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6화
재미.
시몬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을 저렇게 가지고 노는 게 정말로 재미있는 걸까. 아니면 날 흔들기 위해서일까.
"왜 날 여기까지 부른 거지? 세르네 아인다르크."
그 말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소녀가 사뿐히 내려왔다. 마치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사람처럼 떨어지는 움직임조차 느렸다.
백금발의 머리카락, 이상적으로 자리잡힌 이목구비, 그리고 로레인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특유의 아우라. 군주의 기세.
그녀는 여전했다. 텔레포트 마법진에서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인간이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나긋나긋한 목소리. 시몬은 이렇게 듣기 좋은 미성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가 즐거워하는 것과는 달리 뇌는 미친 듯이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피부에는 오소소 닭살이 돋아났다.
"본론을 말해."
시몬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보는 건 세 번째네요~ 세 번 마주치면 운명이라는데."
"......."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시네요? 뭐, 좋아요."
처음 만났을 때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때는 교양 넘치고 예의 바른 부잣집 아가씨 같았다면, 지금은 교활한 소악마 같은 느낌. 시몬은 이쪽이 그녀의 실체와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뒷짐을 진 채 빙글 등을 돌렸다.
"시몬 폴렌티아, 아니, 이렇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그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일곱 번째 군단장."
"......!!"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피어는 잘 있나요? 에르제베트는 같이 안 온 모양이네요. 아니면 이 섬의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있으려나?"
"......."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되는 시몬의 중요한 비밀들이 그녀의 입술에서 낱낱이 까발려지고 있다.
"너......!"
"아- 걱정 마세요. 여기는 제가 만든 결계 안이라서 옵저버가 훔쳐보거나 엿들을 여지가 없으니까요."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아는 거지?"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상대로는 발뺌은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서두르지 말라는 듯 부드러운 눈웃음을 흘렸다.
"바로 인정하는 태도가 좋으니 말씀드리죠. 우리가 두 번째로 만난 장소. 어딘지 기억해요?"
"임무로 출발하기 전, 텔레포트 마법진 위였지."
"그때 칼로스 왕국으로 가는 1학년은 당신이랑 저. 둘뿐이었죠."
그녀가 가볍게 두 손바닥을 마주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부터 나를 감시했군."
"네, 사실은 그보다 더 이전."
그녀가 눈을 감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톡톡 두들기는 시늉을 했다.
"키젠의 1급 기밀. 상아탑에서는 네프티스가 봉인한 유적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어요. 제가 직접 유적이 열릴 때 발동하는 알람마법을 설치하고 갔는데, 며칠 후 알람이 들리는 거예요. 서둘러 가봤더니 세상에."
그녀가 미소 지었다.
"당신이 군단장이 됐더라고요."
"......."
그때부터였구나.
시몬의 머리가 숨 가쁘게 돌아갔다.
"그럼, 에르제베트에 대해선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것도 뻔하지 않아요? 텔레포트로 같이 넘어갔을 때, 저도 당신을 감시하러 아르니쉬에 들렸거든요. 아르니쉬의 영주님, 경비대장, 병사들, 도둑길드원, 무희들의 기억을 읽어냈죠. 그리고."
그녀가 입꼬리를 열었다.
"당신이 풀어준 엘렌 자일까지. 이거 꽤 위험한 범죄인 거 알아요? 프리스트를 일부러 살려주다니."
목을 죄어오듯 서서히 압박이 들어온다. 시몬이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당시 엘렌은 아무런 소속도 없는 개인이었어. 지금은 휴전 중이고. 선량한 신성연방의 주민을 굳이 살해해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것보단, 포로 조약에 의거해서 대승적으로 해방한 조치였지. 심각한 범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 말은 청산유수네요. 하긴, 당신에겐 이런 사소한 문제를 들먹일 필요가 없겠죠?"
그녀가 웃었다.
"당신은 1급 반역죄를 저지른 범죄자니까."
"......."
"암흑연합에 반기를 든 피어의 군단과 계약하는 순간, 당신도 같이 반역죄를 뒤집어쓴다는 건 알고 있었나요? 당장 시험이 중단되고, 전 대륙에 퍼져 있는 키젠의 까마귀들이 이 섬에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는 중대한 사안이랍니다."
시몬이 천천히 이마를 짚었다.
"......어이가 없네."
"더 변명하실 건가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 키젠에 알리고 재판에 회부하든가. 왜 굳이 당사자인 내게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지?"
"이제 본론을 꺼낼 분위기가 된 것 같네요."
그녀가 생긋 눈웃음쳤다.
"상아탑에 들어오세요, 시몬."
"......."
여기서 갑자기 상아탑의 영입 제의라.
시몬은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끌어내자.
"내 영입을 원하는 거면 졸업한 뒤에 정식으로 영입전에 뛰어들든가. 상아탑의 재력과 권력이라면 영입전에서 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저는 키젠에서 나오는 키젠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지?"
그녀가 싱긋 웃었다.
"궁금하지 않아요? 키젠은 기껏해야 학교일 뿐인데. 어째서 일개 학교조직 따위가 대륙의 절반을 통치하고 있는 건지."
"......."
당연히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은 있었다.
"가까운 드레스덴 왕국을 예를 들죠."
그녀가 손가락을 펼쳤다.
"드레스덴 5명의 대장군 중 4명이 키젠 출신. 왕실 기사단 20명 중 17명이 키젠 출신. 총무대신, 외무대신, 방위대신. 심지어."
그녀가 모든 손가락을 접으며 뒷짐을 졌다.
"2인자인 재상까지 키젠 출신."
"......."
"이제 이해하셨나요? 연합의 권력자들이 죄다 선배 후배 하는 한통속이란 거예요. 그들은 키젠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기고,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죠. 봉급을 주고, 권력을 주는 국가나 기관보다 키젠에 더 충성해요."
드레스덴은 물론 암흑연합 국가들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키젠 카르텔'을 견제하기 위한 왕실 측 인재가 들어가는 것 외에는, 요직을 거의 키젠 출신들이나 그 끄나풀들이 장악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키젠이 인재를 손에 쥐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 사람이나 요직에 앉히기에는, 키젠 졸업생의 능력과 업무역량은 초월적인 수준이다. 국가 입장에서도 암흑연합에 더 강한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라도 키젠 출신의 인재 보유가 필수적이었다.
"좋아.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시몬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키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온전히 상아탑에만 충성할 사람이 필요하단 거군."
"역시 똑똑하신 분이셔요. 대화가 빨라서 좋네요."
상아탑 소속의 키젠 졸업생이 아닌, 순수한 상아탑의 일원을 원한다.
알 만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해요?"
세르네가 살살 눈웃음을 지었다.
"반역죄로 처형당할 건지, 상아탑에 들어올 건지."
"......."
"그래도 여기, 1등 직장이고 나름대로 좋다구요? 당신 동기인 메이린도 있고, 돈이든 권력이든 원하는 만큼......."
"딱 한 가지만 물을게."
시몬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수한 내 힘이 필요한 거야? 아니면 군단의 힘이 필요한 거야?"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둘 다라고 해둘까요. 예의상."
"......내가 염려하는 건."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흴 아직 신뢰할 순 없어. 상아탑에 갔다가 내가 군단을 빼앗기지 않으리란 걸 어떻게 증명하지?"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자존감이 낮으시네요~ 당신이 능력을 보이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
"뭐, 좋아요. 상아탑에 들어오면 당신이 군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후계자인 제가 약속하죠. 그럼 이제 대답해 주세요. 시몬 폴렌티아."
후우우우우.
시몬이 길게 숨을 토해냈다.
지금 지나치게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다.
내 페이스를 되찾아야 한다.
심호흡을 하면서 칠흑을 운용하자 조금씩 몸의 떨림이 멎고 잡생각이 날아갔다.
마침내 차갑게 머리를 식힌 시몬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바뀌었네.'
그녀도 시몬의 변화를 감지했다. 하지만 진정을 좀 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세르네. 너......."
시몬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정치는 서툴지?"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렇게 카드를 빤히 오픈해 놓고 사람 협박하는 거. 좋은 버릇은 아니야."
세르네는 태어날 때부터 강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요구에 대해 Yes or No.
삶 아니면 죽음.
그녀의 양자택일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패를 숨기는 건 약자의 행위.
그래서.
"넌 절대 내가 군단장이란 사실을 키젠에 알리지 못해."
이번은 실수했다.
"어머.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키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니까."
"......."
그녀는 처음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 상아탑 내부는 친 키젠파와 반 키젠파로 나누어져 있다는 거."
"어머, 탑 내부의 일을 왈가왈부하다니. 좋은 정보망을 가지고 계시네요~ 메이린이 내부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바보는 아니고."
사실은 딕이 밥 먹으면서 한 잡담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너와 현 상아탑주는 대표적인 반 키젠파야. 네가 군단장을 모으려는 것도, 힘을 키우는 것도."
시몬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키젠에서 독립하고 싶어서겠지?"
"......."
"그런데 내가 군단장이란 사실을 키젠에 알리고 처형시킨다? 그럼 내가 가진 군단은 누구한테 넘어가지?"
시몬이 입꼬리를 올렸다.
"키젠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더 강력한 네크로맨서가 군단장이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너희들의 독립은 더 멀어져. 그렇다고 너희가 날 납치해서 상아탑의 네크로맨서에게 군단을 이식하는 것도 불가능해."
시몬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건 진짜 키젠에 대한 선전포고니까."
특례 1번 입학생의 납치, 그리고 그 특례 1번이 사실 군단장이었고 군단을 뜯어내기 위해 그를 죽인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네프티스는 상아탑에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선 상당히 냉혹했으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세르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식이면 이런 선택지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을 제거하고 그 누구도 군단을 얻지 못하도록 묻어버린다."
"아하."
시몬이 씩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 선택지는 성립되지 않아."
시몬이 가상의 레버를 잡아당기며 아공간을 열어젖혔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세르네가 멈칫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무영의 망토를 두른 큰 키의 스켈레톤. 에이션트 언데드 피어가 아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이어 눈구덩이에 검푸른 불꽃을 일으키는 스켈레톤들과, 에르제베트의 송장거미들이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 악마들처럼 우르르 쏟아졌다.
'어째서 피어가 여기에?'
세르네가 입술을 짓씹었다.
'분명히 키젠에서 아공간 검사를 진행했을 텐데.'
"방금 네 결계 안에서는 옵저버가 볼 수 없다고 했지?"
시몬이 씩 웃었다.
"그것도 실수야."
따닥!
딱!
취이이이이이!
세르네를 포위한 군단이 거칠게 포효하며 전의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