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4화
-미안하구나. 메이린.
-이 정도로 수준 차가 나버리는 거야?
-아가씨는 더 이상 후계자가 아닙니다.
'.......'
기분 좋은 꿈은 아니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의 단편을 읽어내려가던 메이린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울퉁불퉁한 동굴 천장이 보였다. 귓가에는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맴돌았다.
조금 추웠지만 아득한 기분. 그녀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
낯선 옷이 입혀져 있었다. 품이 조금 큰 로브였는데 팔을 다 뻗어도 손가락 끝만 살짝 보였다.
다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곳은 동굴이었고,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굴 입구 쪽에 보이는 모닥불 앞에는, 마른 듯하면서도 탄탄한 체구의 남자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앉아 있었다.
마침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빙긋 웃었다.
"일어났어?"
"시, 시몬?!"
애는 또 왜 헐벗고 있는 건데!
기겁한 메이린이 얼른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이번엔 자신의 차림이 보였다.
"뭐, 뭐, 뭐, 뭐야아아아!"
겉에 걸치고 있는 로브 안에는 축축한 속옷 차림이었다. 얼굴이 확 붉어진 그녀가 반사적으로 가슴께를 가리며 다리를 모았다.
잔뜩 방어적이고 웅크린 자세를 취한 그녀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 옷은?!"
시몬이 멋쩍게 웃으며 손끝으로 가리켰다. 동굴 출구 근처에 빨랫줄처럼 이어놓은 식물 넝쿨에 축축한 남자 교복과 여자 교복이 동시에 말라가고 있었다.
"......미안."
시몬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젖은 옷 그대로 입고 있으면 감기도 걸리고, 그래서......."
"......!!!"
견딜 수 있는 부끄러움의 한계에 도달한 메이린의 얼굴이 귓불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급기야 눈에는 살짝 눈물까지 고였다.
"이, 이, 이 미친 변태 새끼야아아아아악!"
"메, 메이린! 조금만 조용히......!"
그녀는 주위에 있는 뭐라도 집어던지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시몬이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맹세할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젖은 교복 벗길 때도 눈 감고 했어!"
"하아, 후우. 하아."
그녀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몬은 잠자코 조용히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10분 정도가 지났다. 마침내 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된 그녀가 얼굴을 덮은 손바닥을 치웠다. 물론 얼굴은 여전히 시뻘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몬은 기다렸다는 듯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리끼리 싸우던 도중에 어떤 고등급 몬스터가 끼어들었고, 그 충격에 휘말린 메이린이 정신을 잃었다. 거기에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서 절벽 아래의 동굴을 찾아 그쪽으로 피난했다는 이야기였다.
'상황은 다 맞아떨어져. 의심할 여지도 없고.'
시몬이 이상한 짓을 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도 세상에 남자애한테 옷이 벗겨지다니......!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잔뜩 웅크린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시몬을 노려보았다.
시몬은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옆머리를 긁는 척했다.
"......시몬."
"응."
"뒤, 뒤돌아."
메이린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를 돌라고? 갑자기 왜?"
"아! 옷 갈아입을 거니까 뒤 돌라고 멍충아아!"
화들짝 놀란 시몬이 급히 등을 돌려 모닥불을 뚫듯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 같아선 잠시 동굴 밖에 보내고 싶었지만, 밖에 비도 오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뒤돌아보면 진짜 진짜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나름 겁을 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달달 떨리고 있으니 전혀 위협성이 없었다.
비에 젖어 아르르 거리며 위협하는 작은 강아지 같은 느낌.
시몬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알았어, 편하게 해."
"......."
어깨를 잔뜩 움츠린 그녀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시몬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아공간에서 마른 수건과 새 속옷을 꺼냈다.
시몬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겉에 두르고 있는 로브를 붙잡았다.
한편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메이린이 아니라 시몬이었다.
'가,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이.......'
정상적인 시몬의 가치관과는 달리, 신체 건장한 17세 소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눈은 모닥불로 향해 있었지만 온 감각은 어쩔 도리 없이 청력에 집중되고 있다.
마치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든 들으려는 것처럼.
그때 섬유가 스르륵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겉에 입고 있던 로브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사락. 사락.
이어서 젖은 속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코끝이 찡해졌다. 이상하게 침이 자꾸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찰팍.
마침내 젖은 속옷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에 젖어서 그런지 무게감이 있었다.
진짜로 다 벗었다.
이제 뒤를 돌아보기만 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메이린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시몬의 심장은 고장 난 것처럼 쿵쾅댔다.
'차, 차라리 밖에 나가 있고 싶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버리고만 시몬은 지독한 배덕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메이린은 내 친구다. 친구에게 파렴치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시몬은 필사적으로 장작의 위치를 옮기며 딴짓에 집중했다.
사락.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은 메이린이 마침내 깨끗한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시몬의 로브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 다음, 단추까지 꼭 잠그고 난 뒤에야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가 뻣뻣하게 굳은 시몬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흡."
그러곤 모닥불을 쐬고 있는 시몬의 바로 옆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시몬은 힐끔 시선을 돌렸다가 로브 너머로 드러나는 그녀의 하얀 다리를 보고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뭔데."
메이린이 쿡쿡 웃으며 시몬의 팔뚝을 찔렀다.
"왜 니가 나보다 더 긴장해? 이 쑥맥아."
"......긴장 안 했어."
픽 하고 웃음을 흘린 그녀가 다리를 가슴까지 당기고 두 팔로 끌어안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차분한 정적이 흘렸다.
"배고프지?"
시몬이 몸을 일으켰다.
모닥불 위에 끓고 있는 냄비를 국자로 휘휘 젓더니 이내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작은 식기에 담아 메이린에게 내밀었다.
"고기 수프야."
홍펭의 레시피대로 만든 수프였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 섬에서 이렇게 음식다운 음식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땡큐."
식기를 받아든 그녀가 조그맣게 말했다.
안 그래도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스푼을 들고 조심스럽게 한 입 떠먹어보았다.
'와아!'
진짜 저번에 홍펭의 오두막에서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바로 두 입, 세 입까지 이어졌다. 시몬은 그녀가 먹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시몬."
"응."
어느새 텅 비운 식기를 내려놓은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고마워. 구해줘서."
"별말씀을."
그녀가 무릎 위에 얼굴을 올리며 시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구한 거야? 솔직히 버려도 싸잖아. 내가 먼저 공격했는데."
시몬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너도 진심으로 날 아웃시킬 생각은 없었잖아."
"......."
"그런 느낌이야. 별것도 아닌 트러블 때문에 1학기 내내 함께할 조원을 버릴 수는 없지."
시몬이 씩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안 그러냐?"
그녀가 민망한 듯 웃으며 주먹을 내밀어 부딪혔다.
"으으- 역시 안 되겠어!"
"뭐 불편한 거라도 있어?"
그녀는 대답 대신 텅패드를 찬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칠흑으로 마법진을 펼치고 명령어를 입력해서 텅패드에 덧씌웠다.
'잠깐, 저 명령어는.......'
시몬도 텅패드의 명령어는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메이린의 텅패드가 입처럼 쩍 벌어지더니 혓바닥이 수 미터 넘게 솟아올랐다.
그녀는 혀가 감싸고 있던 녹색 구체를 꺼냈다. 무척 큰 크기의 포인트 덩어리였다.
"메이린! 너 무슨......!"
"뭐긴 뭐야. 내가 찔려서 안 되겠어. 구해준 값은 받아!"
받으라느니 못 받겠다느니. 두 사람이 뒤엉켜 옥신각신했다.
메이린이 강제로 시몬의 텅패드에 구체를 가져다 댔다. 시몬의 텅패드는 좋다고 훌쩍 받아먹었다.
"아......!"
텅패드의 수치가 크게 올라갔다. 수치를 해석해 보면 127포인트 정도에서 260포인트가 되었다.
시몬이 펄쩍 뛰었다.
"대체 얼마나 준 거야?"
"1포인트 남겨놓고 전부."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니? 원래는 나 거기서 아웃돼야 했었어."
"하지만 너......."
시몬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평가도 1등을 노리는 거 아냐?"
"......."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던 그녀가 씩 웃어 보였다.
"흥, 당연하지! 아직 이틀이나 남았잖아? 네임드들만 골라서 사냥하면 충분히 1등 노릴 수 있어."
"......하하."
자연스레 분위기가 풀어졌다. 두 사람은 냄비의 고기 수프를 사이좋게 싹싹 긁어먹었다.
동굴 밖은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모닥불을 지나가면 바로 까마득한 절벽. 그래도 한눈에 섬을 다 내려볼 수 있어서 경치 하난 좋았다.
'따뜻해.'
메이린은 생각할수록 시몬이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도 되고 배도 부르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몸을 타고 흘렀다.
"메이린."
그때 시몬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변태 같은 질문이면 죽일 거야."
"아니, 그런 거 말고."
시몬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왜 그렇게 1등에 집착해?"
"......."
말없이 동굴 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반드시 꺾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아마."
시몬이 말을 받았다.
"특례 2번 입학생, 세르네 아인다르크겠지?"
"......."
세르네에 대한 메이린의 반응은 무척이나 민감했다.
그녀와 처음 조원이 된 날, 세르네라는 이름만 꺼냈을 뿐인데 분위기가 살벌해진 기억이 난다.
그리고 헥토르가 그녀에게 '세르네의 꼬봉'이라고 했을 때, 그녀는 진심으로 헥토르를 불태울 생각으로 덤벼들기도 했다.
"맞아."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다리를 꼭 감싸고 있던 두 팔을 풀어서, 바닥을 짚고 편하게 등을 제쳤다.
"이건 키젠의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긴데, 사실 상아탑의 정식 후계자는 나였어."
세르네가 아니라 메이린이었다고?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었나 봐. 그래서 좀, 상아탑 가문 사람들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기세등등하게 지냈던 기억도 있어. 그때는 정식 후계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건지도 몰랐고, 그냥 어른들이 굽신굽신 고개를 숙이는 게 재밌었어. 철이 없었지."
그런데. 하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상아탑주님이 새로운 양녀를 들였어."
시몬은 빠르게 맥락을 읽고 말했다.
"그 양녀가 세르네구나."
"응. 나이도 동갑이고 누가 봐도 내 대척점으로 데려온 아이였지. 탑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히 좋지 않았어. 이제 와서 무슨 양녀라느니, 뻔한 수작이라느니. 서녀도 아니고 그 어떤 정통성도 없는 양녀인 이상 내 후계자 자리는 굳건해 보였어. 하지만......."
그녀의 말끝에 긴장감이 실렸다.
"세르네는 천재였어. 아니, 천재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의 괴물."
"......."
"내가 반년 가까이 걸린 칠흑 형태변화를 걘 일주일 만에 끝냈어. 아무리 난해한 논리도 쑥쑥 이해하고,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깨우쳤대. 상아탑도 혈통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세르네의 재능 앞에서는 그 어떤 문제도 무의미할 정도였어. 어느새 파벌이니 가문이니 하는 걸 떠나서, 상아탑 전체가 기대감에 젖게 된 거야. 언젠가 세르네가 성장해서 상아탑주가 되는 순간, 상아탑은 다시 한번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녀가 쓰게 웃었다.
"뒷전이 됐지. 어른들은 나와 세르네를 끊임없이 비교했어. 나는 언제나 세르네를 빛내는 바보 역할이었고, 공적인 자리에서도 불려 나와 망신만 당했지. 그렇게 내가 철이 들고 정신을 차릴 즈음에는......."
메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나가리 됐지 뭐. 원로들은 탑의 법률까지 개정해서 기어이 세르네를 정식 후계자로 만들었어. 그날 이후로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완전히 바뀌었지. 가문의 어르신들부터, 하인들, 친구들, 심지어는 부모님까지. 모두가 나에 대한 기대를 접었어."
"......."
"그러다 우리는 열일곱 살이 됐고, 키젠과 맺은 맹약 때문에 세르네가 키젠에 특례로 공부하러 가게 됐어. 그래서 나도 내 힘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키젠에 들어온 거야."
시몬은 이제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1등에 집착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미친 듯이 노력하는 거였다.
세르네를 뛰어넘기 위해. 다시 가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실 메이린이 자신을 공격한 것도 조금은 이유가 부족하단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납득했다.
시몬은 특례 1번 입학생이다. 그녀가 목표로 하는 세르네를 2번으로 밀어낸 1번.
물론 최근에 흑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시몬과 세르네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격차가 있었다. 1번과 2번의 차이 또한 '실력의 차이'로 정해진 게 아니다.
그래도 메이린은 호승심에 불탔을 것이다. 시몬을 이기면, 그 아래의 세르네와의 거리도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하고.
"난 죽어도 포기 안 해."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다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언젠가 내가 빼앗긴 것들을 돌려받을 거야. 반드시."
시몬이 씩 미소 지었다.
"너라면 가능할 거야. 응원할게, 메이린."
"흥."
그녀가 콧방귀를 꼈지만 내심 기분은 좋은 듯 입가에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참, 그리고 이번 섬 생존평가는 1학년 961명 다 들어온 거 알지?"
"응."
"세르네도 이 섬에 있어. 걜 만나게 되면 무조건 피해. 몇 년간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말하는 건데, 볼수록 드는 생각이지만 걔는 진짜......."
메이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