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3화
임무.
키젠이라는 특이한 시스템을 이루는 핵심 중 하나.
학생 보호기간이 끝난 뒤, 키젠의 학생들에게는 '임무 기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
주말을 끼고 2~3일을 전후하는 시간, 즉 5일 정도를 임무 기간으로 지정하는데, 이때 학생들은 외부에서 의뢰하는 다양한 임무들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단순 잡무 및 아르바이트에서부터 몬스터 퇴치, 경호, 요인 암살, 심지어는 대리 전쟁까지.
그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현직 네크로맨서들이 수행하는 임무들까지 키젠 학생들에게 풀린다.
받은 임무의 난이도와 성공 여부에 따라 '평가 점수'가 매겨지는 것은 물론, 의뢰비까지 정식으로 수령할 수 있다. 막대한 재료비 지출로 자금이 부족한 키젠 학생들에게는 가장 빠르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젯밤 홍펭이 말한 대로, 키젠에서는 이번 주 주말을 포함한 5일을 임무기간으로 설정했다.
"임무기간 동안 학생들의 전략은 제각각이야."
점심시간, 식당에서 딕이 정보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 기간에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임무를 받아서 클리어해야 하거든? 그냥 로크섬에서 간단한 임무를 클리어하고 남은 시간 동안 공부 바짝 해서 성적을 끌어올리는 애들도 있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섬 밖으로 나가서 굵직한 사건 하나 해결하고 수익과 임무 점수를 노리는 애들도 있어."
"으음."
시몬이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5일 안에 임무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당연히 의뢰 실패지. 돈도 점수도 꽝."
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특별한 경우엔 사유서를 쓰고 계속 임무를 진행할 수 있긴 한데, 결국 들을 수 있는 수업이 다 빵꾸 나버리니까 자기 손해지."
"리스크가 있네."
딕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적당히 로체스트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거 하나 잡아서 꿀 빨고, 사업 확장에 집중하려고."
[우리는 고민할 것도 없다!]
시몬의 교복에 매달려 있는 피어의 분신이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시몬에게만 들렸다.
[임무를 핑계로 대륙으로 나간다!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군단의 전력들을 다시 끌어모으고 이전의 위세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시몬도 동감이었다.
아버지의 휘하에 있었던 고대의 언데드들이 대륙 어딘가에 널려 있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시몬이 시도할 수 있는 최대의 파워업이었으니까.
'그런데 피어보다 더 강한 언데드들도 있어요?'
피어의 분신이 히죽거렸다.
[크흐흐! 나는 군단의 관리자다! 누구도 감히 내게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전투능력으로만 따지면 군단 휘하의 대장을 맡았던 녀석들 중에는 진짜 괴물이 있지.]
'군단 휘하의 대장이요?'
시몬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군단은 원래 여러 개의 언데드 부대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지성을 갖춘 에이션트 언데드들이 휘하 병력들을 통솔했었지! 모든 대장들과 그들이 이끄는 언데드들을 규합하면 군단이 이전의 위세를 되찾는 것도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피어 말고도 새로운 에이션트 언데드를 가질 수 있게 된다니!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장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죠?'
[크흐흐! 그 미친 것들이 사고안치고 얌전히 지낼 리가 있나. 틀림없이 대륙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거다. 바로 그게 키젠의 임무에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약간의 단서라도 있다면 무조건 나가야겠네요.'
"시몬."
피어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데, 딕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혼자서 실실 쪼개고 있어?"
"어, 어? 아하하! 아니,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
시몬이 재빨리 웃어넘겼다.
"암튼, 임무를 대충 쉬운 거로 때우는 것도 문제야."
딕이 포크를 휙휙 흔들며 말했다.
"무려 임무 성적이 걸려 있다고. 계속 쉬운 임무만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간, 나중에 진짜 요인 암살 같은 위험한 임무를 맡아야 할지도 몰라."
"미루는 것도 상책은 아니란 거네."
"그렇지."
시몬은 더더욱 결심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다음 날 아침.
키젠의 남녀 기숙사를 포함한 주요시설 곳곳에 임무 게시판이 설치됐다. 게시판 앞에는 학생들이 바글거리며 몰려들어 있었다.
"로크섬 웨어울프 퇴치 갈 사람? 3인 파티야!"
"파란 의뢰서에 랭거스틴 임무! 이런 게 개꿀인데."
"랭거스틴은 의뢰비가 너무 짜. 갈 거면 좀 더 멀리 가고 말지."
다른 학생들의 잡담을 들으며 시몬도 게시판에 붙은 의뢰서들을 확인했다. 의뢰서마다 색깔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얀색 - 로크섬 내 임무. 프리스트 충돌 가능성 없음.
파란색 - 암흑연합 내 임무. 프리스트 충돌 가능성 극히 낮음.
빨간색 - 중립지대 내 임무. 프리스트 충돌 가능성 높음.
검은색 - 신성연방 내 임무. 프리스트와 충돌함.
위험한 임무일수록 의뢰비와 임무 점수가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같은 파란색 의뢰서라도 임무 내용에 따라 의뢰비는 천차만별이었다.
가만 보고 있으니 하얀색 의뢰서들이 가장 빠르게 사라져 갔다.
아직 1학년 학생들은 키젠에 적응해가는 단계였고, 임무보다는 학교생활에 더 집중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첫 임무부터 힘든 건 피하고 보자는 심리도 작용했다.
물론 시몬의 생각은 달랐다.
'로크섬에 아버지의 언데드가 또 있을 리 없으니까.'
시몬은 햐얀색 의뢰서는 바로 건너뛰고, 파란색 의뢰서가 붙어 있는 게시판부터 살폈다.
파란색 의뢰서도 거리나 심리적 부담감이 덜하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적당히 안전한 임무를 택하면서도, 수입 욕심이 있는 학생들이 이쪽을 골랐다.
'피어.'
[음, 보고 있다.]
시몬의 교복에 붙은 피어의 분신이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눈에 띌 만한 건 없군.]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시몬은 한 발짝 넘어가 빨간색 의뢰서가 붙은 게시판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보고 있는 학생들이 확 줄어들어 있었다.
작은 글씨를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려던 시몬은, 실수로 옆에 있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 미......."
커다란 덩치의 남학생.
다름 아닌 헥토르였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시몬은 얼른 거리를 벌렸다. 헥토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시몬 폴렌티아."
그때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너도 중립지대에 가려는 거냐."
"......그냥 살펴보려고."
헥토르가 픽 웃음을 흘렸다.
"중립지대는 키젠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무법 지대다. 거기서 임무를 하다가 무슨 일을 당하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든, 키젠에서는 알 방법이 없지."
그의 입꼬리가 깊게 올라갔다.
"부디 우리가 임무 중에 마주치길 바라마."
헥토르는 게시판에 붙은 빨간 의뢰서 하나를 뜯어내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헥토르."
"?"
헥토르가 돌아보자 시몬이 웃었다.
"몸조심해."
"......!!"
순간, 헥토르의 표정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목덜미에 우락부락한 핏줄이 두드러지며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시몬은 어깨를 펴고 태연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
"......."
잠깐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결국 헥토르가 짜증스럽게 등을 돌리더니 계단을 올라갔다. 시몬도 다시 고개를 돌려 게시판을 살폈다.
[흐흐흐흐! 저 꼬마는 왜 저러는 거냐?]
'저도 몰라요.'
아무리 생각해도, 시몬은 헥토르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환학 첫 시간에 망신 준 것 때문인가? 근데 그건 저주학 수업에선 이쪽에 망신 받았으니 쌤쌤으로 칠 수 있는 거 아닌가.
목욕탕에서 한판 붙은 거? 그것도 진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카쟌의 난입으로 무마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던 시몬은 머릿속에서 헥토르를 깔끔히 지우고 다시 빨간색 의뢰서에 집중했다.
'피어, 이건 어때요? 감염된 좀비 떼의 마을 습격.'
[감염은 너무 흔한 케이스야.]
'그럼 이건요? 갑자기 출현한 붉은 뱀 떼의 공격으로 건축물과 농작물에 피해.'
[흥미롭긴 하지만 대장들 중에서 해당 능력을 가진 녀석은 없다.]
시몬과 피어가 꼼꼼하게 의뢰서를 살펴보고 있는 그때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게시판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의뢰서 뭉치 구석에, 유난히 눈에 띄는 의뢰서가 한 장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빨간색 의뢰서 게시판에 붙어 있는 파란색 의뢰서였다.
'실수인가?'
시몬이 그 의뢰서를 보려고 다가가는 순간, 누군가가 그 의뢰서를 주욱 떼어냈다.
"아, 이게 아직 붙어 있네요. 이건 무시하십시오."
임무 게시판을 관리하는 하수인이었다. 시몬이 재빨리 물었다.
"그건 무슨 임무예요?"
"아, 이건 몇 달 전부터 있던 의뢰인데...... 키젠에서 하청을 준 네크로맨서가 맡았다가 행방불명된 사건입니다."
시몬의 눈이 커졌다. 학생도 아니라 네크로맨서가 당했다고?
"저도 한번 살펴볼 수 있을까요?"
"예? 하, 하지만 이건 학생들이 할 만한 임무가......."
"부탁드립니다."
관리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의뢰서를 내밀었다. 시몬과 피어는 재빨리 의뢰서를 살폈다.
의뢰 : 실종 사건 해결
의뢰등급 : D -> B
의뢰보상 : 50골드.
위치 : 영지 아르니쉬.
세부내용 : 젊은 여자들이 말라 비틀어진 시체로 발견.
특이사항 : 임무 수령자 행방불명.
시몬은 의뢰서에 동봉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로 사람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찾았다!]
피어가 입을 찢으며 웃었다.
[이 흔적은 그녀다! 에르제베트!]
'그게 누구예요?'
[거미 부대를 이끄는 에이션트 언데드다. 에르제베트나 그녀가 이끄는 거미들이 사람의 체액을 빨아먹으면 이렇게 변하지. 틀림없어!]
시몬은 품 안에 소중히 의뢰서를 챙겼다.
등급이 높아서 그런지 보상도 무려 50골드다.
최근 스켈레톤 세트를 너무 지른 바람에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시몬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학생. 정말 그걸로 할 건가요?"
"네."
"아마 담당 교수님이 허락해 주시지 않을 텐데요."
시몬이 미소 지었다.
"한번 설득해 봐야죠."
* * *
하얀색 의뢰서의 임무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맡을 수 있지만, 빨간색 의뢰지 이상 혹은 B등급 임무부터는 담당 교수의 상담이 필요했다.
시몬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제인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제인 교수님, 시몬 폴렌티아입니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로 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벽의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꽉 들어찬 책장이 눈에 띄었고, 구석구석 박스에는 무수한 서류의 탑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는 방이었는데, 유일하게 흐트러진 부분은 그녀의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서류들이었다.
이게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걸 시몬도 알 수 있었다.
"임무 때문에 온 건가요?"
서류를 살피는 제인은 평소와 달리 올림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질문을 던지면서도 눈은 여전히 서류에 고정된 채였고, 손에 들린 깃펜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네! 교수님."
"한번 보죠."
시몬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와 의뢰서를 책상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제인은 눈동자만 움직여 의뢰서를 한번 훑고는 다시 자신의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화, 확인하신 건가?'
시몬이 우물쭈물 서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의뢰로 바꿔오세요. 신입생이 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시몬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자신 있습니다, 교수님. 제가 꼭 이 의뢰를 맡아서 해결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깃펜이 멈췄다. 안경 너머로 자신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제인의 눈동자가 보였다.
어쩐지 긴장감이 몰려든 시몬이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자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