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8화
"이제는 당신이 나올 차롄가요?"
세르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로레인은 가볍게 무시하며 시몬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시몬?"
로레인의 물음에, 시몬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응. 방호 슈트 덕분에......."
"몸 말고, 정신적인 부분은 어때?"
로레인은 세르네의 고유능력을 알고 있었다.
"살짝 깃털에 스친 정도라 문제없어."
고개를 끄덕인 로레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삐딱하게 서 있는 세르네가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짓이지? 세르네."
"뭘요. 그냥 시험 치르고 있는 건데요?"
세르네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자 로레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냥 시험 치르는 건데, 결계를 쳐서 옵저버의 눈을 막은 이유는 뭔데?"
"어머나- 듣자 듣자 하니까 싸가지가 없으시네."
세르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 날 심문하는 거예요? 같은 학생인데 댁이 무슨 권리로? 벌써 키젠 학생회장이라도 되셨나 봐."
"말 돌리지 말고 물음에 대답해."
"싫다면요?"
로레인이 자세를 낮췄다.
"네 말대로, 시험을 치러야지."
"재미있겠네요."
"물러나 있어 시몬."
시몬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물러났다. 저 두 사람의 싸움에 끼면 목숨이 몇 개라도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로레인이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간 칠흑이 허공에 네 개의 마법진을 구축했다.
이내 마법진에서 새까만 화살들이 발사되자, 세르네가 꺄르르 웃었다.
"칠흑화살? 귀여워라~ 우리 사이에 무슨 내숭을......."
순간 세르네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더니 뒤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세르네의 등 뒤에서 나타난 로레인이 힘껏 주먹을 당기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단순한 펀치 한 방이 초대형 충격파를 일으키며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로레인이 주먹을 뻗은 반경으로 수십 미터 넘게 크레이터가 생겼다.
"무서우셔라."
공중으로 날아오른 세르네가 미소 지었다.
그때 그녀의 주위가 그늘지듯 어두워졌다. 지상의 로레인이 집채만 한 바위를 집어 던진 것이다.
"흥."
세르네가 손짓하자 주위에 있던 깃털들이 움직였다.
스르르르릉!
깃털들이 정면으로 무수한 곡선을 그리자, 바위가 크고 작은 파편으로 분해되어 떨어졌다.
세르네는 뒷짐을 지고 잔해 속을 자유롭게 비행하며 피해냈다.
"내려와."
로레인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시험 치르자며 망할 X아."
"고매한 핏줄께서 입이 상스러우시네요."
로레인이 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쟤 손 좀 봐줘야겠어. 시몬. 멀찍이 도망쳐 있어."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시몬이 등을 돌려 멀리 떨어지자 세르네가 아쉬운 듯 웃었다.
"왜 저렇게 보내요? 옆에서 멋진 모습 보여주셔야지."
"그 빈정대는 말투."
로레인의 몸에서 칠흑이 살벌한 기세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짜증 나."
"흐응."
세르네가 팔짱을 끼었다.
"혹시 이런 심리 아닐까요? 신경 쓰이는 남자애한테 당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로레인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허공에 긴 선이 그어지더니, 삐쭉삐쭉한 짐승의 입처럼 변하며 쩌어억 열렸다.
그 안에 보이는 온통 암흑뿐인 공간. 그 암흑 속에서 무수한 붉은 눈동자들이 보였다.
그것은 로레인의 눈동자와 완전히 동일했다. 마치 그녀의 눈이 수십 개 존재하는 것처럼.
"간담이 서늘하네요."
세르네가 말했다.
"마계를 열어젖히는 힘이라니. 당신네들 모녀가 하려는 미친 짓을 알면 세상이 어떻게 발칵 뒤집힐지......."
세르네는 말을 멈추고 급히 공중에서 가속했다. 쩍 벌어진 공간에서 시뻘건 섬광 다발들이 무수히 쏘아져 나온 것이다.
세르네는 몸에 깃털을 붙이고 이중 삼중 가속하며 비행했다.
"흐아아."
그녀의 몸이 회전하고, 비틀어지고, 고속으로 쳐 올라가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붉은 섬광이 하늘을 파괴적으로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푸르륵!
로레인은 아공간에서 해골마를 꺼냈다. 그녀가 해골마에 칠흑을 불어넣자 검붉은 마력으로 뒤덮이며 형태가 변했다.
터업!
로레인이 올라타자, 해골마는 즉시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내 두 사람이 공중에서 마주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건 그림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세르네가 두 팔을 벌리자 깃털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린 언젠가 싸울 운명이잖아요? 피차 키젠과 상아탑의 지배자가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수십 수백만 명의 죄 없는 목숨들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로레인이 칠흑으로 형성한 말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래서 지금, 아직 우리가 학생 레벨일 때 매듭짓는 게 방법일 수도 있어."
"하여간 당신네 모녀들은."
세르네가 두 팔을 세워 들어 교차했다.
"혐오스러울 만큼 가식적이라니까요."
하늘에서 순백의 궤적과 진홍의 섬광이 미친 듯이 교차했다.
중앙 섬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던 일반 학생들의 입장에선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정신없이 달리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격의 잔해들을 피하기 바빴다.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몬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게 대체 뭐 하는 싸움이야?'
규격 외의 괴물들.
이미 평가가 어쩌고 시험이 어쩌고 할 수준을 넘어섰다.
[크흐흐흐! 고작 저 정도로 넋 놓고 볼 건 없다!]
피어의 분신이 입을 벌리며 웃었다.
[키젠의 지배자? 상아탑의 주인? 실속 없는 소리! 너 또한 군단장이다! 얼마 걸리지 않아 너도 저 하늘에 닿을 것이다!]
"아직은 까마득한 것 같은데요."
시몬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어쨌거나 빠르게 격전지에서 이탈한 시몬은 생각에 잠겼다.
'다시 내 일에 집중하자. 이 정도 규모의 소리와 진동.'
시몬은 협곡의 절벽에 도착했다.
탁 트인 섬의 경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 시몬은 사방으로 칠흑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만약 빅크룸이 여기에 반응해서 근처까지 왔다면.......'
쿠구구구구구구!
시몬이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콰콰콰쾅!
시몬이 몸을 비틀었다. 바닥이 들어 올려지며 붕대로 몸을 감싼 괴물의 팔이 튀어나왔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이어서 괴물의 전신이 드러났다.
온몸이 생체 붕대로 휩싸여 있었지만 눈구덩이만큼은 확실히 드러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단 작아.'
빅크룸은 분노하는 만큼 크기가 커진다고 했다. 메이린과 싸울 때는 두 다리를 바닥에 딛고도 협곡에 얼굴을 댈 정도로 컸지만, 지금은 협곡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정도.
쿵!
빅크룸이 무릎을 절벽 끝에 대고 올라오고 있었다.
―어어어어어!
또 공격받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 시몬은 손에 쥔 물건을 힘껏 빅크룸의 머리 쪽으로 던졌다.
[빅크룸!!!]
쩌렁! 쩌렁!
시몬이 던진 물건은 피어의 분신이었다. 빅크룸도 멈칫하며 피어의 분신을 보았다.
[나다! 군단의 관리자 피어다!]
―피...... 어?
말이 통한다!
시몬이 얼른 시선을 위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상공에 옵저버 한 대가 보였다. 이 거리라면 아직은 괜찮다.
'1, 2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나간다!]
시몬이 아공간을 열어주자 곧바로 피어가 튀어나왔다.
피어는 옵저버의 사각인 나무에 몸을 비스듬하게 숨긴 채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빅크룸! 군단은 새롭게 부활했다! 어서 군단에 합류해!]
―군...... 단?
빅크룸이 커다란 고개를 갸우뚱했다.
―군...... 단.
고개를 갸웃거리던 빅크룸의 머리가 커졌다.
―군...... 단! 군...... 단! 군...... 단!
이내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망할!]
빅크룸이 점점 커지면서 피어의 분신이 빅크룸에게서 떨어졌다. 시몬이 얼른 그것을 받으며 달렸다.
―군단! 아프다! 군단! 아프다! 군단! 아프다!
"왜 저러는 거예요? 피어!"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놈은 빅크룸이 아니야!]
피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다! 빅크룸의 복제품이란 말이다!]
빅크룸이 끝없이 커지기 시작하자 하늘을 날고 있던 옵저버들도 상황을 보려고 가까이 다가왔다.
"피어!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프다아아아아아아아!
몸집이 점점 불어난 빅크룸이 고개를 쭉 내리며 시몬을 바라보았다.
시몬은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군단이다! 군단은 아프다! 아픈 건 싫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거인이 커다란 주먹으로 바닥을 때렸다. 굉음과 함께 절벽의 지형이 통째로 내려앉았다.
시몬은 허겁지겁 숲으로 들어와 빅크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왜 복제품이 절 공격하는 거죠?!"
[난들 어떻게 알겠느냐!]
빅크룸이 시몬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시몬이 보이지 않자, 빅크룸이 거대한 주먹으로 마구 지면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
"뭐, 뭐야?"
곳곳에서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빅크룸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더니 거대한 다리를 들어 올려 발차기를 날렸다.
꽝!
지형 전체가 함몰되어 무너지고, 학생 두 명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그들의 동료가 '칠흑 실'로 두 사람을 묶어서 피난시켰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빅크룸의 크기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놈이 폭주했다!]
피어의 분신이 소리쳤다.
[이대로 두면 계속 커져!]
쿠웅! 쿠웅! 쿠웅! 쿠웅!
빅크룸은 협곡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건 이미 통제 불가다. 그리고 섬 전체가 시험 중이다.
이대로는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제길!'
시몬이 그대로 등을 돌려 달려갔다. 당장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교수들의 시험중지 명령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는다. 사이클롭스 평가 때도 느낀 거지만, 키젠은 어지간한 대형 변수가 아닌 이상 학생들의 일에 최대한 관여를 하지 않는 주의였다.
[어디로 가느냐 소년! 놈과 반대 방향인데?]
"저걸 멈출 수 있는 사람을 설득해야죠!"
시몬이 즉시 달려간 곳은 전장.
그 누구도 감히 발을 딛지 못하는 곳인 로레인과 세르네가 싸우는 장소였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싸우느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로레인!!"
시몬이 소리쳤다.
"문제가 생겼어!!"
하늘에서 들릴까 걱정했지만, 로레인은 즉시 교전을 중단하고 해골마를 움직여 시몬을 향해 내려왔다.
"시몬! 무슨 일이야?"
"초대형 몬스터가 폭주해서 지금 학생들 쪽으로 가고 있어! 당장 막아야 해!"
로레인이 표정이 굳어졌다.
"어느 쪽?"
"방향으로 따지면 남쪽 섬 쪽이야. 내가 안내할게."
"웃겨."
팔짱을 낀 세르네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누가 보내준다고 하던가요?"
그녀가 깃털을 손에 들었다.
"폭주고 뭐고 그건 주최 측이 알아서 할 일이죠. 우리 싸움이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건 용납 못 하......."
"아, 그래. 세르네 너도 있었지."
시몬이 마침 잘됐다는 듯이 웃었다.
"미안하지만 좀 도와줄래?"
"네?"
세르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