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3화
쏴아아아아아.
그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작은 소년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여기 있었는지, 언제부터, 왜 여기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갈증도 나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니까 있었다.
멍하니 검은 하늘과 붉은 구름만 바라보던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여기 너무 무서워~
-언제 돌아갈 거야? 너무 늦으시면 교수님이 걱정하신다니까.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여자들은 남자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그의 호감을 얻으려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반면 중간에 낀 남자는 별 감흥이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때 그들이 소년을 발견했다.
-앗! 자기야, 나 무서워! 저거 언데드인가 봐.
-.......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한동안 가만히 서서 소년을 바라보기만 했다. 힐끔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보던 그녀들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구냥 가자아~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하네. 자기야, 우린 이런 데에 낭비할 시간이 없.......
남자가 손가락을 딱딱 두 번 튕겼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되는 양, 두 여자는 토라진 듯 입술을 삐쭉이더니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렇게 여자들을 돌려보낸 뒤, 남자는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왔다.
-뭐 하냐? 이딴 곳에서.
-.......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겁먹은 눈으로 남자의 위아래를 훑다가, 다시 두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끼, 내 말 씹네.
남자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쭉 뺐다.
-X나 따분하지 않냐? 이런 우중충한 동네.
-.......
소년이 다시 고개를 들자, 쭉 뻗은 남자의 손이 보였다.
-할 짓 없으면 따라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남자의 씩 웃는 얼굴이, 소년의 망막에 맺혔다.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히 보장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 미소가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 * *
그렇게 프린스는 리처드의 군단에 들어가게 됐다.
그때 당시에도 리처드는 많은 언데드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프린스만큼은 특별취급을 해주었다.
프린스도 리처드가 기대했던 대로 크게 성장했고, 결국은 군단의 '대장' 자리에 오르며 좀비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그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했다.
이 나날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영원은 없었다.
군단은 해체되었고, 리처드는 사라졌다.
'......괜히 기분 뒤숭숭하게.'
회상에서 빠져나온 프린스가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의 저택 소파에 대책 없이 드러누워 있는 시몬이 보였다. 그 옆에는 피어가 자기가 새로 뽑은 군단장의 자랑을 막 늘어놓는 중이었다. 팔불출 같아서 프린스는 한 귀로 흘렸다.
부스럭.
잠시 몸을 뒤척이던 소리가 들리더니 시몬이 눈을 떴다.
"으으음."
[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군 소년!]
그는 잠 덜 깬 표정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눈을 비볐다.
"......피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됐긴! 네가 마누스 무리를 싹 날려 버리지 않았느냐! 그때로부터 한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다!]
"......."
시몬은 이마를 감싼 채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마누스를 날려 버린...... 거 맞죠?"
[그래! 그것도 시체 폭발을 써서 말이다!]
시몬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려 버린 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시체...... 뭐? 그게 뭔데요?"
[크흐흐흐!]
피어는 혀를 내둘렀다.
본능에 가까운 통찰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그냥 '재능'이라고만 해야 하나? 이쯤 되면 시몬을 위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피어는 어리둥절한 시몬을 위해 자초지종을 다 설명했다.
[좋아, 어디까지 기억나지?]
"좀비들을 보내 마누스를 덮은 것 까지요. 그리고 막 미친 듯이 집중해서 어떻게 하다가......."
시몬이 프린스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뭔가 쟤한테 멋있는 말 툭 던진 것 같았는데......."
그 말에 프린스가 픽 하고 웃었다.
[어떻게 이기는지 보여준다니 뭐니 하던 그거? 네가 기억 안 나서 어쩌냐?]
"끙."
시몬의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왕관은 다시 프린스의 본체가 쓰고 있었다.
[착각하지 마. 네가 왕관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좀비들을 다시 통제하려고 쓴 거니까.]
프린스가 본체에 다가가 왕관을 집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 힘은 네가 나보다 더 잘 다뤄. 가져가겠다면 뭐.......]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난 다시는 그거 안 쓸 거야."
[......?]
[나도 소년의 결정에 동의한다.]
피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소년은 어느 순간까지는 왕관을 쓰고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유지했다! 하지만 결국은 왕관의 힘에 정신을 잃고, 자기 자신마저 빼앗겨 버렸지. 그때 보인 소년의 의식은 통제 불능이었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뇌의 통제를 벗어난 듯 부르르 떨리며 자꾸만 왕관 쪽으로 향하려는 손. 시선도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만 왕관으로 가고 있었다.
[중독현상이군.]
피어가 말했다.
[왕관은 쓰면 쓸수록 그 힘에 심취하게 된다! 그렇게 왕관의 힘에 의존하다간 결국 네가 왕관에 먹히겠지.]
"네, 지금 당장은 너무 위험한 힘이네요."
시몬은 정말 중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왕관은 프린스가 계속 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프린스는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근데 너, 진짜 시체 폭발 쓴 거 기억 안 나?]
"안 난다니까 그러네."
시몬은 그렇게 대꾸하며 허공에 룬어를 그렸다.
"뭔가 막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한 것 같은데."
분명히 기억은 안 나는데 몸이 간질간질하다. 머릿속의 기억은 증발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다.
시몬은 허공에 손가락을 몇 번 그어보더니 말했다.
"메인으로 들어가는 룬어가 코어에 작용하는 '광폭'. 맞죠?"
[정답이다.]
얼떨결에 새로운 기술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중에 키젠에 돌아가면 복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뒤늦게 퍼뜩 정신이 들었다.
"수행평가!!"
[......?]
"나 빨리 돌아가 봐야 해요. 좀비도 나한테 있단 말이에요! 애들이 걱정하겠어요."
헐레벌떡 본인의 겉옷을 챙기는 시몬의 모습을 보며, 프린스는 킥킥 웃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가 처음에 리처드의 휘하에 들어갔을 때도 그는 키젠 학생이었다. 가끔 리처드가 준비물을 까먹었을 때 프린스가 대신 키젠 입구 앞까지 와서 가져다줬던 기억도 있다.
'하아, 그럼 나도 키젠으로 돌아가야 하나?'
프린스가 자신의 본체를 바라보았다.
이걸 키젠으로 옮기려면 최소 2년은 잡아야겠지만, 시몬이 놔줄 리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왕 같은 시절도 끝.......
"네 본체는 여기 남아도 돼. 프린스."
시몬의 이어지는 말에 프린스는 깜짝 놀랐다.
[저, 정말이냐?]
"데스랜드는 네가 통치하고 있다며? 그리고 내가 널 통제하고 있으니까 결국은 데스랜드도 내 차지인 거지."
[.......]
"대장 하나 앉혀두고 전용 영지를 얻는 거면 나쁘지 않다고 봐. 그렇죠? 피어."
피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언데드들 중에서는 내 유적에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덩치가 크거나 인간에게 유해한 개체도 있지! 그런 것들을 적당히 데스랜드에 풀어놓고 관리하면 되겠군!]
"좋네요."
무엇보다 프린스는 특정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거리와 상관없이 대륙 어디든 좀비에 강림할 수 있다. 본체만 데스랜드에 있을 뿐, 키젠에서도 부르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데스랜드를 잘 부탁해 프린스."
[.......]
앞으로도 데스랜드를 부탁한다니.
그 말에 프린스가 지은 표정은 뭐라 콕 집어서 표현하기 힘들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감격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근데 진짜 이대로 가는 거야? 족쇄 같은 건?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배신은 무슨, 이미 군단화한 거로 족쇄는 채웠으니 됐어."
[.......]
프린스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본체 쪽으로 다가갔다.
찌익.
찍.
그러곤 본인이 그렇게 아끼던 본체의 몸에서 새끼손가락과 귀를 떼어냈다.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린스! 너 뭐 하는......!"
[기다려 봐.]
프린스가 자신의 몸을 다지듯 손안에서 뭉쳤다.
쿠르릉! 천장에서 검은 벼락이 떨어지며 손안으로 들어가더니, 본체의 신체가 극도로 압축되고 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리고 손을 떼자 회색의 반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프린스가 그것을 시몬을 향해 휙 던졌다.
[그걸 아무 손에 끼고, 반지에 칠흑을 흘려 넣으면 내게 이야기할 수 있어.]
시몬은 프린스가 말한 것처럼 반지를 끼고 칠흑을 흘려 넣었다. 이내 검게 변한 반지에 입을 대고 말했다.
"들려?"
[잘 들려.]
프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기능은 좀비의 몸에 반지가 닿게끔 손을 올리는 거야. 그럼 내가 그 좀비로 강림할 수 있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
프린스가 무안한 듯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시몬은 반지를 낀 손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소중하게 간직할게."
[크흐흐! 부르면 헛짓거리하지 말고 당장 넘어오도록! 가자, 소년.]
"아 참, 프린스!"
시몬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왜?]
"혹시 이 저택에 좀비로 만들 만한 괜찮은 거 없어?"
* * *
수행평가 종료까지 이제 한 시간 남은 시점.
좀비 재료를 찾아 데스랜드를 돌아다니던 학생들이 이제 캠프로 복귀해서 평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A반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고, 그 앞의 대형 천막에는 아론과 조교들이 한창 좀비를 평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시몬! 얘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메이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아, 무사히 탈출했다며!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시몬이 걱정돼요."
카미바레즈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프린스와의 교전 후, 딕과 카미바레즈는 세상모르고 기절해 있었다. 시몬에게 구출된 메이린이 뒤늦게 합류해서 그들을 깨웠고, 세 사람은 무사히 캠프 쪽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메이린을 구해준 그 '피온'의 말에 따르면, 시몬도 그 사건 이후 메이린처럼 시체쟁이들에게 납치당했으나 자력으로 탈출해서 하수도로 들어왔다는 것 같았다.
안전지대에 들어왔으니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딕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우, 근데 아직도 생각나네. 그 엄청 센 좀비랑 마주쳤을 때 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어."
카미바레즈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아난 게 기적이었어요."
"감사히 생각해! 피온 님이 우릴 구해주신 거니까!"
딕이 스윽 고개를 돌렸다.
"근데 우리 있잖아. 그 피온이란 사람 말만 믿고 시몬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진짜 믿을 만한 사람인 거 맞아?"
"아, 당연하지!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라니까?"
메이린이 열을 올렸다.
"그리고 나한테 친구들에게 돌아가라고 했어! 피온 님이 너희를 알고 있던 이유가 뭐겠냐? 그 강한 좀비로부터 너흴 구해준 거야!"
딕이 뒷머리를 팔로 받쳤다.
"나는 약간 의문인 게, 피온이 저택에서 본 그 멋있는 스켈레톤을 본 아머로 입고 있었다며?"
"응."
"그 스켈레톤이 우릴 공격했잖아. 기억 안 나?"
메이린의 말이 멈췄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참격이 날아왔고 시몬이 몸을 날려 자신을 구해줬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진 그녀가 파닥파닥 손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아, 그! 그때는 우리가 누군지 잘 모르셨겠지! 착각하셨거나!"
"조금 이상한데......."
메이린이 살벌하게 눈을 치켜뜨며 딕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피온 님을 의심하는 거야?"
또 맞을까 봐 딕이 찔끔하며 물러났다.
그때 조용히, 곰곰이 고민하고 있던 카미바레즈가 입을 열었다.
"......혹시."
두 사람이 시선이 돌아갔다. 카미바레즈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그 피온이란 분이 시몬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