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2화
밤을 꼬박 새운 시몬은 퀭해진 얼굴로 1교시 혈류학 수업에 참여했다.
그런데 상태가 좋지 못했다. 칠판에 적힌 내용을 필기해야 하는데, 칠판의 모습이 세 개쯤으로 갈라져서 보였다.
'어젯밤에 너무 진을 뺐나.'
시몬이 비몽사몽 하자, 옆자리의 메이린이 팔꿈치로 툭툭 쳤다.
"야. 너 왜 그래?"
"......밤을 좀 새웠더니 컨디션이 나쁜가 봐."
메이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책상에 걸려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더니 하얀색 약품통을 꺼냈다.
"야, 입 딱 대."
"그게 뭐야?"
"피로 회복제. 밤샌 날에 내가 먹는 거야. 입 벌려봐."
시몬이 엉거주춤 입을 벌리자 그녀가 손끝으로 약 한 알을 집어서 안으로 휙 던져넣었다.
"깨물지 말고 그대로 있어. 그거 진짜 독해서 터지면 교실에 냄새 다나."
메이린이 이번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넘겼다. 시몬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통 뚜껑을 열고 입으로 가져갔다.
꼴깍.
"......?"
시몬이 고개를 돌리자, 메이린이 어쩐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왜 그래?"
"아, 몰라! 조교쌤들 오기 전에 빨리 마시기나 해!"
시몬이 입에서 살짝 물통을 뗀 채 물을 마시고는 알약을 삼켰다.
"고마워, 메이린."
물통을 건네받은 메이린은 괜히 남사스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뒷자리에 있던 딕이 두 사람의 사이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악! 깜짝아!"
"흐흐흐, 난 들었지. 들었지. 다 들었지이~"
딕이 콧노래를 부르며 장난을 장전하자, 메이린이 반사적으로 으르릉거렸다.
"야, 하지 마."
"뭘?"
"뭔진 모르겠지만 하지 말라고오!"
딕이 고개를 쑥 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옆에서 열심히 필기 중인 카미바레즈를 보았다.
"카미."
"네, 말씀하세요. 딕."
"그냥 별건 아니고. 남녀 사이에 '딱 대'랑 '벌려'라는 대화가 오고 갔는데 과연 무슨 상황이라고 생각하......."
카미바레즈의 두 뺨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얼굴이 더 달아오른 메이린이 노트로 딕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야 이 또라이 새끼야!"
"악! 악! 아니, 왜 때려! 나는 그냥 팩트를 말했을 뿐인......!"
"시몬!"
카미바레즈가 달달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그,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우린 아직 미성년자고! 그......!"
시몬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앉아서 약 얻어먹은 죄밖에 없는데 왜 혼나는 거야.
"거기 학생드을~"
갑자기 귓가로 날아든 목소리에, 시몬 일행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조교가 뒷짐을 진 채 미소 짓고 있었다.
"필기는 다 하고 떠드는 건가요~"
어쩐지 어린아이들 대하는 듯한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조, 조교쌤! 그게......."
"그대로 일어나요. 네 사람 다."
결국 네 사람은 교실 뒤로 불려 나왔다.
"두 팔 귀에 딱 붙여요~ 응, 그렇게. 요령 부리면 화낼 거예요?"
뭔가 벌을 주는 것도 귀여운 느낌이었다. 조교가 다른 곳으로 떠나자마자, 메이린이 딕을 찌릿 노려보았다.
"아, 창피해! 너 때문이잖아!"
"아니, 그러니까 나는 팩트를 늘어놓은 잘못밖에......."
"싸우지 마세요! 또 혼나겠어요!"
한편 시몬은 홀로 칠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시야가 또렷하게 돌아왔다. 약효가 나오는지, 아니면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졸음도 가셨다.
"메이린."
"응?"
"네가 준 약, 효과 좋다."
시몬의 칭찬에 그녀가 단번에 미소 지으며 거들먹거렸다.
"흥, 당연하지! 이거 엄청 비싼......."
"약? 무슨 약인데?"
"너는 그냥 좀 닥쳐."
그때 실라지의 또 다른 조교가 헐레벌떡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실라지 교수님이 20분 정도 늦으신다고 합니다! 쉬는 시간을 조금 앞당길게요."
그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30분까지 휴식하겠습니다."
그 말에 조용하던 교실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쉬는 시간이 되며 벌을 서던 시몬 일행도 자연스럽게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잠깐만 조원님들. 나 좀 봐."
딕이 손짓하자 자리로 돌아가려던 세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교실 구석에 조용한 곳에 모였다.
"아, 뭔데 또."
메이린이 툴툴댔다.
"점심시간에 말하려고 했는데, 시간 난 김에 지금 이야기하려고."
"?"
딕이 재킷 안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흐흐, 니들 결투평가 상대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단 말씀이야. 일단 제일 급한 시몬부터."
"나?"
"응. 너 이번 결투평가에서 스켈레톤 아처 준비하고 있었잖아."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당장 그만두는 게 좋아."
"어째서?"
"내 말이 100%는 아니지만, 상대와의 상성이 너무 나빠."
딕이 진지한 목소리로 쪽지를 읽어내려갔다.
"상대의 이름은 하렌 코크. 올드윈 왕국의 악명 높은 네크로맨서 집안. 사용하는 흑마법은 블랙핸드."
"블랙핸드? 처음 들어보네."
반면 메이린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가문의 고유 흑마법인가 보네."
"정답! 간단히 말하면 등에서 칠흑으로 이루어진 손 같은 걸 뽑아내는 건데, 이게 원거리 투사체에 대한 방어 능력이 탁월하대. 고속으로 날아가는 칠흑화살도 가볍게 툭툭 쳐낼 수 있는 정도."
시몬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칠흑화살도 그냥 툭툭 쳐낼 정도라면.
"스켈레톤 아처의 화살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시몬."
"......으으음."
시몬은 침음을 삼켰다.
소환학으로 갈 거라고 결심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악상성인데 스켈레톤 아처로 계속 밀어붙일 정도로 고지식하진 않았다.
시몬이 다른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 사이, 딕은 말을 이어갔다.
"블랙핸드는 공방일체의 강력한 수단이지만, 단점도 명확해. 하렌 코크는 블랙핸드를 유지하는 동안 다른 흑마법은 사용할 수 없어."
"아, 그런 거라면 공략법은 명확하네요!"
카미바레즈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주예요!"
"응. 그러네."
메이린도 동의했다.
"원거리 공격도, 근접공격도 까다롭다면, 그냥 거리를 벌려놓고 저주 스택을 쌓아서 약화시키면 그만이지. 낙승이잖아? 남은 시간 동안 이그저스트만 연습해도 되겠네!"
시몬은 벽에 등을 기대며 고민했다.
스켈레톤 아처를 조립하면서 간만에 제대로 불이 붙었는데, 또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이야.
역시 세상만사 마음먹은 대로만 돌아가는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스켈레톤 아처로 강행할지. 처음의 다짐을 깨고 저주를 연습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
시몬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 * *
하루하루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이제 결투평가는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도 아침 일찍 강의실에 들어온 메이린은 하품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앞자리에서는 먼저 도착한 학생들이 모여서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주제는 당연히 결투평가에 대해서였다.
"으으, 떨려. 마투지망을 어떻게 상대하면 좋지?"
"바힐 교수님의 레그다운 저주가 직방이래!"
"난 맹독학 애들이 제일 무서워. 배리어 게이지 계속 야금야금......."
"하아아, 난 저주학 지망만 안 만나면 되는데."
메이린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코웃음을 쳤다.
상대방이나 상성에 대해 고민할 시간에 개인 훈련이나 하는 게 낫다.
내가 강하고 실력에 자신 있으면 그만 아닌가?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차며 교재를 꺼내고 있을 때였다.
"......안녕, 메이린."
"와앗!"
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초췌한 얼굴에 무척이나 짙은 다크서클의 시몬이 보였다. 그가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메이린, 오늘 스타일 좋네. 머리 새로 한 거야?"
"......."
메이린이 인상을 썼다.
얘는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지?
"누가 그렇게 하라고 알려주든?"
"딕이."
"으이 씨."
시몬이 딕의 말투를 따라 하는 게 무척 소름 끼쳤다. 무엇보다 안 어울린다.
"됐고, 왜 비행기 태워주는 건데? 이유나 빨리 말해."
"......약 좀."
"으휴."
메이린은 투덜거리면서도 가방에서 약통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녀의 약을 받아먹자 조금이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지켜보는 내가 더 불안한 거 알아? 너 요즘 왜 그러는데."
"결투평가 준비."
메이린이 인상을 썼다.
"응. 그래. 열심히 준비하는 건 좋은데, 그러다 너 진짜 쓰러져. 약이 뭐 피로를 없애는 마법 같은 게 아니라고. 나도 어쩌다 가끔씩 먹는단 말이야."
"딱 내일 결투평가까지만 버티면 돼."
"......미친."
잠시 후 수업이 시작됐다.
물론 수업이 시작된 후에도 시몬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수업시간 내내 집중을 못 하고 노트에 이상한 내용을 끄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딕! 대체 쟤 왜 저러는데?"
참지 못한 메이린이 딕에게 물었다. 딕도 시몬 때문에 고민인 듯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도 몰라. 요즘 거의 방에도 안 들어오고, 눈 뜨고 일어나도 자리에 없을 때가 많더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카미바레즈가 딕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저러다 쓰러지겠어요. 뭐라도 해 주세요. 딕!"
"맞아. 니가 룸메이트잖아!"
"내가 안 말렸겠냐?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니 문제지."
딕이 고개를 돌렸다.
쉬는 시간인데도, 시몬은 여전히 미친 사람처럼 노트에 이상한 낙서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어떤 화제에 몰두해 버려서 다른 것들은 눈에 안 들어오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마 결투평가가 끝날 때까진 계속 저럴 듯. 내 생각엔 새로운 흑마법을 준비하는 것 같아."
"새로운 흑마법?"
메이린이 실소를 흘렸다.
"그럴 필요가 뭐 있데? 그냥 이그저스트 좀 연습해서 쓰면 간단히 이기는 상대를."
"......새로운 흑마법도 좋지만, 역시 건강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머리를 짜증스럽게 벅벅 긁던 메이린이 눈을 번뜩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따끔하게 말하고 올게."
딕이 팔로 뒷머리를 받쳤다.
"그만두는 게 좋을걸? 뭔 소릴 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니까."
"지켜보기나 해."
메이린은 한차례 강하게 마음을 먹고는 시몬에게 다가갔다.
"야, 시몬! 너 계속 그러면......!"
시몬이 스윽 고개를 돌렸다.
'......헉!'
완전히 맛탱이가 간 눈깔이 보인다.
갑자기 또래 남자애가 분위기를 깔고 노려보자, 조금 주눅이 든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러면 몸 축난다고 내가 몇 번을......!"
"걱정해 줘서 고마워, 메이린. 정말 내일부터는 푹 쉴게."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노트를 끄적이는 시몬이었다.
'이, 이게 아닌데.'
메이린이 다음엔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메이린이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다.
"딕."
이번엔 딕이 움찔하며 말했다.
"어? 어어."
"내가 부탁한 건......."
"아, 아론 교수님 소식? 점심시간이나 돼야 알 것 같은데."
"응. 고마워."
시몬이 다시 자리에 앉아 노트를 작성했다.
세 사람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모여들었다.
얘는 대체 무슨 흑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 * *
그날 저녁.
아론이 키젠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 수업할 때와 같은 후줄근한 차림이 아니었다. 키젠 본부의 제복을 차려입고 검은 털 망토를 두른 멋들어진 모습이었다.
건물을 청소하던 몇몇 하수인들은 그가 아론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지치는군.'
임무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오늘까지는 휴식일이었지만, 수업 준비 때문에 잠시 연구실에 들르기로 했다.
'갑갑해.'
연구실로 걸으면서 아론은 겉옷을 훌러덩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점점 옷차림이 가벼워졌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옷더미의 양이 쌓여갔다.
그렇게 하나둘 옷을 벗어가며 연구실 문 앞에 도착하니, 누군가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퀭한 눈으로 노트를 훑으며 이상한 말들을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시몬 폴렌티아."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아론을 발견한 그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론 교수님!"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일주일 만에 보는 시몬은 어쩐지 퀭하고 야위어 있었다.
시몬은 정중하게 말했다.
"교수님께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아론은 말없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냐?"
"......아."
"농담이다."
아론이 픽 웃었다.
"학생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도 교수의 본분이지. 들어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