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4화
"자신 있다고?"
시몬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인은 깃펜을 들어 의뢰서에 서명했다.
"가보세요."
"......네, 네?"
시몬은 머릿속에 준비해 둔 무수한 변명들이 허무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그냥 이렇게 허락해 주는 거야?
"키젠의 교수 앞에서 자신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겠죠.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키젠이고, 오로지 결과에 책임을 지면 됩니다."
그녀의 눈빛이 섬뜩해졌다.
"부디 날 기만한 게 아니길 바랍니다. 시몬 폴렌티아."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낸 시몬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그 이상의 흔들림은 없었다. 시몬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녀의 깃펜이 한차례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부디 몸 무사히 다녀오세요."
툭 던지는 한마디 같았지만, 시몬은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 * *
시몬은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딕! 나 잠깐 로체스트에 내려갔다 올까 하는데, 안전한 루트 있어?"
"엉? 오늘?"
시몬은 딕에게 들은 루트로 로체스트에 내려갔다.
그곳에서 장비 몇 개를 구매하고, 신분을 감추기 위한 모험가용 로브와 옷도 한 벌 구매했다.
그리고 바로 금지된 숲으로 올라가서 피어의 유적에 들렸다.
"피어! 이거면 딱이지 않아요?"
시몬이 선뜻 내민 것은, 어디 낡은 고성의 실내 디자인으로 쓰일 법한 텅 빈 플레이트 갑옷이었다.
피어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지금 나보고 저 안에 들어가란 소리는 아니겠지?]
"임무 중엔 저랑 같이 다니겠다면서요? 그 모습으로밖에 나돌아다닐 순 없으니까요."
[......쯧.]
결국 피어가 갑옷 안으로 들어갔다. 입었다기보다는 정말로 들어갔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잠시 후, 갑옷이 부자연스럽게 덜컥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이 차림으로 다니라고?]
"잘 어울려요 피어!"
시몬이 활짝 웃는 얼굴로 손뼉을 쳤다. 피어가 발끈하며 돌아보았다.
[망할! 안나처럼 웃지 말라니까!]
"하하하!"
피어와 군단화된 스켈레톤들을 아공간에 집어넣은 시몬은 다시 키젠으로 돌아왔다.
기숙사 방에 들어오니 딕은 잠들어 있었고, 카쟌은 보이지 않았다.
시몬은 혼자 짐을 싸고 여행 준비를 했다. 내일 새벽 일찍 텔레포트로 임무 출발이었다.
'진짜 오랜만에 로크섬 밖에 나가는구나.'
시몬은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새벽.
시몬은 짐을 챙기고 통보받은 장소로 이동했다. 키젠의 뒷산 언덕에는 장거리 텔레포트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미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메이린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도 이곳의 텔레포트 장치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안녕, 메이린."
"안녕! 근데 너 진짜 그 임무 맡을 거야?"
"응."
메이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조사 임무는 5일 만에 완수하기 어렵다니까. 난 분명 더 쉬운 걸로 하라고 했다?"
시몬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거, 걱정 아니거든!"
그녀가 꽥 소리 질렀다. 시몬은 웃어넘기며 다시 물었다.
"넌 어디로 가는데?"
"랭거스틴 근방에서 올라가는 상단 호위 임무."
그녀가 으스대듯 웃었다.
"너무 좋지 않니? 랭거스틴에서 출발하는 마차 여행이야."
"그래도 조심해. 혹시 도적 떼랑 맞닥뜨리면......."
"에이, 요즘도 옛날처럼 그러는 줄 알아? 그리고 만약 도적들이 와도......."
그녀는 겉에 입은 모험가용 로브를 슬쩍 벌렸다.
검은색 재킷과 흰 셔츠, 그리고 스커트로 이어지는 키젠의 여학생 교복을 안에 입고 있었다.
"이거 보이고 꺼지라 하면 되지. 머저리 같은 도적 떼들도 키젠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 거 아냐."
시몬이 헛웃음을 흘렸다.
입학 전날에 랭거스틴에서 갱들과 마주했을 때, 로레인이 키젠이라는 이름을 밝히는 순간 그들 모두 전의를 상실한 기억이 떠올랐다.
"......뭔가 치사한 방법이네."
"원래 상단에서도 이러려고 키젠 학생한테 임무 의뢰하는 거야."
그때 텔레포트 관리원들이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들은 메이린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안녕! 다음 주에 봐."
"그래, 다치지 말고."
"너나 조심해. 네가 가는 칼로스는 암흑연합에서도 최전방에 있는 나라니까."
메이린은 그 말만 남기고 뛰어갔다.
랭거스틴으로 넘어가는 학생들이 꽤 많았는지 텔레포트 장치 위에 다닥다닥 붙어섰다. 랭거스틴은 키젠과 가깝기도 하고, 임무가 끝나면 그곳에서 놀다 갈 수 있으니 인기가 많은 행선지였다.
잠시 후 메이린과 학생들이 텔레포트로 전송되고, 관리원이 시몬과 몇몇 학생들의 이름을 불렀다.
시몬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신분증과 의뢰서를 제시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던 관리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몬은 키젠에서 지급받은 학생증과 제인의 서명을 받은 의뢰서를 내밀었다.
"칼로스 왕국의 아르니쉬 영지행.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넵."
시몬이 서명한 문서철을 받아든 관리원이 밝게 웃으며 비켜섰다.
"확인되셨습니다. 올라가시죠."
"감사합니다."
시몬이 텔레포트 장치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시몬보다 먼저 와 있는 학생이 보였다.
'아.'
아는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같이 학생 대표로 선서도 했었다. 그때 시몬이 남학생 대표였고, 그녀가 여학생 대표였다.
아름다운 상아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이 여학생은, 키젠 교복 위에 하얀 외투를 걸치고 단아한 외형의 양산을 곱게 잡아 쓰고 있었다.
그녀 또한 시몬과 눈이 마주치자 치맛단을 들어 인사했다.
"또 뵙네요."
상아탑 공식 후계자. 특례 2번 세르네 아인다르크.
어쩐지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의 배경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녀에게서 흐르는 이질적인 기운 때문이었다.
'......숨 막혀.'
키젠의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이런 특유의 아우라가 있는 사람은 로레인뿐이었다.
로레인은 위압적이고 거친 느낌이 강했지만, 세르네의 경우는 까마득하게 높은 어떤 품격 같은 게 느껴졌다.
상대로 하여금 초라하고 주눅 들게 하는, 그리고 우러러보게 하는 군주의 품격. 진짜 자신과 같은 또래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저희 메이린이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
그녀는 시몬과 메이린이 같은 반에 같은 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틱틱대긴 하지만, 속은 착하고 여린 아이예요. 부디 잘 부탁드려요."
시몬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조금씩 몸의 떨림과 긴장감이 가시며 잡생각이 날아갔다.
마침내 시몬의 입가에도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그런 소릴 왜 나한테 하는 거지?"
"......네?"
"메이린은 네 보호를 받는 사람이 아니야. 너와 동등한 키젠의 신입생이지."
시몬은 그녀의 말과 억양에 담긴 의중을 알아차렸다.
세르네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메이린을 자신의 아랫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렸다.
"네가 걱정할 것 없이 메이린은 잘하고 있어."
세르네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군요."
단순히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력을 소모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더 상대하기 싫었던 시몬이 고개를 돌렸지만, 세르네는 비취색 눈을 깜빡이며 빤히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몬의 이마에 땀에 송골송골 맺혀갔다.
"그럼 장치를 작동시키겠습니다!"
다행히 적당한 때에 관리인이 장치 작동을 알려왔다.
우우우우웅!
텔레포트 장치가 발동하며 눈부신 빛이 시몬과 세르네의 몸을 집어삼켰다.
세르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뵈어요."
또 보기 싫다!
시몬은 그런 생각을 하며 두 다리에 붕 떠오르는 감각에 몸을 온전히 맡겼다.
* * *
암흑연합.
칼로스 왕국, 아르니쉬 영지.
영지성의 영주 집무실.
"......또 나타났다고?"
갈색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 남자가 인상을 찡그린 채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가 바로 아르니쉬를 관리하는 레이먼드 백작이었다.
"예, 송구합니다."
경비대장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는 들것에 실린 채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시신이 있었다. 얼굴은 천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축 늘어진 손은 마치 미라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는 빈도도 계속 늘고 있어. 이번 달에만 벌써 세 건이야!"
백작이 탁자를 탕 소리가 내리쳤다. 그러곤 셔츠 카라를 풀어헤치며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이렇게 불안해서는 살 수가 없어! 외부에서 고용한 용병들은?"
"계속 수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영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무것도......."
백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여간 돈만 먹고 제대로 일하는 것들이 없다니까! 그것들도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쭙기 송구합니다만, 키젠에서는......."
"키젠에선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네."
백작이 이를 갈았다.
의뢰를 넣은 지 벌써 석 달째다. 미지의 사태 때문에 계속 피해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키젠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일반 의뢰로 넣는 게 아니라, 키젠 본부에 정식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편이......."
"본부의 네크로맨서를 부르자고? 자네는 영지 예산을 죄다 의뢰비로 날려 버릴 일 있나?"
"시, 실언했습니다!"
백작이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만 들어가 보게."
"예, 쉬십시오!"
경비대장과 경비병들이 시신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백작은 한숨을 쉬며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한잔 드시겠소?"
백작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커튼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유는 감사합니다만, 아직 수행 중인 몸이라 사양하겠습니다."
커튼이 걷히며,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브 차림에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후드 아래로는 희끄무레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백작은 단번에 와인을 들이켰다.
"귀하신 분을 이런 곳까지 불러서 미안하오. 하지만 아시다시피 사정이 워낙 급해서."
당장 다음 달에 왕태자가 영지를 방문하는 예정이 잡혀 있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이런 뒤숭숭한 일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백작의 눈이 번뜩였다.
"정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거겠지?"
의자에 앉은 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에 든 지팡이가 후드 끝을 밀어 올리자, 풍성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앳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에프넬을 신뢰하지 않는 건가요?"
백작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걱정 마세요 백작. 사악한 망자들의 소행에서 대륙민들을 구하는 것은 위대한 여신님의 뜻."
그녀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그려졌다.
"교황 성하의 명예를 걸고. 나 신성 대학 에프넬 2학년, 엘렌 자일이 반드시 사건을 해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