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1화
숙소로 들어온 시몬은 에르제베트와 계약하기에 앞서 여러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허가 없이 인간을 죽이지 말 것.
체액 섭취가 필요할 때는 몬스터를 사냥할 것.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해코지하지 않을 것.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 등등.
바로 이런 조항들을 계약 조건으로 삽입하기 위해, 시몬은 에르제베트를 한번 거절했다.
시몬이 생각하기에 에르제베트는 인간보다 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었다. 피어처럼 믿을 수 있는 멘토라는 느낌보다는, 군단의 사고뭉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녀를 확실하게 통제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는 '군단에 들어와 주세요'가 아니라, 그녀 쪽에서 군단에 들어가게 해줄 것을 간청했기 때문에 시몬이 주도권을 꽉 잡은 상태다.
"다시 말하지만, 저랑 함께 로크섬으로 가면 갑갑한 생활이 될지도 몰라요. 피어의 유적과 금지된 숲이 행동반경의 전부고, 지금처럼 자유롭지도 않을 겁니다."
[예. 알고 있사와요.]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얼마든지 저를 구속해도 좋아요.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무엇이든 감내하겠사옵니다.]
"......."
이 언데드, 갑자기 태도가 너무 고분고분해지지 않았나? 물론 시몬의 입장에서야 편하긴 했지만, 조금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저의 몸과 마음 모두 당신의 것이옵니다. 절대적인 충정을 바치는 대가로 제가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의 눈이 빛났다.
[당신의 애정이옵니다.]
"......."
......부담스러움이 몰려든다.
"저는 인간이고 그쪽은 언데드잖아요. 혹시 뭐, 그...... 막 육체적인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당신이 원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강요하지는 않겠사와요.]
그녀가 빙긋 웃었다.
[지금은 소녀를 예뻐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진심으로 부담 백배였다.
애정을 원한다느니, 예뻐해 달라느니, 시몬은 평생 이런 부탁을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쯧쯧.]
피어가 혀를 찼다.
[완전히 꽂혔군.]
"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녀의 충성을 얻는 대가로 이 정도 조건이라면 수용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시몬은 에르제베트와 정식으로 계약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진행하시지요.]
그녀가 드레스 상의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좌우로 활짝 젖혔다.
"......와앗! 우와악!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방심하고 있던 시몬이 기겁하며 스스로 눈을 가렸다. 그의 반응을 본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가슴이 쩍 열어지면서 심장처럼 박동하는 검은 코어가 드러났다. 시몬은 얼굴을 가린 손가락을 살짝 벌려 코어를 바라보았다.
'아아, 사랑스러우신 분.'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을까. 몇 분 전에 뻔뻔한 얼굴로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던 그 사람과 정말로 같은 동일인물이라니!
그녀는 점점 더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자, 어서!]
"......끙."
시몬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 사이에 열린 코어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칠흑이 폭발하며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크윽!"
[아아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처음 군단과 계약하던 때와는 달리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칠흑이 안정화되며 그녀의 몸에서도 시몬의 검푸른 칠흑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크흐흐! 군단에 복귀한 것을 환영한다! 에르제베트!]
피어가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약에 묶인 언데드가 된 건 오랜만이옵니다.]
에르제베트가 손끝을 뻗자 거미줄이 뻗어 나와 천장에 들러붙었다.
이내 그녀의 칠흑이 거미줄에 덧입혀지자 은은하게 빛나는 검푸른 빛으로 변했다. 흉물스러운 거미줄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광빛 실내장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시몬의 입장에선 신기했다.
정말로 내 소유의 언데드가 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전보다 더 친밀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어떠냐? 에르제베트!]
[으으음.]
그녀가 거미줄을 거두어들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믿기 힘들 만큼 약해 빠졌사옵니다. 주인님께선 역시 초심자시군요.]
"......윽!"
시몬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댔다. 그 모습을 본 피어가 낄낄낄 웃어댔다.
[군단에 들어왔는데, 자연형 언데드일 때보다 오히려 더 약해지다니. 조금은 아이러니하옵니다.]
군단의 언데드들은 군단장의 칠흑과 연결되어 있고, 군단장이 강해지는 만큼 군단도 강해진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시몬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시뻘게졌다. 피어는 웃겨 죽겠다는 듯 아예 허리를 꺾으며 웃어대고 있었다.
"초, 초심자라서 미안하네요! 그래도 지금 키젠에 다니고 있으니까 한두 달만 더 지나면 틀림없이......!"
[그래도.]
그녀가 다시 한번 손끝에 검푸른 칠흑을 일으키고는, 얼굴을 붉혔다.
[온화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칠흑이옵니다.]
"......."
그러나 이미 17세 소년의 자존심에 입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시몬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서 이불을 확 덮었다.
"잘 거예요."
[크하하하하하! 삐쳤군! 삐친 거냐 소년!]
"제가 약한 건 팩트인데 삐칠 게 뭐 있어요."
[이런, 주인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으니 제가 침대 옆에서 사죄하겠사옵니다.]
"둘 다 저리 가!"
피어와 에르제베트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 * *
무려 50골드짜리 임무. 제인도 난색을 보였던 그 임무를 텔레포트 타고 넘어온 지 하루 만에 해결했다.
이대로 바로 키젠에 복귀하면, 이 일을 어떻게 하루 만에 클리어했냐며 의심받을지도 모르니 시몬은 기왕 밖에 나온 김에 영지에 머물며 마음껏 군단을 수련하기로 했다.
시몬과 피어, 에르제베트는 오크들의 대규모 서식지가 형성되어 있다는 아르니쉬 영지의 북부 산맥에 들어왔다.
[자! 그럼 주인님! 앞으로 주인님이 컨트롤하게 될 거미 언데드, '송장거미'의 튜토리얼을 시작하겠사와요.]
에르제베트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주위에는 시몬의 훈련을 위해 군단화된 거미들이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스켈레톤처럼 눈구덩이에서 칠흑이 타오르는 게 아니라, 여덟 개의 다리 끝에서 검푸른 빛이 일렁이는 효과가 일어났다.
그때 시몬이 손을 들었다.
[어머, 주인님. 아직 수업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질문이 생겼나요?]
"아뇨, 수업과는 상관없는 이야긴데요."
시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주인님이니 뭐니 이상한 호칭으로 계속 부를 거예요?"
[호호호! 부끄러우신가요?]
그녀가 입을 가리며 웃자 시몬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그냥 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냥 군단장님이라고 부르겠어요. 계속 진행할게요.]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며 신호를 보냈다. 송장거미 한 마리가 입에서 거미줄을 쭉 내뱉었다.
[송장거미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역시 '웹'이라고 부르는 거미줄 능력이옵니다. 속박기술이자, 이동기술이기도 하지요.]
"으음."
[자, 군단장님 앞에 다가온 두 기의 송장거미를 컨트롤해서, 나무에 거미줄을 쏘아보세요.]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송장거미의 사념에 접속했다. 그리고 명령했다.
'거미줄.'
촤악!
촥!
송장거미들이 입에서 거미줄을 쏘아 보내 정확히 나무를 맞췄다. 거미줄은 발사와 동시에 살짝 펴졌고, 나무에 닿자 그대로 몸체를 감싸 안았다.
[잘했사와요! 일반적으로 입에서 발사하는 거미줄은 속박용으로 쓰이고, 꽁무니에서 발사하는 거미줄은 이동용으로 쓰이죠.]
아까 앞서 시범을 보였던 송장거미 두 마리가 이번엔 꽁무니에서 거미줄을 발사했다.
높게 쏘아져 나간 그것은 키 큰 나무에 부착되었고, 거미가 앞으로 조금 걸어가서 몸을 띄웠다.
마치 로프를 타고 가는 것처럼, 거미의 몸이 시계추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와! 저렇게 가는 건데 생각보다 엄청 빠르네!'
그러곤 타깃으로 정한 나무에 달라붙어 독니를 박아넣었다. 나무껍질이 움푹 파이며 녹색 액체가 줄줄 흘렀다.
[여기까지가 기초적인 연계기입니다. 한번 해보시겠어요?]
"당연히 해봐야죠!"
[그럼 타깃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씩 웃었다.
[좋아요. 저 오크들로 하죠.]
나무 뒤편, 오크 두 마리가 쿠룩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피부색은 회색이었고, 코는 돼지처럼 납작하며,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어금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레이 오크. 이 근방의 산맥을 지배하고 있는 몬스터.
한때는 아르니쉬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을 만큼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얼떨결에 바로 실전이네.'
그래도 기왕 무대가 갖춰졌으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몬이 두 송장거미의 사념에 접속했고, 오크 두 마리는 이제 시몬을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꽁무니로 거미줄을 발사하고.'
두 송장거미가 몸을 돌려서, 오크가 달려오는 반대쪽 나무에 거미줄을 꽂았다.
'몸을 살짝 들어서 그대로 대쉬!'
타닷.
탓.
송장거미들이 시계추 궤적을 그리며 나아갔다. 그러나 컨트롤이 어긋났는지, 간발의 차이로 달려오는 오크를 살짝 지나치고 말았다.
[어머, 아깝네요!]
시몬의 앞을 막아선 에르제베트가 칠흑을 일으켰다. 하지만 시몬은 나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보냈다.
'발사!'
촤악! 촤악!
교차 운용. 반대편 거미의 사념에 접속해서 입으로 거미줄을 쏘아 보내 오크들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쿠룩! 쿠루룩!
오크들이 버둥거리며 끈적거리는 거미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때 시계추 운동의 끝까지 날아갔던 거미들이 다시 반대로 돌아와서 두 오크의 등을 덮쳤다. 그대로 독니가 목덜미에 박혔고, 오크들이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됐다!"
움찔움찔하던 오크들은 결국 독이 퍼져 나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훌륭하옵니다! 컨트롤이 벌써 상당한 수준이와요.]
"이 정돈 기본이죠."
-쿠룩!
-쿠루루룩!
그때였다. 이 근처에 오크 부락지가 있는 건지 그레이 오크들이 숲속에서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숫자가 꽤 많네."
[거미군단의 힘을 보여주기에 괜찮은 상황이라 사료하옵니다.]
[오, 싸움이냐? 나도 꺼내라 소년!]
교복에 붙어 있던 피어의 분신이 말했다. 시몬이 아공간을 열자 피어와 군단의 스켈레톤 부대가 우르르 튀어나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500골드 먹은 값이나 해볼까요?"
[뭐?]
"이 산맥의 오크 부락지들, 싹 다 털어버리고 키젠에 복귀하죠."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피어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놈들의 시체로 군단의 병력을 충원하는 거지!]
[재미있겠네요.]
수련도 하고, 병력도 충원하고, 네크로맨서는 이런 게 좋았다.
-쿠르르륵!
동료를 잃은 오크들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피어와 에르제베트가 각자 전투 자세를 취했고, 스켈레톤들과 송장거미들도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명령을 기다렸다.
"자, 가죠."
시몬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디어 처음으로, 군단의 힘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갖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