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63화
안나가 정화의 성녀가 됐다.
그 말에 시몬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직 플레마의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엄마가 그런 존재가 됐다고? 충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성녀의 힘을 쓰는 안나 선생님은 무척 괴로워 보이셨는데요."
옆자리의 레테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리처드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인간의 몸으로 두 종류의 '성녀의 정수'를 한 번에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단다. 안나는 원래 기적의 성녀였던 몸이고, 정수는 빼냈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몸에 남아 있지. 그런데 새로운 정수가 들어오는 바람에 반발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 거란다."
안나는 11세라는 어린 나이에 최연소 성녀가 됐을 정도로, 타고난 재능과 높은 정수 적합도를 갖고 있었다. 다음 주인을 찾고 있던 정화의 정수가 이제 일반인이 된 그녀를 선택한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두 개의 정수가 안나의 몸에서 반발작용을 일으키며, 안나는 어느 쪽의 성녀로도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설명을 듣던 시몬이 초조하게 물었다.
"그럼 엄마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
리처드의 입이 달싹였다. 그 또한 아이들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대론 몸이 못 버텨. 이런 방식으로 힘을 억제해 봐야, 길어도 석 달을 넘기긴 힘들 게다."
잔혹한 현실에 시몬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그녀를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리처드의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안나가 일반인으로 돌아갈 때 받았던 '정수 제거 수술'. 그걸 다시 하면 돼. 어떻게든 정화의 성수를 들어내면 잔재만으로는 큰 반발작용이 일어나진 않을 거다."
시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가 그걸 할 수 있죠?"
"처음에 안나를 시술한 귀인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나는 그 수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으로 지켜봐 왔다. 지금도 머릿속에 100%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리처드가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수술은 가능해. 하지만, 암흑연합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가 필요하다."
"신성연방에 있는 건가요?"
"그래. 연방의 성물인 '생명의 나무'."
리처드가 슬쩍 눈동자만 굴려 레테 쪽을 보았다.
"그 나무에서만 열리는 하얀 나뭇잎. 그게 필요하다."
벌떡!
레테가 말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처드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잠시 후. 레테가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2주!"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브로커가 스케쥴을 수정해서 2주 후에는 신성연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대요. 내가 가서 그 재료를 구해오겠습니다."
리처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우리 가족의 일이라네. 이 이상 자네에게 신세를 질 수는......."
"어차피 나 들으라고 한 말이면서, 이제 와서 뭔 소립니까."
레테가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칠흑 붕대로 감싸진 채 위태롭게 숨을 몰아쉬는 안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
그녀의 눈에 진한 결의가 담겼다.
"당신들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 나는 오로지 선생님만을 위해서 갈 겁니다."
"나도 갈게, 레테."
시몬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레테가 "하?" 하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쳤어요? 네크로맨서가 신성연방에 가겠다고?"
"그러는 너도 지금 암흑연합에 와 있잖아. 반대로 못 할 게 뭐 있어?"
그렇게 말한 시몬이 주먹을 꽉 쥐었다.
"엄마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여기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어."
레테가 팔짱을 꼈다.
"그 효심은 갸륵하지만, 지금 연방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심까? 이번 죽음의 마녀 사태로 최고 수준의 경계령은 물론이고, 연방 내에선 이단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이단들 때문에 연방의 어딜 가든 눈이 시뻘게진 이단심문관들이 지키고 있어. 그들에게 들키면 네크로맨서는 즉결처형. 당신을 데려온 나도 에프넬이고 뭐고 일단 목매달고 보겠지."
그녀가 손끝으로 시몬을 척 가리켰다.
"이단심문관이 오면, 어떻게 네크로맨서가 아니라고 증명할 건데요?"
리처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음은 갸륵하지만 지금 신성연방의 상황이 좋지 않아. 이쪽보다 훨씬 경계가 심하다고 들었다."
"안 들킬 자신 있어요."
시몬이 손바닥을 펼쳤다.
"말하는 게 좀 늦었지만."
"?"
그리고 그다음 시몬이 손바닥에서 일으킨 힘에, 레테도 리처드도 경악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시몬이 왼손에 피어난 하얀 빛은 틀림없이 그것이었다.
"저 사실, '신성'을 쓸 수 있어요."
집이 발칵 뒤집혔다.
* * *
레테는 다시 통신 수정구로 브로커에게 연락해서 10대나 20대 초반 남성의 위장 신분을 하나 구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없다는 대답이 들려오면 미련 없이 혼자 갈 생각이었지만, 브로커는 마침 딱 10대 소년의 수습사제 신분이 한 장 남아 있다고 말했다. 수습사제는 이제 막 신성을 개방한 초짜 프리스트를 뜻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안나의 말이었다.
안나가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시몬은 그녀에게 신성을 쓸 수 있다고 고백하고 신성연방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안나는 시몬이 신성연방에 간다는 사실에는 걱정과 우려를, 하지만 신성을 쓸 수 있다는 말에는 기뻐했다.
-시몬의 반은 엄마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시몬이 엄마가 태어나 살았던 곳에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
고심 끝에, 레테는 시몬의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여신님.'
아무리 은인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불순한 존재를 성스러운 땅에 들이다니.
에프넬에 돌아가면 금식 세 달 추가다.
그리고 시몬은 위장 신분인 수습사제를 연기하기 위해, 2주 동안 레테로부터 수업을 듣기로 했다.
두 사람은 시몬이 자주 가던 불탄 집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에 올랐다. 인적도 드물고 장소도 널널해서 수업을 진행하기엔 적격이었다.
'으음.'
걸음을 멈춘 레테는 주위의 자연경관에 살짝 감탄했다.
우거진 초록빛의 들판에 알록달록 아름다운 들꽃이 폈고, 선선한 바람은 꽃향기를 실어날랐다.
암흑연합의 땅은 모두 저주받아서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고 끔찍한 악취가 난다고 배웠지만, 에프넬에서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었다.
신성연방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존한 곳은 잘 없었다.
"잘 부탁해."
시몬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테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네크로맨서에게 백마법을 가르쳐야 하는 꼴이라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래요, 시작하죠."
레테가 시몬의 발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
당황한 시몬이 멀뚱히 있자, 그녀가 표정을 확 구기며 손가락을 내렸다.
"뭐, 구경났냐? 너도 꿇어 임마!"
그 말에 시몬도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짜증스럽게 귀밑머리를 쓸어넘겼다.
"하나하나 알려주는 거 개 귀찮네 쓰읍. 앞으로 나랑 하는 모든 교육에선 이렇게 합니다. 경건한 몸가짐에서 경건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법임다."
"경건한 마음이 신성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아, 당연하죠! 신성은 여신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니까요. 잔말 말고 시작합시다. 상호 인사."
그녀가 꿇어앉은 자세로 두 손은 포개어 배꼽 위에 올리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평소엔 난폭하고 왈가닥인 면이 있는 그녀였지만, 저 몸가짐에서는 높은 기품과 품격이 묻어나 있었다.
시몬은 속으로 조금 놀라며, 눈치껏 그녀의 동작을 따라 했다.
이어서 레테가 기도문을 읊었다. 시몬은 그녀가 하는 대로 손을 모으고 기도문의 내용을 잠자코 들었다.
그렇게 교육에 앞선 의식이 모두 끝났다. 그녀가 눈을 뜨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좀 위대한 여신님 앞에서 경건한 맘이 됐습니까?"
"아니 전혀."
그저 다리가 쥐가 날 것처럼 저렸다. 불편했던 시몬이 다리를 들썩이자 그녀가 와악 하고 소리 질렀다.
"움직이지 마! 대가리 확 까버리기 전에! 에프넬에선 기도 중에 발가락 하나 꿈쩍했다간 바로 무릎 위에 바윗덩이를 쳐올립니다.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알겠슴까?"
"아, 알았어."
이것 참 힘들었다.
암흑연합에서 나고 자란 시몬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허례허식일 뿐이었지만, 저쪽의 문화라니까 존중해 보기로 했다.
"좋아요."
그녀가 팔짱을 꼈다.
"전에 썼던 신성, 다시 보여줘 봐요."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을 펼쳤다. 그러곤 눈에 힘을 주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하지만 레테가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어서 긴장이라도 한 걸까. 갑자기 신성이 나오질 않았다.
"뭐어, 안 되는 게 당연하죠."
그녀가 비웃음을 흘렸다.
"아직 내 마음대로 신성을 컨트롤할 수 없어. 뭐가 문제지?"
"믿음."
그녀가 즉각 대답했다.
"오로지 위대한 여신님에 대한 믿음만이 신성을 일으키는 원천입니다."
"근데 난 여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도 신성을 일으켰잖아?"
"아! 아까는 운이 좋았나 보지 뭐! 지금은 안 되잖아!"
그녀가 꽥 소리 지르고는 검지를 척 세웠다.
"지금부터는 운에 기대지 말고 에프넬의 방식대로 해보십쇼. 이게 공식이고, 근본이고, 진리니까."
레테는 배낭에서 경전을 꺼냈다. 일단은 여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게 우선이라며 줄줄 이야기를 시작했다.
혼돈뿐인 태초에 위대한 여신이 존재했다. 그녀가 빛과 어둠을 만들었고, 대륙을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살 동물들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들은 번영했다. 하지만 여신에게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잔인한 형벌을 받았고, 그녀를 믿은 사람들만 구원받았다.
대충 그런 이야기들.
두 시간 넘게 꿇어앉아서 경전의 초반부를 줄줄 읊어대던 레테가 시몬을 보며 씩 웃었다.
"이제 좀 여신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느꼈습니까?"
"......."
전혀.
전혀 못 느끼겠다.
그런 경전의 구절을 백날 이야기해 봐야 전혀 마음에 안 와닿는다. 위대함보다는 그냥 서사나 신화 속 이야기로 들릴 뿐.
시몬은 여신에 대해 떠올려 보라면 단 하나의 말만 떠올랐다.
-위대한 여신께서 그렇게 하라, 고하셨기 때문이야.
플레마가 키젠에 대한 테러를 일으켰다는 이유.
묘한 적대감만 들 뿐이었다.
"미안, 그런 감정은 전혀 못 느끼겠어."
"하아아."
레테가 이마를 짚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소귀에 경 읽기도 아니고.
네크로맨서를 자리에 앉혀놓고 경전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명심하십쇼."
그녀가 냉기가 쌩쌩 날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2주 동안 내가 원하는 수준의 성과가 없다면 그냥 나 혼자 신성연방에 갈 겁니다. 당신 때문에 나까지 피해 보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알고 있어."
시몬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신성은 여신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슴다."
"믿음."
그러고 보면 칠흑의 운용에는 '의지'가 중요했다.
믿음과 의지는 어떻게 보면 한 끗 차이가 아닐까.
시몬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믿음.
'나는.'
여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나는 엄마를 구한다. 나는 신성을 일으킨다. 나는 신성연방으로 간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뭐든지 해낼 수 있다!'
화아아아아악!
레테가 기겁한 소리를 냈다. 자세에 민감하던 그녀가 다리까지 풀리며 뒤로 넘어갔다.
시몬의 왼손에서 크고 눈부신 신성이 일어나 있었다.
"이제 됐지?"
시몬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전 대륙에서 유일무이.
신성을 쓰는 네크로맨서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