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6화
"차기 상아탑주."
시몬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이 풀리며, 시몬의 등 뒤에 올라가 있던 세르네가 미끄럼틀 타듯 바닥에 내려왔다.
'지금 상아탑을 내게 준다고 한 거야?'
시몬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화사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시몬은 잠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쓸었다. 상아탑에 관심이 있고 말고를 떠나 워낙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 넣듯,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며 냉정을 되찾았다.
"그건 불가능해."
시몬이 결론 내렸다.
"아무리 네가 상아탑의 정식 후계자라고 해도, 상아탑주 자리를 생판 남에게 양도할 권한은 없어."
"그럼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녀가 길고 하얀 손가락을 슥 펼쳤다.
"상아탑 후계자와의 혼인."
"......?"
"부끄럽긴 하지만 사실 상아탑은 역사가 긴 만큼 꽉꽉 막히고 가부장적인 조직이거든요. 그 긴 역사에 여성 상아탑주는 단 두 명뿐. 탑의 법률에 의하면 '탑주'라는 것도 사실 탑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 마법사를 뜻하는 말이래요. 그러니."
그녀는 작게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평소답지 않게 상기된 낯빛으로 말했다.
"혼인이 이루어진 뒤, 저는 탑후(塔后)로서 직위를 개정하고 한발 물러날 거예요. 그러면 제가 받드는 존재, 상아탑주는 자연히 당신이 되는 거죠."
"......."
시몬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렇게 된다면 상아탑주는 실권 없는 명예직이자, 얼굴마담이야. 권력은 여전히 정통 후계자 전철을 밟은 탑후가 쥐게 되는 거잖아."
"우와-"
그녀가 조금은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은 엄청 로맨틱한 대쉬였는데, 이걸 이렇게 받으시네."
"응?"
"흥, 몰라요."
그녀가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
시몬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웠다.
영입 제안을 했으니까 그 제안이 타당하고 현실성이 있는지를 논파했을 뿐인데, 제안한 쪽에서 먼저 기분 나빠하다니.
'어우, 안 하던 짓 하려니 어렵네.'
세르네도 속으로는 짜증이 바득바득 쌓여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냥 깃털 몇 장 꽂으면 누구나 개처럼 기면서 내 구둣발을 정성스레 핥게 될 텐데.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제안의 핵심은 상아탑주 자리가 아니라 '나'라는 걸 알아줘야 하는 거 아냐? 눈치 없이 명예직 권력 어쩌고 있네.
날 가질 수 있다는 것만큼 큰 메리트가 어디 있는데?
왜 저 사람한테만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해?
아, 생각할수록 빡친다.
그녀가 여러 의식의 흐름을 지나치며 짜증을 참고 있는 그때, 시몬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덥석.
그러곤 팔을 뻗어 그녀의 양어깨를 짚었다.
아직 화가 안 풀린 그녀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시몬을 노려보았다.
"스트레칭. 저기 옆에 조교 쌤이 눈치 주고 계셔."
"......아."
세르네도 다른 학생들이 하는 걸 슬쩍 보고는 시몬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주춤거리면서 물러나 엉덩이를 쭉 빼고 허리를 구십 도로 구부렸다.
"숨 들이마시고!"
구령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자세를 유지했다. 뻐근하던 등 전체와 어깨가 시원해졌다. 몇 번을 쭉쭉 반복했다.
"다음 자세!"
이번에는 앉아서 하는 스트레칭이었다.
두 사람이 발바닥을 마주할 때까지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앉은 다음, 한 명이 상대의 손을 잡고 앞으로 당겨주는 스트레칭이었다.
'아, 망했다.'
세르네가 자신의 교복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몸 쓰는 마투학 수업을 싫어해서 툭 하면 빠지거나, 깃털로 조교들의 기억을 지우거나 대충대충 하는 시늉만 내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평소 습관대로 교복을 입고 왔다가 조금 난감한 상황이 왔다.
"잠깐만."
그때 시몬이 체육복 위에 입고 있는 얇은 겉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다가와서 직접 그녀의 허리에 둘러매 주었다.
"이러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불편하면......."
"고마워요. 한번 해보죠."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서로의 발바닥이 닿을 때까지 다리를 벌리고는 양손을 맞잡았다.
"내가 먼저 당길게."
그녀의 몸이 갑자기 시몬 쪽으로 확 끌려들어 왔다.
"와앗! 허리 아파요!"
"원래 이렇게 하는 스트레칭이야."
"아, 잠깐만! 윽!"
그녀가 인상을 구기며 원망 어린 눈으로 시몬을 노려보았다. 시몬이 소리 내어 웃었다.
'흐으음.'
그때 세르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저쪽에서 C반 여학생과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메이린이 이쪽을 맹렬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품고 있던 짜증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세르네는 시몬과 함께 스트레칭을 하며 보란 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몬도 긴장감이 풀렸는지, 보기보다 풍부한 감정표현을 했다.
"에르제베트의 능력은 유용하던데, 혹시 그걸로 이상한 짓 한 적 있어요? 동급생으로 변신시키거나."
그 말에 시몬의 얼굴이 벌게지는 걸 보며 세르네는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있구나?"
"없......! 아니! 그건 에르제가 자기 멋대로 한 거라고!"
메이린의 시선을 즐기는 것 외에도, 이 시간 자체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 인간은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원할 때 웃어야 했고 내가 원할 때 울어야 했다.
내 대답에는 무조건 YES.
상대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감정만 가지고 원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게 편했으니까.
그런데.
'가끔은 이렇게 예외로 굴릴 장난감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나?'
새로운 맛으로 가지고 놀기 좋았다.
어떤 화두나 물음을 던지면 그에 따른 반응이 천차만별.
무엇보다 예상할 수가 없었다.
혼인 이야기를 꺼내니 실권 없는 권력자 어쩌고 하는 반응하는 것처럼.
시몬은 어떨 땐 감정을 숨겼고, 어떨 땐 웃었으며, 어떨 땐 역으로 공격해오기도 했다.
"그러는 너도 메이린한텐 진심이라며."
"뭐어 그렇죠."
그래서 재미있었다.
신박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느껴보는, '동등한 관계'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몸풀기는 여기까지. 다들 멈추제요!"
홍펭의 외침이 들렸다. 그녀는 뒤늦게 핑크빛이 된 기분에서 빠져나왔다.
'진짜 귀신에 홀린 기분이라니까.'
두 사람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린은 두 눈에서 섬광을 발사하듯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세르네는 가볍게 무시하며 쿡쿡 웃었다.
"자, 이번에 배울 기줄은 체내 칠흑 운용의 상급 응용기예요."
체내 칠흑 운용은 대단히 특별한 뭔가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코어를 가동하고 칠흑을 전신에 고르게 순환시키면서, 신체기능을 전반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키는 기술. 간단히 말해 몸 전체를 '코어화'시키는 기술이었다.
처음에는 흐름을 일일이 자각하고 유도해야 하지만 칠흑의 '기억하려는 성질'을 이용해 반복하면 그저 코어를 가동하는 것만으로 체내 칠흑 운용 상태가 유지된다.
지금까지의 마투학 수업도 체내 칠흑 운용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게 하기 위한 커리큘럼들이었다.
런닝도 1학기 초반에는 천천히 뛰었다가, 요즘엔 칠흑 운용을 하지 않으면 템포를 따라잡지 못하도록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하마에 올라타는 것도 체내 칠흑 운용을 마스터하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상위단계의 기술.
"체내 칠흑 분화입니다!"
홍펭의 몸에서 칠흑이 증기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동안 해오던 체내 칠흑 운용의 순환 속도를 3배로 높이제요!"
학생들의 표정이 아득해졌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게 아닌데?
"물론 3배로 높이기만 하면 장기랑 내장이랑 다 터져 죽겠죠?"
"......네?"
"그러니 칠흑을 몸 밖으로 배출해 줘야 해요! 이렇게."
그녀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칠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증기의 형태가 아니라 땀방울처럼 방울방울 떨어졌다.
초보자들은 증기 형태로 배출하는 것보다는, 땀방울과 함께 액체 상태로 배출하는 게 더 쉬웠다.
"이 기줄이 유지되는 동안, 여러분은 본인보다 몇 배나 더 크고 강한 상대도 마투로 이기는 게 가능해요! 여러분은 아직 초보니까, 한도는 3분으로 잡아요!"
칠흑이 흐르는 속도를 세 배로 높이면 당연히 체내의 부담이 간다. 그래서 피부 밖으로 땀을 흘리듯 방출하면서, 코어는 계속해서 칠흑을 뿜어내 3분의 강력한 상태를 유지.
위급한 상황을 한 번에 역전시키거나, 승부에 쐐기를 박을 때 사용되는 일종의 필살기 같은 기술이었다.
"자! 바로 해볼게요!"
조교들이 학생들을 통제했다. 여기서 짝을 지어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 명이 등을 돌리고 '체내 칠흑 분화'를 준비하고 있으면, 다른 한 명이 그의 등 뒤에 '배출' 마법진을 발동시킨다.
원래는 배출까지 본인이 해야 완성이지만, 아직은 초반 단계기 때문에 체내 칠흑 운용을 늘려보는 것부터 해보는 것이다.
"먼저 해도 돼?"
"네, 좋으실 대로."
시몬이 뒤돌아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코어를 작동시킨다.
그동안 여러 적과 싸우면서 몇백 번이고 반복했던 흐름. 칠흑이 체내를 순환하고 있다.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다. 완벽히 밸런스가 잡혔다.
이걸 세 배로 끌어올려야 한다니, 나중에 실패해서 잘되고 있는 체내 칠흑 운용마저 흔들릴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할 생각은 없어.'
시몬은 용기를 냈다. 일단은 코어의 칠흑 분배량을 두 배로 높여보았다.
"큭!"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코어의 가동량을 세 배도 아니고, 두 배로 높였을 뿐인데 온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배출할게요~"
등 뒤에 세르네의 손바닥이 닿는 게 느껴진다.
잠시 후 칠흑이 배출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다시 마음을 다잡은 시몬이, 이번엔 코어의 가동량을 즉시 세 배까지 가동했다.
"크억!"
5초도 못 버티고 시몬은 바닥에 엎어졌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듯 쓰러져 있거나 주저앉아 있거나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흐음~"
세르네가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칠흑을 길들이기 전까지는 힘들겠죠. 무식하게 반복해서 연습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너도 해볼래?"
"됐어요, 이런 기술. 배워봐야 쓰지도 않을 테고. 그보다......."
힐끔 메이린 쪽을 훑어본 그녀가 다시 고개를 되돌리며 말했다.
"한 번 더 해볼래요? 이번엔 제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
"네 방식?"
"네!"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두 손을 내려 치맛자락을 수줍은 척 붙잡더니 제자리에서 콩콩 뛰기 시작했다.
"......?!"
그녀의 하얀 피부에서 깃털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발밑으로 깃털들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설마 내 몸에 능력을 쓰려는 건 아니겠지?"
"후훗."
그녀는 웃음으로 흘려넘기며 바닥의 깃털을 한 장 주웠다. 그러곤 본인의 몸에 깃털을 붙였다 뗐다 하기 시작했다.
"요건가? 아님 요거?"
그녀가 중얼거릴 때마다 깃털의 칠흑 명암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 이거다."
그녀가 허공에 손짓하자, 바닥에 떨어진 깃털의 색이 똑같이 변하더니 세르네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깃털을 스무 장 정도 붙인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 있는 남은 깃털들이 마법진의 형태로 변했다.
"잠깐만, 너 뭘 하려는......."
"시끄러워요."
그녀가 깃털 한 장을 시몬의 몸에 댔다. 시몬이 기겁하며 즉각 반응하려는 순간.
'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긴장감이 날아가며 근육이 이완된다. 바람이 쏴아아 불어오며 나무와 풀이 흔들리고 있는 소리가 잘 들린다.
"진정제예요. 키젠의 교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내가 이상한 짓을 꾸밀 만큼 바보로 보여요?"
"......."
맞는 말이긴 했다.
시몬이 고민하고 있자, 그녀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쁜 짓 안 할 테니까 아까처럼 뒤돌아봐요."
잠시 고민하던 시몬이 이내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얍!"
그녀가 갑자기 뒤에서 백허그를 하듯 밀착해 왔다. 기껏 진정 효과로 차분해져 있던 시몬이 바짝 긴장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세르네!"
"앞을 보세요."
그녀의 말에 시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깐.'
시간이 느리고 주위의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바힐이 사용했던 그 심상과 비슷했다.
"이 상태라면 할 수 있겠죠?"
그녀의 목소리가 노랫말처럼 들렸다.
"해봐요. 도와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