아악!
그러자 놀라운 장관이 펼쳐졌다.
식물의 몸체에서 수많은 꽃망울이 폭발하듯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것이다.
꽃들은 어느새 시몬의 책상을 뒤덮고 주위로 뻗어 나갔다. 시몬은 순식간에 꽃밭 한가운데에 파묻힌 격이 됐다.
"와아아!"
"뭐야 뭐야?"
곳곳에서 학생들의 탄성이 튀어나왔다.
"교, 교수님. 이건......!"
"이게 바로 당신이 가진 가능성입니다."
바힐이 시몬에게 들릴 만큼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는 마시길. 저는 안정적인 출력을 일으킬 수 있도록 보조만 했을 뿐, 머지않은 미래에 당신 혼자 해낼 수 있을 경지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꽃을 피운 건 엄연히 시몬의 힘이었다.
"당신의 칠흑은 특별합니다. 시몬 폴렌티아."
어깨를 짚고 있는 바힐의 손가락이 들썩였다. 푸른 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나 어느새 시몬의 가슴 앞까지 뒤덮고 있었다.
"부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바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당신의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그리고 이 특별한 칠흑을 200% 활용하기 위해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