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9화
시몬과 엘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숲길을 걸었다.
이 시간 동안 엘렌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에프넬에 재학하던 시절, 오로지 신성의 '화력'에만 올인한 타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화력 외엔 다른 대처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고, 무엇보다 그 흔한 회복 마법을 쓰지 못해서 퇴학당했다. 프리스트로서는 꽤나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그리고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버냐고 물어봤더니, 그녀는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동생들을 혼자 키우고 있던 모양이었다. 엘렌의 새로운 면모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저, 저어. 시몬 님."
시몬이 빙그레 웃었다.
"그냥 시몬이라고 불러."
"아, 네! 시몬."
엘렌은 이 소년에게 이유 모를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에프넬에 다니던 시절, 네크로맨서들은 하나같이 끔찍하고 추악한 괴물들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 소년은 달랐다. 사실 네크로맨서도 엄연히 사람이었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헤헤. 이제 좀 친해지기도 했고, 같이 동맹을 맺기도 했고, 제가 두 분을 어떻게 할 실력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눈치를 보며 밧줄에 묶인 두 팔을 슬쩍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제...... 이거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시몬은 대답 대신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그녀가 삐질 땀을 흘렸다.
'아, 안 되는구나.'
[크흐흐! 드디어 미쳤군!]
투구 속에서 피어가 눈을 부라렸다.
[이거 봐라, 소년! 포로 따위에게 잘해주면 금방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른다니까! 일단 손가락 몇 개만 자르면 고분고분해지.......]
"으아악! 죄, 죄, 죄송해요! 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그녀가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시몬은 말렸다.
"알면 됐어 엘렌. 피어도 그만해요."
피어가 대검을 내렸고 엘렌은 얼굴을 붉혔다. 진짜 한없이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영지성에 도착했다.
계획대로 엘렌은 피어의 로브 안으로 숨었고, 시몬과 피어는 성문으로 다가갔다.
"멈춰라! 누구냐?"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창을 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몬은 두 팔을 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영주님의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지금 당장 영주님을 직접 뵙고 싶은데요."
"......뭐?"
"머리에 화살 처맞았나. 이 밤중에 영주님을?"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넵. 급한 일이라 지금 당장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경비병들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별의별 또라이 새끼들을 다 보겠네."
"영주님이 니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인 줄 알아? 곱게 말할 때 꺼져."
"아냐, 이 새끼 수상해. 그냥 해가 밝을 때까지 기둥에 묶어놔."
경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 맨 밧줄을 들었다. 시몬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어린 놈의 새끼가 건방지게...... 너 뭔데? 신분을 밝혀."
"키젠에서 왔습니다."
우뚝.
두 경비병의 동작이 멈칫했다.
"푸하하하하하! X발! 이 새끼 진짜 개 또라이 새끼네 이거!"
"니가 키젠이면 나는 네프티스다 미친놈아!"
두 경비병이 시몬을 포박하러 다가왔다. 시몬은 묶을 테면 묶으라는 듯 순순히 두 팔을 내밀었다.
"무슨 소란이지?"
그때 쪽문에서 경비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비병들이 기겁하며 군례를 올렸다.
"수, 수상한 놈이 영주님을 뵙겠다고 해서 체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수상한 놈?"
"예, 대뜸 자기 스스로 키젠이라고......."
그 말을 들은 경비대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키...... 젠?'
영지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실종 사건.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뒤숭숭한 일을 감추고 싶어 했던 영주는 비밀리에 키젠에 임무를 의뢰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영주의 최측근들뿐이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기에, 영주는 키젠에 대한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그런데 진짜로 왔다고?'
경비대장은 시몬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총명한 눈빛, 여유 있는 태도, 그리고 옆에 경호로 대동한 큰 키의 갑옷남까지.
'확실하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 소년, 정말로 키젠이다.
"......박아."
"예, 예?"
"머리 처박으라고 새끼들아!"
경비대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경비병들은 즉각 무기를 내려놓고 머리를 바닥에 댄 채 뒷짐을 졌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경비대장이 검을 뽑은 채로 다가왔다.
[뭐냐?]
피어가 대검 손잡이를 붙잡았지만 시몬이 팔을 세워 막았다. 경비대장은 시몬의 앞에 서서 바닥에 검을 꽂은 다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하들의 교육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제 목숨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러고는 목을 내미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경비들이 아우성을 쳤다.
'......어휴, 부담스러워라.'
시몬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아무리 키젠이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그리고 2학년이면 또 모를까. 시몬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1학년생이었다. 키젠에서 잘리면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거니, 결코 마음대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만, 일어나세요."
경비대장이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늦은 시간에 소란을 피운 제 잘못입니다. 경비병분들도 제 역할을 했을 뿐이니 너무 꾸중하진 마세요. 아, 두 분도 일어나세요."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던 경비병들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군기가 바짝 들려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시몬이 다시 경비대장을 보며 말했다.
"영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의뢰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낄낄낄낄!]
시몬이 경비대장의 뒤를 따랐고, 피어는 경비들을 약 올리듯 비웃었다. 경비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이게 말이 돼?'
'키젠이 이런 촌구석에는 왜?'
새벽이 다 되어가는 시간.
갑작스러운 키젠 측 인사의 방문에 영지성은 난리가 났다.
시몬이 널찍한 접대실에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극진한 대접이 이어졌다. 따뜻한 빵과 음식, 차와 포도주가 내어졌다. 심지어는 시녀들이 물 양동이를 가지고 와 발을 씻기려 했지만 부담스러웠던 시몬이 얼른 사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거 이거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작은 키에 뱃살이 툭 튀어나온 중년 남자가 활짝 웃으며 나타났다. 자다 막 깨어났는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아르니쉬의 영주, 레이먼드 백작이라고 합니다!"
"키젠 1학년생 시몬 폴렌티아입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먼 길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 의뢰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다고?"
"네."
"허허!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아무래도 여독이 많이 쌓여 있으시겠습니다! 일은 잠시 잊으시고 편히 쉬다 가시죠. 머무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여독이랄 것도 없었어요."
시몬이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왔으니까요."
"아아......! 그, 그렇군요! 역시 키젠은 다릅니다! 하하! 자, 자, 한잔 받으시죠! 이 땅의 포도로 생산한 특등품입니다!"
레이먼드가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척 봐도 독한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잔에 와인을 따른 그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 자."
"네."
레이먼드가 먼저 깔끔하게 한잔을 비웠다.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기에, 시몬은 살짝 입술에 대는 시늉만 했다.
잠시 후에는 시녀들이 커다란 통돼지 바비큐를 비롯한 호화로운 음식들을 내왔다.
시몬은 저녁을 먹고 왔다며 사양하고는 말했다.
"그보다 의뢰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아, 의뢰! 그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밤이고, 몸에 쌓인 피로를 푸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키젠 생활이 어디 학교생활입니까? 전장이지! 허허허!"
레이먼드가 손뼉을 치자, 접대실의 쪽문이 열렸다.
시몬은 기겁했다. 중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복장의 여자들이 시몬의 주위로 우르르 다가왔다. 레이먼드의 뒤에도 다섯 명 정도가 섰다.
"자, 마음에 드는 아이로 천천히 골라보시죠. 허허허!"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시몬이 얼굴을 붉히며 제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자, 레이먼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키젠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이빨도 자라지 않은 새끼 맹수.'
생각보다 쉽게 구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이먼드가 신호를 주자, 뒤에 선 여자들이 시몬의 어깨와 팔을 껴안았다. 다른 두 명은 시몬의 양옆에 무릎을 꿇고 황금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영주님."
"허허허! 예, 어느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전 아직 미성년자고, 이런 자리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있었지만, 목소리에 담긴 힘과 의지는 선명했다.
"영주님과 1:1로 논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시몬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레이먼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쪼끄마한 놈이 은근히 박력 있지 않은가? 괜히 사람을 찔끔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레이먼드는 어쩔 수 없이 여자들을 물렸다. 그녀들은 아쉬운 얼굴로 돌아가면서 시몬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눈을 찡긋했다.
시몬은 이런 어른들의 문화는 도저히 못 적응하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자,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하실 이야기가 의뢰 이야기라면 내일 다시......."
"아뇨, 지금 당장 해야겠습니다."
"......."
레이먼드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저쪽에서 세게 나오는 이상, 이쪽도 이제는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기 힘들게 됐다.
이게 마지막 한 수다.
"들어오게."
레이먼드가 신호를 주자 다른 방문이 열렸다. 정복을 차려입은 집사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시몬의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에는 의뢰비 50골드에 더해 각종 보석까지 들어 있었다.
"의뢰금입니다.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사건은 이미 해결됐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성에서 편히 쉬시다가 의뢰금을 수령하고 학교로 돌아가시죠."
"제가 알아본 바와는 사실이 조금 다르네요?"
시몬이 부드럽게 말했다.
"도둑길드에서 정보를 샀습니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한 건 발생한 걸로 압니다."
레이먼드가 빠득 이를 갈았다.
'......그 망할 놈들! 하여간 도움이 안 돼!'
"의뢰를 완수하지도 못했는데 보수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키젠에서 내려오는 감사 때문에 귀찮아지는 건 싫거든요."
"허허허! 그거야 제가 문제없도록 처리를......!"
"의뢰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그냥."
레이먼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냥 있으라면 있으쇼."
"......."
"아무리 키젠이라도 끽해야 1학년이, 백작이자 영주인 내게 비비려고 들어? 좋은 말로 할 때 이 일에서 손 떼. 의뢰금도 지급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까탈스럽게 굴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나.
시몬이 씩 웃었다.
"권유에 이어 협박까지. 세게 나오시네요 영주님."
"......."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올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
시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넘어와라.'
그리고 정확히 시몬이 예상한 대로, 레이먼드가 팔걸이를 쾅 쳤다.
"내가! 여기! 있으라고 했지!"
덜컹! 덜컹! 덜컹!
곳곳에서 문이 열리며 열 명이 넘는 무장한 병사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병사들에게 포위당했지만 시몬의 표정에는 일말의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은 실력행사라."
시몬이 여유로운 손짓으로 가상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그럼 이쪽도 가만있을 순 없죠."
화아아아아악!
영지의 바닥에 아공간이 열리더니 이내 눈구덩이에 푸른 불꽃이 휘몰아치는 스켈레톤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 언데드!"
"언데드다!"
순식간에 10기가 넘는 군단화된 스켈레톤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경비병들과 마주했다.
경비병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대륙민들이라면 누구나 언데드와 네크로맨서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심이 있었다. 교육, 역사, 세뇌 등으로 이어져 온 공포심은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이게 다 몇 마리야?'
그리고 레이먼드의 동공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네크로맨서의 힘의 척도는 소환수의 숫자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소대 단위의 병력을 컨트롤할 수 있는 1학년이라니!
절대 평범한 놈은 아니다. 아니, 1학년이라 자신을 밝힌 것도 거짓말이리라.
[크하하하하하하하!]
피어가 머리에 쓴 투구를 벗어 던졌다. 눈구덩이에 푸른 불꽃이 휘몰아치는 해골 머리가 튀어나왔다.
"으헉!"
"사, 사람이 아니었어?"
[좋아! 아주 좋아! 오늘 우리 식구가 많이 늘겠는데!]
쩌렁쩌렁!
피어의 입이 괴물처럼 쩌억 벌어졌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며 병사들이 다리를 덜덜 떨었다.
"자."
시몬이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겁에 질린 레이먼드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고, 시몬은 그의 영주석을 차지하고 앉아 미소 지었다.
"계속하실 겁니까?"
망자들이 피를 바라며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