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1화
"오라버니와 왕실을 대신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몰리 공주가 깍듯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시몬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공주님!"
"저희 오라버니나 드레스덴이 앞으로 시몬 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저도 몰래 나온 거라,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할 시간을 마련하게 해주세요. 그럼."
그녀가 메이드 복을 입은 여학생을 데리고 사라졌다. 시몬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녀가 있는 이상, 안드레의 보복은 더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 *
결투평가가 무사히 끝나고, 시몬이 동아리 방에 들러서 오버로드를 보수하는 도중의 이야기였다.
"제군아."
옆에서 작업을 도와주던 벤야가 말을 걸었다.
"너 아론 교수님 수업 듣는다고 했었지?"
"네."
"요즘은 뭐 배우고 있어?"
시몬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음, 그러고 보니 요즘은 스켈레톤이나 다른 언데드들은 제쳐놓고, 좀비만 집중적으로 배우고 있네요."
"......좀비?
좀비라는 말에 벤야가 굳은 얼굴로 동작을 멈췄다. 언제나처럼 동아리 방 소파에 뒹굴거리고 있던 2학년 디오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니, 문제는 없어. 그런데 지금 좀비를 배우고 있다면 얼마 안 가......."
벤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곧 '거기'에 가겠네."
"거기요?"
"......으악!!"
갑자기 들린 비명이 두 사람에 고개를 돌렸다.
디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아 씨, 그 이야기하지 말라니까! 1학년 때 트라우마 재발한다고!"
"난 재밌었는데!"
"......재밌긴 얼어 죽을, 상상만 해도 끔찍해."
벤야가 큰 소리로 웃었다. 시몬은 무슨 소린지 몰라서 시선만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론 교수님의 좀비 수업 마지막에는 중요한 '수행평가'가 있어."
벤야가 설명했다.
"당시엔 좀 끔찍할지 몰라도,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까 그것도 다 추억이네~"
추억이라며 이야기하는 벤야의 어깨너머로, 디오가 '너 안됐다' 같은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벤야가 그 이야기를 꺼낸 뒤 얼마 안 가, 정말로 소환학 수업에 수행평가 일정이 잡혔다. 그것도 하루치 일정을 통째로 비우는 꽤 큰 규모의 수행평가였다.
집합장소도 평소 같은 소환학 강의실이 아니라, 임무를 하러 갈 때 자주 들렀던 텔레포트 마법진 앞이었다.
이건 무조건 로크 섬 밖으로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재미있군. 나도 데려가라!]
시몬이 벤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피어가 의욕을 보였다.
'피어가 왜요?'
[안 그래도 거긴 한번 체크해 보고 싶었다! 네가 방학 기간일 때 무조건 들를 예정이었지.]
피어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바로 그거였다.
[군단의 좀비 대장, '프린스'가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군단 대장에 대한 이슈.
물론 시몬은 대환영이었다. 빅크룸을 얻을 찬스를 허무하게 날린 이상, 일말의 가능성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키젠에서 아공간을 검사한다는 말도 없었고,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수행평가가 시작된 뒤에는 자유롭게 활동한다는 말이 있었기에, 시몬은 피어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수행평가 당일.
시몬은 피어와 군단화된 스켈레톤들 다수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집합장소인 텔레포트 마법진 앞에 도착했다.
'웃차.'
이른 아침부터 피어의 유적까지 다녀왔더니 배가 고팠다.
적당한 나무 그늘에 앉아 매점에서 사 온 밀 빵을 깨작거리고 있는데.
"시몬!"
언덕에서 카미바레즈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보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시몬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카미."
"옆에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야."
시몬의 옆자리에 다가와 앉은 그녀는 다리를 모으고 무릎 위에 팔을 올린 채 헤헤 웃었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네! 오랜만에 모두와 함께하는 조별 수행평가잖아요!"
그랬다. 아론은 이번 수행평가에서는 제인 수업의 조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조별평가라고 못 박아뒀다. 슬쩍 주위를 둘러봐도, A반 학생들 모두 조원들끼리 뭉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조금 걱정돼."
시몬이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뭐가요?"
"이번 수행평가 힘들다고 동아리 선배님들이 그러셔서."
"아~ 저도 들었어요. C반이 우리보다 먼저 갔다고 했는데, 다들 힘이 쭉 빠져서 다음 날 수업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고 했거든요."
"오! 니들 뭐야 뭐야?"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딕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이 엄청 좋은데? 와! 여기 커플 나셨다!"
"딕!!"
카미바레즈가 귓불까지 시뻘게져서 소리쳤다. 시몬은 이젠 그러려니 하며 먹던 빵이나 깨작거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카미바레즈가 딕의 앞에서 콩콩 뛰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딕이 '읍읍!'거리면서도 몇 마디 내뱉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그녀가 딕의 팔뚝을 철썩철썩 때리며 부끄러워했다.
'역시 나랑 놀아주는 건 카미밖에 없다니까.'
딕이 카미를 놀리는 보람에 즐거워하고 있는 그때.
"야! 우리 카미 그만 괴롭혀!"
메이린이 하늘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딕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후 사정을 듣지도 않고 사람을 매도하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보는데."
"응, 니 평소 행실."
"와- 개 너무하네."
메이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도 학기 초에 네 혓바닥에 휘둘려서 난리 쳤던 걸 생각만 하면 쪽팔려 죽겠어."
"오! 요즘은 면역이 생겼다 이거냐?"
"당연하지!"
"자신만만하네. 시험해 볼까?"
딕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무릎에 손을 올리는 시늉을 하자, 메이린이 차갑게 내뱉었다.
"아, 이 '자세'로 서 있었더니 뻐근한데 다리 좀 '만져'볼까."
"......!"
딕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음에 할 대사를 정확하게 맞춰 버렸다.
그가 엉거주춤 아닌 척 자세를 바꾸더니, 이번에는 다리를 쭉 찢었다.
"딱 대느니 어쩌니 그거 하려고?"
"미친, 어떻게......!"
"사골 우려먹어도 적당히 쳐 우려먹어야지. 재탕 삼탕 사탕 하다못해 뇌절이야 그거."
"멋져요 메이린!"
카미바레즈가 박수를 짝짝짝 치며 환호했다. 어느새 시몬도 메이린의 반격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딕은 인생 최대의 위기가 온 사람처럼 얼굴을 쓸었다.
"와, 씨. 이건 어지간하면 아껴두려고 했는데."
"똥 싸는 소리 그만하고 수행평가 준비나 해."
"이번엔 메이린의 시그니처 승리 포즈를 재현해 보겠습니다."
"시그니처?"
메이린의 표정이 조금 불안해졌다.
"메이린이 결평에서 이겼을 때, 이런 느낌이던가."
딕이 팔짱을 꼈다. 그 자세에서 왼팔은 배꼽 위에 붙이고 오른팔은 얼굴 쪽으로 향한다. 다리는 곧게 펴고, 반대쪽 다리는 살짝 굽혀서 곡선이 드러나는 삐딱한 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 자세에서 오른손으로 귀밑머리를 넘기며 생긋 미소 지었다.
"더 노력해~ 평민."
크큽!
푸훗!
무슨 일인가 싶어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학생들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몬은 먹고 있던 빵을 풀밭에 뱉었고, 카미바레즈는 얼른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당사자인 메이린은 어쩔 도리 없이 얼굴이 시뻘게졌다.
"으하하! 진짜 똑같지 않냐? 이제 다른 포즈로......."
"하지 마 미친놈아!"
결국 메이린이 아공간에서 가방을 꺼내 딕을 두들겨 팼다. 딕이 가방에 얼굴을 맞으며 풀밭에 쓰러졌고 일방적인 폭력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구타엔딩이라니!"
"죽어!"
곳곳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 어이가 없네."
헥토르의 주위에 있던 파벌 중 한 여학생이 코웃음을 쳤다.
"분위기 파악 X나 못 해 진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태평하...... 웃지 마! 병신아!"
"엌!"
그녀가 옆에 선 남학생의 뒤통수를 때렸다.
모두가 활기 넘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그때.
"주목해라."
드디어 아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처럼 후줄근한 티셔츠에 반바지, 슬리퍼가 아니라 검은 깃털이 달린 코트를 입고 나타났다.
'와, 옷이 날개라더니.'
'사람이 아예 다르게 보여.'
학생들이 속으로 조그맣게 감탄하고 있는 가운데, 아론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닥거릴 시간 없다. 전원, 텔레포트 마법진 위로 올라가도록."
아무런 설명 없이 학생들을 보내고 보는 아론이었다. 학생들이 마법진으로 들어오자, 마지막으로 아론이 중앙에 도착했다.
우우우우우웅!
이제는 익숙한 텔레포트의 감각이었다. 시몬은 두 발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눈을 떴다.
시몬은 그간 선배들이나 소문 등으로 들은 이야기로 형성된 이미지가 모두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상상 이상의 공간이었다.
검은 세상.
그저 이 공간에 발을 딛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하늘은 새까맸고 곳곳에 붉은 구름 같은 것이 떠다니며 미지의 기류를 형성했다. 바닥엔 잡초가 자라 있었고 꽃이랄 것들이 있었지만 모두 생명력을 잃고 푸석거렸다.
죽음의 땅이라고 부르는 세간의 평가가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포트 넘어온 다른 A반 학생들도 이 이질적이고 황량한 모습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사락.
카미바레즈가 겁에 질린 얼굴로 시몬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시몬은 작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달래주면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주목."
검은 깃털 코트를 입은 아론이 중앙으로 나왔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호들갑 떨 것 없다. 이곳은 대륙의 샤헤드 왕국 남부. 데스랜드라는 곳이다."
아론이 설명을 시작했다.
"데스랜드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 10대 미스터리로 손꼽힌다. 이곳에 내려진 강력한 흑마법과 자연현상이 뒤섞여 괴현상을 일으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론이 바닥에 놓인 빛바랜 꽃 하나를 뽑아 들었다.
"이 지역 안에서는 부패라는 개념이 없다."
툭.
아론이 꽃을 손가락으로 두들기자 파삭하며 박살 났다.
"생명체가 죽음에 이르면,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형태가 유지된다. 그런 점 때문에 이곳은."
아론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좀비들의 천국이라고 불린다."
학생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주위에서 좀비로 추정되는 이상한 괴음이 들리고 있었다.
"이번 소환학 수행평가는 사전에 공지했던 대로 조별과제로 진행된다."
아론이 팔에 찬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그동안 좀비에 대해서 공부했고, 좀비를 일으키는 마법진까지 배웠다. 평가내용은 간단하다. 정각이 될 때까지, 이 데스랜드에서 너희들이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소환형 좀비를 만들어서 내게 보여라."
시몬의 눈이 커졌다.
'......좀비를 만드는 미션!'
그렇다면 이 데스랜드에 널려 있는 자연형 언데드를 데려와 봐야 소용없었다. 오로지 학생들이 마법진으로 만든 소환형 좀비만 평가대상이었다.
"평가 기준은 좀비의 완성도, 독창성, 전투능력, 그리고 좀비를 일으키는 데 사용한 마법진도 점수에 포함된다. 팀워크 점수 따윈 없다. 네 명이서 가져온 좀비의 성능에 따라 네 명 모두 똑같은 점수와 순위를 받게 될 거다."
아론이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좀비 따위에 질질 짜는 겁쟁이는 없길 바란다. 너희는 네크로맨서다. 이번 평가도 네크로맨서답게 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