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6화
<내 조교가 나를 죽이려 한다.>
일기의 첫 장부터 오싹한 느낌이 확 들었다. 시몬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장을 넘겼다.
<나는 하루에 10분 정도만 제정신을 차릴 수 있다. 모두에게 진실을 남기기 위해 이 일기를 쓴다.>
<증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맹독학 교수가 독살당하는 중이고, 약에 정신이 붕괴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믿어줄까? 부끄럽게도 사실이다. 내가 경솔했다. 세상엔 아직도 내가 모르는 독이 너무나도 많다.>
<그녀의 요구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다. 오늘은 내게 교수증을 요구했다. 약에 취했어도 그녀의 요구를 거절한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나는 즉시 연구실에 와서 교수증을 슬라임에 숨기고, 기억 파괴의 약을 마셔서 해당 기억만 삭제했다. 그녀는 교수증을 손에 넣지 못하리라.>
<이제 나는 그녀에게 거스를 수 없다. 그녀는 내게 동료들의 은퇴 종용을 뿌리치라고 명령했고, 자신에게 수업을 맡기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제 사랑하는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그녀는 이제 내 앞에서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녀는 에프넬의 프리스트였다. 그리고 내게 자택이 아닌, 연구실에서 지낼 것을 명령했다. 혹시나 내가 정신을 차리면 다른 누군가에게 실토해 버릴까 염려했으리라. 그래도 아직 그녀는 내가 10분 동안 정신을 차린다는 것도,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이 사실마저 들키면, 나는 죽는다.>
.......
.......
<그녀는 내게 유언을 쓰라고 명령했다. 구체적인 사항까지 전부 그녀가 지시했다. 이게 내 마지막 일기가 되리라. 누구라도 좋으니 그녀가 없을 때 혼자서 이 연구실에 방문해 주길. 슬라임의 암구호는 대상이 대답할 때 나오는 타액을 검출해 프란체스카만 아니면 열리도록 해두었다.>
<당신이 지금 이 일기를 보고 있을 즈음 나는 죽은 사람이겠지. 당신에게 부탁한다. 프란체스카를 막아달라. 그녀는 끔찍한 짓을 꾸미고 있다.>
일기를 든 시몬의 손이 벌벌 떨렸다.
비로소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모든 상황은 철저하게 짜인 프란체스카의 각본대로 흘러가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한번 이 계획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다.'
시몬은 굳은 얼굴로 연구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피어! 오고 있어요?'
[망할, 이제 거의 다 왔다! 키젠 주위에 안개 결계가 펼쳐져 있어서 시간이 걸리는군!]
시몬은 피어와 합류한 뒤에 카쟌에게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전에.
"......."
시몬은 일기를 들고 빠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 * *
마탄 사격 실습관 1층.
투콰앙!
투캉!
카미바레즈가 연신 손끝에서 혈류탄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다가오는 식물계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폭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가 쭉쭉 빠지는 그녀의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하아, 끝이 없어.'
일행과 헤어져서 마탄 사격 실습관 건물에 들어온 그녀는 카쟌이 준 안경을 쓰고 주위를 샅샅이 뒤졌었다.
그러다 빈 강의실 한 곳에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수상한, 새까만 상자 같은 것을 발견했다.
상자의 겉면은 흑마법이 걸려 있는 붕대나 노끈, 잠금장치들로 칭칭 휘감긴 모습이었는데, 저게 카쟌이 말한 '데솔레이터(Desolator)'가 확실해 보였다.
정말로 인식 장애 마법이 걸려 있는지, 안경을 벗어서 보면 상자가 그 자리에 있는지 눈치채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녀가 데솔레이터에 다가가려 하자, 주위에 마법진들이 펼쳐지면서 넝쿨 식물들이 바닥과 천장을 뒤덮고, 두 발로 걷는 꽃 형상의 식물형 몬스터들이 쏟아져나와 카미바레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읏!"
그녀가 소매로 입과 코를 가렸다. 심지어 천장의 식물에서는 독이 뿜어져 나왔다.
꽃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식물형 몬스터들도 꽃잎을 흔들며 독성 씨앗 같은 것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슈슈슈슉!
다시 독성 씨앗이 날아오자 그녀가 몸을 날렸다. 강의실 뒤편에 씨앗이 부딪혀 터지며 벽면이 통째로 내려앉았다.
촤르륵!
"꺄악!"
갑자기 천장에서 넝쿨이 내려와 그녀의 다리를 휘감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몸이 올라갔고, 식물형 몬스터가 탄환을 쏘아 보냈다.
'큭!'
그녀가 급히 피를 뽑아내 방어막을 치려는 순간, 갑자기 다리를 휘감은 넝쿨이 잘리며 그녀가 바닥에 떨어졌다.
오버로드의 칼날이었다.
'시몬의 소환수!'
이내 시몬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왼발로 바닥을 강하게 디뎠다.
'개문!'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르르르륵!
촤르륵!
다섯 개의 금속 칼날들이 일자로 쭉 쏟아지며 전방에 벽을 만들었다. 칼날에 부딪힌 독성 탄환들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카미?"
"아!"
그녀는 위를 보고 있었다.
"위에서 와요!"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날아온 독성 탄환이 오버로드의 칼날을 넘어오고 있었다. 시몬은 즉시 그녀를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탄환이 떨어지며 바닥이 통째로 녹아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은 황급히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 시몬! 여긴 어떻게......!"
"카미, 폭탄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네게는 새로운 부탁이 있어."
시몬이 품에서 랭의 일기장을 꺼내 그녀의 손에 건넸다.
"지금 당장 키젠을 나가서 교수님들이 있는 영묘로 가. 이 일기장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거야. 네가 네프티스 님과 다른 교수님들을 불러와 줘."
"하, 하지만......! 여러분을 내버려 두고 저만 도망칠 수는 없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야."
시몬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주문을 걸듯 말했다.
"네가 우릴 구하러 가는 거지."
그녀가 영묘로 가야 했다.
조교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보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를 조교를 찾아서 일일이 설명하고, 일기가 가짜가 아닌 걸 증명하고 뭐 하고 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몬을 믿고 있고, 키젠에서 지금 당장 북쪽으로 올라가면 영묘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미래에서, 그녀는 프란체스카에게 살해당했다. 시몬은 카미바레즈를 지키지 못했다.
아직도 수업시간에 그녀를 훑는 프란체스카의 눈빛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녀의 죽음은 시몬에게 있어서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그녀가 키젠에 있는 이상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미, 부탁해."
하지만 도움을 구하러 나가는 것도 그녀의 선택.
거절한다면 밖으로 나갈 다른 사람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반박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가, 이내 입술을 꽉 깨물며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된다 안 된다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제발! 제발 무사해 주세요! 만약 시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평생 시몬을 원망할 거예요!"
"응, 걱정 마."
카미바레즈가 일기장을 품에 소중히 끌어안고 영묘로 달렸다. 시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극물을 가진 몬스터라.'
피어가 없으니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래도 다행히 저 식물들은 데솔레이터를 지키는 게 최우선 명령인지, 강의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몬은 슬쩍 복도 쪽으로 빠져나왔다.
몇몇 학생들이 잡담을 떨며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모습만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일상 같았다.
시몬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여학생들에게 달려갔다.
"얘들아!"
갑자기 시몬이 휙 나타나자 그녀들이 놀란 듯 짧은 비명을 질렀다. 시몬은 미안하다고 사과할 틈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아공간에 좀비 있는 사람 없어? 소환마법을 쓴 거든 아니든......."
두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나 소환학 지망이라 있긴 있는데."
오른쪽의 여학생이 아공간에서 붕대에 감싸진 좀비를 꺼냈다.
그린 고블린의 좀비 시체. 냄새도 나지 않았고 깨끗했다. 방부처리가 된 모양이다.
"1골드에 산다. 콜?"
"어, 진짜?"
시몬이 1골드짜리 동전을 튕기고는 고블린 사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너희들, 빨리 도망쳐. 프리스트가 키젠에 나타났어."
시몬은 혹시나 해서 말해봤지만, 그녀들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그래, 이런 반응이 당연해.'
도망치라고 말해도 도망칠 상황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키젠은 절대적인 요새의 이미지고, 실제로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 테러리스트나 프리스트가 나타났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시몬은 설명을 그만두고 다시 데솔레이터가 있는 강의실로 뛰어갔다.
"후우."
강의실 앞에 도착한 시몬이 좀비를 바닥에 눕힌 다음 왼손의 회색 반지를 입 앞에 대며 말했다.
"프린스! 들리지? 비상사태야. 지금 이 좀비로 넘어와 줘!"
시몬은 그렇게 말하며 좀비의 몸체에 반지를 댔다.
쿠르르르릉!
그러자 천장에서 검은 번개가 내려와 좀비의 몸에 떨어졌다.
좀비의 몸이 새까맣게 물들며 우득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형태가 180도 변화하며 푸른 예복을 입고 왕관을 쓴 프린스로 모습이 바뀌었다.
[언제 부르나 했네.]
"대충 상황은 들었지?"
[어어.]
프린스가 삐거덕거리는 목을 붙잡으며 고개를 휘휘 흔들었다.
[아, 이 몸 별로네. 방부처리 해둔 거에 강림하는 거 싫은데.]
"엄살 부릴 시간 없어. 따라와."
시몬과 프린스는 데솔레이트가 있는 강의실로 들어왔다.
"처리할 수 있겠어?"
[날 뭘로 보고.]
프린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 그보다 옛날 생각나네. 키젠은 진짜 오랜만이야.]
-키지지지!
식물형 몬스터들이 독성 씨앗을 연신 날려댔다. 프린스는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퍼엉!
퍼버어어엉!
거의 산탄처럼 밀려드는 독성 포탄을 맞으면서도 프린스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태연하게 걷고 있었다. 심지어는 독가스가 자욱하게 뿌려진 곳까지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좋아!'
시몬은 주먹을 꾹 쥐었다. 좀비 왕자의 몸에는 어지간한 저주나 독은 통하지 않는다.
적일 때는 그만큼 까다로웠지만, 소환수가 된 지금은 무척이나 든든했다.
넝쿨들이 내려와 프린스의 몸을 휘감았지만 그냥 앞으로 걷는 것만으로 찢어버렸다.
식물형 몬스터들이 가시를 일으킨 채 프린스에 달라붙었지만, 좀비 왕자의 발걸음을 묶는 것조차 어려웠다. 생채기 하나 없이 식물 줄기를 뜯으며 프린스가 히죽거렸다.
[이게 본체네?]
무식하게 몸으로 돌파한 프린스가 데솔레이터의 앞에 보이는 커다란 식물 괴물의 몸체를 발견했다. 그 몸체의 꽃잎이 파리지옥처럼 쩍 벌어지더니 프린스의 상체를 덥석 집어삼켰다.
시몬이 놀란 소리를 냈다.
"프린......!"
퍽!
식물 괴물의 머리가 뚫리며 프린스의 팔이 삐쳐 나왔다. 그대로 괴물의 머리를 붙잡고 빠져나온 프린스가 힘껏 놈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바닥이 들썩거렸다. 사방에서 퍼부어지는 독극물을 무시하며 프린스가 발로 지근지근 괴물을 짓밟았다.
[끈질겨.]
이내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리더니, 강하게 한 방 내리쳤다. 그 일격에 괴물이 본체가 뻥!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식물형 몬스터들과 넝쿨도 입에서 녹색 즙을 줄줄 흘리며 축 늘어졌다.
모든 식물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프린스가 느긋하게 손바닥을 털고는, 데솔레이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음은 어디로 가? 군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