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8화
초급 흑마법, 사령학, 심지어는 첫 수업인 혈류학까지.
키젠의 교수들은 결투평가를 잔뜩 신경 쓴 듯한 수업 커리큘럼을 내놓았다.
물론 오늘의 마지막 수업인 저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는 수업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학생들의 눈을 봅니다."
언제나처럼 세련된 순백 수트 차림의 바힐이 펠트제 중절모를 교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오늘은 고뇌가 가득하군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은 눈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볼까요? 아아, 결투평가군요.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온통 결투평가밖에 없습니다!"
바힐의 넉살에 곳곳에서 자잘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도 키젠을 졸업했으니 잘 압니다. 같은 키젠 학생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하고 초조하겠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힐이 특유의 신뢰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딱 이번 수업만으로 상대방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제압하는 방법을 전수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됩니다."
학생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도 그럴 게 바힐이라는 이름은, 열일곱 살 소년, 소녀들에겐 함부로 우러러볼 수도 없는 드높은 후광 같은 게 있었다.
"지금쯤이면 여러분의 흑마법 스타일이 어느 정도 정립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수업은 두 파트로 나누죠."
바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인이 이번 결투평가에서 사용할 흑마법을 명확히 정한 학생들은, 보조에 특화된 저주가 필요하겠죠. 빠르고 부담 없이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스피디한 '레그다운'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교과서에는 없는 마법이었다.
"인간은 뒷다리만으로 몸을 일으키고,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걷는, 아주 불안정한 균형감을 가진 생물입니다. 단지 넘어지는 것으로 대부분의 행동이 불가능하게 되죠. 레그다운은 상대방의 발을 포함한 국소부위에만 탈진을 걸어서 이동에 제약을 줍니다. 강하게 걸리거나 상대가 무리하게 움직이면 그대로 넘어지는 거죠. 물론 이그저스트보다 빠르고 가볍다는 게 장점입니다."
바힐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지금 교과서를 뒤적거리고 있는 학생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직접 개량한 저주니까요."
오오오-
학생들이 탄성을 흘렸다.
"다음은 저주학 지망생들이나 결투평가에서 저주를 메인으로 사용할 학생들, 그리고 어떤 흑마법을 사용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학생들입니다. 이 학생들에겐 개량된 패럴라이즈 저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리메이크 패럴라이즈! 이번에도 교과서에 없는 마법이었다.
"패럴라이즈보다 효과는 떨어지지만, 실전 개량을 통해 더 빠르게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1학년들이 쓸 수 있는 기본적인 룬어와 수식 조합으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어레인지했죠. 전투 중에 스택을 쌓으면 오리지널 마법의 효과를 재현할 수 있을 겁니다."
학생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가볍지만 효과적인 레그다운이냐, 무겁지만 상대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리메이크 패럴라이즈냐.
"자, 그럼 갈라지겠습니다."
바힐이 손뼉을 짝 쳤다.
"왼쪽으로 온 학생들은 레그다운을, 오른쪽으로 온 학생들은 리메이크 패럴라이즈를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좌우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바힐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에만 꽂혀 있었다.
'......자, 시몬 폴렌티아.'
그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당신 같은 천재는 본인에게 딱 맞는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저주야말로 당신의 칠흑을 200% 살리는 최선의 길이죠! 낡고 해묵은 소환학 따위는 집어치우십시오. 결투평가에서 소환학을 주력으로 쓰는 건 바보도 하지 않을 짓이란 말입니다!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바힐은 평소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딕과 메이린, 카미바레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시몬이 이내 방향을 틀었다.
'어느 쪽입니까! 당연히 오른쪽으로......!'
시몬은 메이린과 함께 왼쪽으로 들어왔다. 딕과 카미바레즈는 오른쪽이었다.
시몬의 선택을 본 바힐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이번에도 저주를 '메인'이 아닌 '서브'로 택했다.
"바힐 교수님."
그때 분노한 바힐의 어깨를 짚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가 광기에 젖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회색 눈의 조교가 입술에 검지를 올리고 있었다.
"그 표정, 그 표정 나와요."
"......."
바힐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으며 이내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만면을 덮었다.
"이런, 조금 흥분했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체헤클."
"괜찮습니다. 이게 제 역할이니까요. 그보다 지시를."
바힐이 넥타이를 고쳐맸다.
조교들이 레그다운의 수식 설계본을 뒤적거리며 교육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교들 다 오른쪽으로 보내요. 내가 직접 레그다운을 가르치겠습니다."
"......예? 하지만 저번 주에는 교수님께서 리메이크 패럴라이즈를 가르치신다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곤란하다.
조교진은 밤새워 자료들을 준비해 가며 레그다운을 가르칠 준비를 해 온 상태였다.
체헤클은 설득할까 생각했지만, 바힐의 얼굴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마음을 바꿀 생각은 죽어도 없군.'
조교는 교수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체헤클은 수업 준비 중인 조교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은 마나 투사기를 세팅하고 학생들에게 자료들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잠깐만, 조교들 집합."
갑작스러운 집합 명령에 조교들이 의아해하며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죠? 두 시간짜리 수업이라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하는데."
"교수님께서 생각이 바뀌셨어. 직접 레그다운을 가르치시겠대."
"네에에?"
바힐의 조교들이 당황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에이, 말도 안 됩니다 누님! 계속 레그다운 준비만 했는데 당일에 이렇게 바꿔 버리면......!"
"아, 진짜 이건 아니에요! 선배가 설득 좀 해주세요!"
체헤클이 팔짱을 꼈다.
"우리가 설득한다고 들을 분 아닌 거, 다들 알잖아?"
"......."
"교수님 변덕이 어디 한두 번이니? 질질 짜는 소리 그만하고 다들 준비해. 패럴라이즈 수업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조교들이 축 처진 어깨로 자료들을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후배들의 등을 토닥이며 격려하던 체헤클은, 시선을 움직여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소년을 보았다.
'교수님이 저러시는 게...... 아마도 저 아이 때문이겠지?'
너나 나나 앞으로 피곤하겠구나 생각하며, 체헤클은 등을 돌렸다.
* * *
그렇게 저주학까지. 오늘 하루 모든 수업이 끝났다.
딕은 로체스트에 내려갔고, 메이린과 카미바레즈는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그리고 시몬은 홀로 인적 없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었다.
[무슨 상념에 그렇게 빠져 있느냐? 소년.]
멍하니 있으려니 피어가 말을 걸어왔다. 시몬은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피어, 군단장은 꼭 소환학을 전공해야 하나요?"
피어가 킬킬 웃었다.
[꼭 그러란 법은 없다! 만약 네가 마투학을 선택한다면 내가 직접 군단을 운영하면 된다! 군단이 보조로 내려가고 네 본연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도 순전히 너의 선택! 군단은 그 의지를 존중할 것이다.]
"......."
시몬이 잠시 아무 말도 없자, 피어가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내가 말려줄 거라고 기대했나?]
시몬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봐라. 무엇이 널 그렇게 흔들고 있지?]
"아뇨, 그냥......."
시몬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다들 그러잖아요. 소환학은 약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 다른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은 물론, 심지어 소환학을 가르치는 아론 교수님조차도."
[그래서.]
피어가 말했다.
[소환학을 그만둘 거냐?]
"......."
소환학을 그만둔다.
시몬은 마음속에 강한 반발심리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지금 그 마음이 진심이겠지.]
피어가 킬킬 웃었다.
[내 생각엔 소년, 너는 소환학을 좋아한다! 원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좋아하고 성취를 느끼는 성격이긴 하나, 네가 소환학에 느끼는 감정은 남다르다. 굳이 소환학을 계속할 이유를 군단에서 찾을 필요가 있나?]
"......."
시몬은 한마디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네가 고민하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겠지.]
"네?"
[소년. 너의 사상과 가치관은 확립되어 있다. 고작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에 이제 와서 소환학을 포기하지 말지 고민하는 건 네놈답지 않아! 그보다 더 아래. 그보다 좀 더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
피어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이번 결투평가를, 소환학만으로 이겨보고 싶은 심리 아닌가?]
"......!"
시몬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피어의 분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픽 웃었다.
"와, 진짜 피어는 못 속이겠네요."
[크흐흐!]
"바보 같죠? 저도 언제쯤 철이 들지 모르겠어요. 굳이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소환학으로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드는 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냥, 열 받잖아요."
시몬이 말했다.
"소환학은 약하다.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학문의 보조가 필요하다. 소환학만으로는 못 이긴다. 오늘 하루 내내 그런 소리만 들었어요. 조교, 딕, 교수님들, 심지어는 소환학 지망생인 토토조차도."
시몬이 팔짱을 꼈다.
"아직 제 전공과목도 아닌데, 조금 화나더라고요. 소환학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하지만 너는 언제나 효율적인 수단을 골라 취해왔다. 그 두 가지 관념이 충돌하면서 고민했던 거군.]
"네."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래서 고민한 결과는?]
"이번만큼은 로망."
시몬이 씩 웃었다.
"상상해 보세요. 피어."
사람들이, 모두가 다 부정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진짜로 소환학만으로 결투평가에서 이겨 버리면.
"기분 째질 것 같지 않아요?"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지 않을까.
[크하하하하하하! 그래! 바로 그거다!]
피어가 쩌렁쩌렁 큰 소리로 웃어댔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것! 그 행위 자체로도 특별하고 가치 있다! 심지어 너는 그럴 능력이 있고 재능도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명심해라 소년!]
피어의 분신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너는 다름 아닌 내가 선택한 군단장이다! 정어리들이 그어놓은 선을, 상어의 몸으로 망설이지 마라! 뭐든지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라!]
"네, 피어."
시몬의 입가에 비로소 홀가분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확실히 마음을 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