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65화
시몬과 레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간 동안 꿇어앉아 있었더니 시몬은 한 번에 일어나지도 못했다. 다리가 저려서 휘청거리자 레테가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아- 사내새끼가 엄살은, 퍼뜩퍼뜩 못 일어납니까?"
......역시 프리스트답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보수적이었다. 그래도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라 불만을 토로하진 않고 미소를 유지하는 시몬이었다.
"제일 먼저 배워볼 과목은 프리스트의 핵심인 '축복학'. 신의 은총으로 나와 타인을 강화하는 백마법임다."
레테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리고 실습할 축복은 스트렝스. 가장 기본적인 완력 강화의 축복입니다. 우선 이걸로 시작하죠."
레테는 축복학 교재를 꺼내 스트렝스의 마법진이 그려진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곤 신성수식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며 이해시킨 다음, 책을 덮고 나뭇가지로 시몬이 바닥에 똑같이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시켰다. 그 뒤에야 신성으로 마법진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시몬은 모든 정보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인 다음, 시도했다.
'난 뭐든지 해낼 수 있다.'
우우웅!
이제 손끝에서 신성을 일으키는 건 간단했다. 이어서 머릿속에 든 마법진의 구성을 신성으로 그려보았다.
'오오.'
시몬의 손안에서 꿀렁거리는 신성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를 연상케 했다.
단순방출 후 형태변화까지 수년이 걸리는 칠흑과는 달랐다. 신성은 시몬이 생각한 대로 곧장 잘 움직여 주었다.
물론 잘 움직여 주는 정도일 뿐, 이걸로 마법진을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원의 형상까지는 어떻게든 그리겠는데, 신성언어와 내부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후우."
20번째 시도.
이번에도 원을 그린 뒤에 수식에서 실패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요. 믿음이."
옆에서 레테가 연신 훈수를 두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풀밭에 엎드린 채 교재에 뭔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었다.
"그건 뭐야?"
"방학숙제요."
"......."
레테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불만임까?"
"아니. 힘내라고."
시몬도 학생이고 방학 과제가 얼마나 힘든지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버려 두고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레테의 방식은 일반적인 프리스트의 방식이야. 나는 내 방식대로 간다.'
시몬이 생각하기에,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버릇'이었다. 칠흑으로 마법진을 그릴 때의 버릇이 자꾸 자신도 모르게 신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칠흑에는 '기억하려는 성질'이 있다. 간단한 흑마법의 경우, 이름과 메인 룬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알아서 수식까지 줄줄 완성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성은 그런 거 없다. 어느 정도 마법진을 작성하다가 살짝만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려도 마법진은 해제되기 일쑤였다.
'그러니.'
시몬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지를 통으로 구현한다.'
신성은 컨트롤이 자유롭고, 사람의 정신과 긴밀히 연결된 마법인 만큼 칠흑처럼 일일이 하나하나 그릴 필요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완성된 마법진을.'
최대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머릿속에서 마법진을 떠올린 시몬이, 시선을 왼손으로 내렸다.
'바깥으로 끄집어낸다!'
우웅!
손안에 꾸물럭거리던 신성이 넓은 빵 반죽처럼 펼쳐진다. 그 안에 레테에게 배운 신성언어들이 하나둘씩 박힌다.
'모자라!'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상력과 집중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남은 부분은 통찰로 커버해!'
마나나 칠흑이나 신성이나.
마법사나 네크로맨서나 프리스트나.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한 만큼, 마지막에 도달할 진리도 하나다.
마법진 위의 글자들이 느릿하게 움직여 나갔다. 시몬은 키젠에서 배운 지식들을 총동원했다.
신성이 통하도록 활자로 길을 만들고, 숨구멍을 만들어 숨통을 트이도록 한다. 저항이 생기는 부분은 루트를 비틀어준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마법진의 모든 부위에 신성이 통하게 하면 되는 거다.
시몬은 퀴즈 풀듯 마법진을 맞춰나갔고, 마침내.
우우우우웅!
마법진이 완성됐다. 엎드려서 방학숙제를 하던 레테가 깜짝 놀란 토끼눈이 되어 시몬을 바라보았다.
'저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뭐야!'
정말로 마법진을 완성했다.
고작 오늘 백마법을 일으킨 주제에!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작동되는지 시험해 볼게."
시몬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백마법진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
마법진이 시몬의 몸 안으로 빨려드는 감각과 함께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몸에 샘솟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시몬의 몸 주위로 적백색의 꼬리가 휘감기는 게 보였다.
'힘이 넘쳐!'
시몬은 근처에 보이는 나무에 다가가서 칠흑 운용 없이 주먹을 내질러 보았다.
쿠우웅!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시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근력이 올라간 게 확실히 느껴진다.
"해냈어 레테! 나 축복 제대로 쓴 거 맞지?"
"......."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테가 갑자기 등을 돌렸다. 그러곤 손끝으로 바닥을 슥슥 긁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돼? 나도 일주일은 걸렸는데 저걸 하루 만에 만든다고? 그것도 여신을 믿지도 않는 놈이?'
힘겹게 쌓아 올린 믿음을 근본부터 흔드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말을 해줘야 할 레테가 거의 10분간 아무 말도 없자, 시몬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해?"
"......당신을 쥐어 패버리고 싶다는 생각이요."
"새삼스럽네."
시몬이 작게 웃었다.
"다음은 뭘 가르쳐 줄 거야?"
레테가 시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성을 쓰는 네크로맨서.
아무리 안나의 부탁이고 협력자가 필요하다지만, 나는 사실 지금 미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닐까.
저 사람에게 백마법을 가르치는 게, 나중에 에프넬에 정말로 큰 위협으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성인이 되어 전장에서 그와 마주하면, 오늘의 이 일을 후회할까?
"왜 그래? 레테."
"......."
그녀가 한숨을 푹 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같다.
고작해야 인간이고 필멸자일 뿐인 내 편협한 시각으로 여신의 뜻을 읽으려고 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이다.
"신성은 신에게 축복받고 인정받은 자의 힘."
그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틀림없이 여신께서 당신에게 신성을 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함다."
내 판단만으로 여신의 뜻을 곡해하는 실수를 저지를 순 없다. 그게 에프넬에서 매번 배우던 가르침이 아니던가.
"이거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그녀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당신이 여신을 믿건 믿지 않건, 나중에 나와 싸우게 되건 말건, 백마법을 쓸 때는 결코 '정도'를 넘어선 일은 하지 않겠다고."
"응, 약속할게."
후우. 레테는 한숨을 쉬며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슴다."
* * *
시몬은 레테로부터 기본이면서 핵심이 되는 백마법들을 배웠다.
축복학의 스트렝스, 신성역학의 신성화살, 치유학의 힐까지.
이제 막 배운 참이라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기에 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제 시몬은 신성과 칠흑을 둘 다 다룰 수 있게 됐지만, 두 가지의 힘을 동시에 쓰는 건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예를 들어 '체내 칠흑 운용'을 유지하면서 '스트렝스'를 몸에 두르면, 두 힘이 충돌하며 둘 중 하나가 해체되기 일쑤였다.
두 힘의 동시 운용, 더블코어로 싸우려면 이쪽은 이쪽대로 연습을 따로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시몬은 순수하게 백마법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레테도 첫날은 이론 위주로 수업하고 둘째 날부터는 반복연습으로 안정성을 끌어올리도록 유도했다.
'재밌어.'
시몬은 자신의 몸에 스트렝스를 걸고 달리면서 안정성을 높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축복을 걸어놓으면 끝이 아니었다. 꾸준히 축복이 꺼지지 않도록 신성의 운영에 힘써야 했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재미있어 죽겠어!'
시몬이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갑자기 달려가던 속도를 확 높였다. 옆에서 달리던 레테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아, 뭐 해요? 왜 갑자기 뛰고 난리야!"
"그냥 뛰고 싶어서!"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요! 아, 진짜!"
시원한 맞바람에 땀까지 날아갔다. 시몬은 한 번도 축복을 꺼뜨리지 않았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간 뒤에는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몬, 브탄트 마을에 다녀오거라."
"네!"
레스힐 영지에 속한 마을의 순찰 임무. 험난한 산맥에 자리 잡은 레스힐에는 큰 도시가 없었다.
작은 마을 수십 개가 산맥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것을 순찰하는 건 레스힐 후계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시몬."
"일을 무사히 끝내고 오면, 제게 흑마법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바닥을 청소하고 있던 리처드가 눈을 크게 떴다. 지쳐서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레테는 미친놈 보는 듯한 눈으로 시몬을 응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백마법 연습을 하지 않았느냐."
"흑마법 파트도 소홀할 수 없으니까요."
방학이라고 1분 1초도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두 달 동안 시몬은 흑마법과 백마법의 성취를 전부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허허! 어차피 키젠에 돌아가면 좋든 싫든 죽도록 배우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서두르느냐?"
"제가 키젠에 돌아가도 당장은 못 배우는 마법이라서요."
"뭘 배우고 싶지?"
시몬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시체폭발입니다."
크하하하하하!
그 말에 리처드가 미친 사람처럼 쩌렁쩌렁 웃어댔다.
시몬은 깜짝 놀랐다. 리처드가 저렇게 입을 벌리고 웃는 건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그건 2학년 때나 배우는 고난도의 흑마법이지 않느냐."
리처드의 눈에 번뜩이는 전류를 본 시몬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네, 조금 맛을 볼 기회가 있어서 감이 사라지기 전에 완성하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방학이 아니었으면 아론에게 찾아가 가르쳐 달라고 조를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그리고 눈앞에 대단한 네크로맨서가 있는데 그냥 넘어갈 시몬이 아니었다.
"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아비에게 키젠 교수급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곤란해. 그 사람들은 프로 중의 프로야. 가르치는 건 그 사람들이 나보다 몇 배는 뛰어나지."
"알려주시기만 해도 괜찮아요. 부탁드립니다!"
시몬이 고개를 숙이자 리처드가 턱을 슥슥 쓸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다."
그는 본인의 아공간에서 팔찌와 발찌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전부 이그저스트 저주가 걸려 있는 아티팩트들이다. 이것들을 차고 마을을 모두 돌고 온다면 생각해 보마."
"정말이죠?"
"그럼, 당연하지! 하하하!"
시몬은 냉큼 앉아서 저주가 걸린 팔찌를 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레테는 역력히 지친 표정으로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칠흑 붕대에 감싸진 채 누워 있는 안나가 보였다. 안나의 옆에 털썩 앉아 몸을 기댄 그녀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나 선생님. 역시 이 집 남자들은 다 미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