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2화
'으허헝.......'
뼈들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제시카는 잠시 일어나지 못했다.
쪽팔리고 부끄럽다.
상대방의 행동에 잔뜩 약만 올라서 성급해졌다가, 결국 마투로 승부를 걸어서 이렇게 됐다. 아니, 사실 그것도 전부 상대가 유도한 바였으리라.
모든 기술이 다 막혀 버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주먹을 움켜쥐고 불나방처럼 돌진하는 것뿐이었다.
실력으로도.
심리전으로도 완패.
실력 차는 그만큼 컸다.
'......이제 하위 스쿼드로 가는구나. 차라리 잘됐어. 상위는 저런 괴물들이 우글거리겠지.'
그런 자리 합리화를 하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그때, 시몬이 다가왔다.
"괜찮아?"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
제시카는 멍한 표정으로 시몬이 내민 손과 미소 짓는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여러 감정이 확 올라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이......."
"?"
"이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놈아아아아!"
제시카가 울먹이며 빽 소리 질렀다. 시몬이 움찔 놀라며 고개를 뒤로 뺐다.
"세상에 너만 잘났지? 어? 뻔하게 사람 무시하고! 경기에서 이기고! 마지막에 착한 척까지 니가 다 하려고? 이 나쁜 놈아!"
"아, 아니. 나는 그저......."
"네가 더 나빠! 으아앙!"
그녀는 엉엉 울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시몬은 잠시 넋을 놓은 채 도망치는 제시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학생."
그때 심판이 다가왔다.
"다음 경기를 치러야 하니 이만 물러나 주시죠."
"아, 넵."
무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시몬은 심판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어, 아깐 제가 좀 심했나요?"
심판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키젠답던데요? 간만에 시원한 경기 잘 봤습니다! 하하."
키젠답다는 말이 이렇게 찝찝한 적은 처음이었다.
시몬이 돌아가려는데, 바닥을 닦고 있던 여자 관리원이 조그맣게 말했다.
"사실 좀 심하긴 했죠."
"......하하."
시몬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너무 내 상황에만 몰입하다 보니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내일 개인적으로 사과하러 가야겠다.'
* * *
이제 남은 건 중간고사뿐이다.
특히 주말은 지옥이었다. 딕의 정보를 듣고 새벽 4시부터 도서관 줄을 서러 갔는데 벌써 줄을 선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두 시간을 더 기다려서 도서관 문이 열리고, 엄청난 병목현상이 펼쳐졌다. 어떤 학생들은 칠흑을 밟고 날아오르거나 벽을 타고 달렸고, 몇몇 사령학 지망생들은 혼령화 기술로 벽을 통과하기도 했다.
자리는 20분 만에 다 차버렸고 시몬도 간신히 늦기 전에 구석 좌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부. 공부. 공부.
시험기간 동안 도서관은 24시간 내내 열려 있었다. 다른 생각할 것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내내 도서관에 박혀 있다 보니 주말은 번개같이 지나갔고, 바로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8개 과목 시험이고, 하루에 두 과목씩 시험 친다. 그리고 한 과목당 두 시간 시험을 치러야 했다.
"8번에 2번!"
"2번! 꺄아아! 맞았다!"
"야, 이거 4번 아냐? 여기서 저항이 생겨서 마나 흐름을 막는 거잖아."
"바보야! 이거 직수식인데 저항이 왜 생기냐?"
"악! 아, 직수식인 거 못 봤다!"
시험 하나가 끝나면, 학생들은 메이린을 비롯한 공부 잘하는 학생 주위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시몬도 자신도 모르게 귀가 갔지만 가채점할 여유 따위 없었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공부해야 한다. 공부만이 살길이다.
모두가 시험 기간을 지옥이라고 말했지만, 시몬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누구를 해코지하거나 방해하는 것 없이, 오로지 나 자신의 성장만을 보고 올라가는 것.
시몬은 이런 선의의 경쟁 분위기가 좋았다.
그렇게.
"해- 방- 이- 다아아아!"
마지막 일에 예정되어 있던 신성 방어학과 마투학 시험까지 끝났다.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는 순간 학생들은 하나같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딕은 깃펜을 입에 물고 책상 위에 올라가 셔츠를 위로 끌어올려 배를 보이는 세레머니를 했다가 여지없이 메이린에게 얻어맞았다.
모두가 해방의 기쁨으로 몸부림치는 중이었지만, 시몬은 조용히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여운을 즐겼다.
'......진짜 최선을 다하긴 했다.'
"야, 야. 시몬."
메이린이 뒷짐을 진 채 다가왔다.
"소환학은 잘 쳤어? 키젠에서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장난스럽게 묻자, 시몬은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한 달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
"응?"
"내가 내뱉은 소리가 얼마나 경솔했는지 알게 돼서."
85점을 맞은 메이린의 소환학 성적을 뛰어넘는다.
단순히 10점 정도면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10점은 말도 안 되게 큰 차이였다.
'......시몬.'
카미바레즈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시몬을 보았다.
만약 메이린이 이겨서 시몬에게 퇴학을 강요한다면, 자신이 메이린에게 비는 한이 있더라도 파국을 막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황한 건 메이린도 마찬가지였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화제였는데 왜 이렇게 무겁게 받아치는 거지?
"너 설마...... 소환학을 망친 거야?"
"아니."
시몬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결론은 내가 이길 거란 소리야."
"아- 뭐야!"
메이린이 빵 웃음을 터뜨렸고, 다시 분위기가 밝아졌다.
주말에 어디에 놀러 갈지, 뭘 먹을 건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딕이 슥 고개를 내밀었다.
"다들 놀러 갈 생각하는 중에 미안한데, 중요한 이슈가 있어. 말해줄까?"
"뭔데?"
딕이 주위를 슥슥 둘러보며 혹시나 누가 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주말 끝나고, 다음 주에 1학년 전체가 섬에 들어갈지도 몰라. 아일랜드 서바이벌."
그 말에 메이린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고, 시몬과 카미바레즈는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예요?"
딕이 으스스한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휘적거렸다.
"1학년 전체를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섬에 떨궈놓고, 4일 동안 살아남는 프로젝트야. 섬 생존평가라고도 해."
"......사, 사 일이나요?"
기겁한 카미바레즈가 어깨를 슥슥 쓸었다.
"섬에 들어가면 음식이나 주거는 전부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고, 몬스터를 잡고 포인트를 따내야 해. 심지어 같은 학생들끼리 붙어서 포인트를 갈취할 수도 있어. 당연히 키젠답게 최하위 학생들은 퇴학처리."
"아......."
카미바레즈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반면, 시몬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었다.
"넌 또 왜 그래?"
"아니, 그."
시몬은 올라가는 입꼬릴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엄청 재밌겠는데?"
"......진심이냐?"
"응. 무인도에서 야영에, 사냥에,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내는 서바이벌이라니! 와, 나 그런 거 진짜 좋아해."
시몬은 레스힐의 험난한 산맥에서 그런 종류의 경험을 많이 해봤었다.
반면 딕과 카미베레즈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딕. 그 정보 확실한 거야?"
메이린이 끼어들었다.
"네가 어떻게 키젠의 일정까지 알고 있는 건데?"
"아니, 아니."
딕이 손을 휘저었다.
"당연히 100%는 아니지. 아직은 추측단계야."
"뭘 보고?"
"일단 지금 하수인들이 비밀리에 창고에서 '텅패드'들을 꺼내고 있대."
텅패드는 아일랜드 서바이벌 같은 대형 수행평가를 치를 때 학생들이 팔에 차게 되는 장치였다. 이걸로 포인트 등의 수치를 체크할 수 있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 키젠 본부의 텔레포트 팀이 전부 학교로 넘어와서 대규모 작업을 하고 있고, 마법진 재료들을 대거 로체스트에서 들여왔대. 어떤 교수들은 다음 주에 휴가 예약까지 잡았다는데? 다음 주에 뻔히 수업이 있는데 갑자기 웬 휴가? 답 나오지 않냐?"
그럴듯한 정보의 퀄리티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딕이 팔짱을 끼며 거들먹거렸다.
"후후, 이 각박한 세상에서 먹고살려면 이 정도 정보력은 기본이지!"
"대단해요! 딕! 어떻게 그렇게 키젠의 모든 일을 잘하는 거예요?"
카미바레즈가 감탄한 얼굴로 바라보자 콧대가 높아진 딕이 말했다.
"핵심 정보 루트는 기밀이라 말하기 좀 그렇지만. 뭐, 일단 나는 키젠의 모든 하수인들이랑 다 친해지려 노력하거든? 처음엔 날 부담스러워해도 계속 형님 누나 하면서 따라다니고, 가끔 용돈도 드리거나 식사도 대접하고. 키젠 학생으로서 이런저런 때에 이름도 빌려주기도 하고."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딕이랑 같이 다니다 보면, 대부분의 하수인들이 키젠 학생인 그에게 말을 놓거나 엄청 편하게 대하긴 했다.
"사실 다른 귀족 출신 애들은 하수인을 하인이나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지, 별 관심 없어 하잖아? 사실 하수인들이야말로 정보의 원천이야."
"네, 네. 너 잘나셨고요."
메이린이 고개를 돌리며 콧방귀를 꼈다.
이번엔 시몬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수행평가가 사실이라면 우린 뭔 준비해야 할까?"
"음, 글쎄. 평소 결투평가 준비하는 것처럼 전력업을 하면 되지 않을까. 아, 그리고."
딕이 무릎을 탁 쳤다.
"서바이벌 스킬!"
"응?"
"막 그런 거 있잖아. 집짓기, 불피우기, 사냥감 해체하기. 먹을 수 있는 약초 구분하기."
두 소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그러네. 몬스터를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네."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메이린이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카미바레즈도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냥 며칠 굶으면 안 될까요?"
"그게 말처럼 쉬울까? 그리고 굶기만 하면 힘이 안 나서 몬스터나 다른 애들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할걸.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먹어야 해."
상황파악이 끝난 두 사람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반면.
"......아, 진짜 재밌겠다."
시몬은 만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세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되겠어."
메이린이 말했다.
"당장 주말에 몬스터 고기 먹으러 로체스트에 내려갈 거야."
딕이 피식 웃었다.
"시중에 파는 그거 먹는다고 뭐가 바뀌냐? 쉐프들이 조리한 요리랑 현장에서 먹는 건 천지 차이야."
"아, 몰라! 입맛은 좀 바뀌겠지!"
"그러고 보니."
시몬이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졌다.
"예전에 홍펭 교수님 오두막집에서 먹은 그 고기수프 있잖아?"
"아! 그거! 그거 너무 맛있었어요!"
"나도 가끔 생각나던데."
시몬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거 사실 몬스터 고기로 만든 거라고 하시더라고."
세 사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야!!"
갑자기 메이린이 달려들어 시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홍펭 교수님께 연락해 봐! 제발! 비법 좀 가르쳐 달라고! 교수님이 넌 특히 예뻐하시잖아!"
그녀가 애원하는 표정으로 시몬을 짤짤짤 흔들었다.
시몬이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는데, 편지는 보내볼게."
"지, 진짜지?"
"제발 부탁해요 시몬!"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정말로 홍펭의 답장이 도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