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71화
오늘 바로 신성 열차에 타는 건 아니었다.
새벽부터 산맥 몇 개를 넘고 짐마차에 올라탔다가 텔레포트도 두 번이나 타고, 여독이 많이 쌓여 있었으니 열차 역이 있는 이 마을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
"그냥 이 마을에서 아무 집이나 골라잡으면 됨다."
나란히 걷던 레테가 순백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자기 집에 여신의 사도인 프리스트를 맞이하는 건 큰 은혜이자 영광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민폐가 아니고?"
"아 뭐...... 갑자기 찾아가면 좀 그럴 수도 있나? 근데 여긴 원래 이래요. 당신도 아까 농부들 봤잖아요? 그냥 좀 먹여주고 재워주고 여신의 은총을 받아가면 저쪽도 이득이잖슴까."
시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민폐야. 그냥 조용히 여관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죠."
두 사람은 마을 중앙에 있는 적당히 크고 깨끗해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아래층은 주점, 위층은 여관의 형태를 이룬 곳이었다.
벽에는 온통 십자가나 신성한 문양,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여관과 주점의 느낌보다는 경건한 가정 예배당에 온 기분이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즐기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몬과 레테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손님이 많아 바쁜지 복슬복슬한 수염의 여관주인이 음식들을 세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라우스(Laus)!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혹시 빈방 있나요?"
시몬이 인사했다. 정신없이 커다란 음식을 옮기던 여관 주인이 곁눈질로 두 사람을 대충 훑어보고는 말했다.
"남녀 두 명? 큰 침대로 한 방이면 돼?"
"이게 미쳤나."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레테가 으르렁거렸다.
웃차! 소리를 내며 음식을 내려놓은 주인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어허, 젊은 친구가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입이 험......."
뒤늦게 여관주인의 시선이 제대로 레테에게로 향했다. 성의포로 제작한 그녀의 하얀 교복을 본 순간, 그의 입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쩍 벌어졌다.
"라, 라, 라, 라우스(Laus)!"
여관주인이 우당탕 카운터 밖으로 뛰쳐나와 즉시 레테의 발밑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댔다.
"사제께 위대한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무슨 소란인가 싶어서 돌아보던 손님들도 일제히 라우스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다니까."
레테가 한숨을 푹 쉬며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다들 고개 드십쇼."
여관주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에, 에프넬의 프리스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됐고, 여기서 제일 좋은 방 두 개. 나랑 이 인간이랑 최대한 떨어진 방으로 부탁드림다."
"예, 옙!"
여관주인이 후다닥 방을 치우러 올라갔다. 주방에 있던 그의 가족들도 라우스를 외치며 튀어나와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하고는 요리를 가져왔다.
주문도 안 했는데 요리가 오는 건 다른 손님들에게 가야 할 요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단 거였다.
레테가 말했다.
"식사는 아까 했슴다. 이것들은 원래 주인들에게 가져다주세요."
"네, 네!"
그런데 이번엔 주위에서 왁자지껄하게 술을 즐기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레테의 눈치를 보느라 술을 마시지 못했다. 프리스트 앞이라고 뜬금없이 기도하는 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봤죠?"
레테가 턱을 괴며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그냥 아무 집에나 들어가자니까. 그럼 그 사람들에게만 민폐 주면 되는데, 지금 우리가 와서 대체 몇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거예요?"
"......."
"연방에 왔으면 연방의 문화대로 하는 게 우리나 저쪽이나 좋아요. 앞으로는 내 말을......."
그때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밤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레테에게서 시몬으로 향했다. 당황한 레테가 입을 뻐끔거리며 손짓 발짓으로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시몬은 내게 맡기라는 듯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수습사제 스카 세라피노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 말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모으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분위기를 휘어잡은 시몬이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내용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했다.
건강.
행운.
그리고 행복.
시몬이 운을 뗄 때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라우스를 중얼거렸다.
아늑한 목소리로 기도를 마친 시몬이 손바닥을 내렸다.
"즐거운 밤입니다. 여신께서 내려주신 포도주와 음식으로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건 거창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이고, 습관이죠. 이 여신의 은혜에 충실하는 것도 하나의 믿음이 아닐까요?"
시몬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신도들이 오늘 밤을 충실히 여신이 내려주신 은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사제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레테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눈치 보지 않고 놀게 해달란 소리. 그 짧은 시간 안에 신성연방의 언어들을 습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녹여내어 현지민들을 휘어잡았다.
세 치 혀만으로 사람들의 분위기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모습은 정말로 수습사제 같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잘해. 열차에서 이단 심문관에게 들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네.'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허락하겠슴다."
레테가 그렇게 말하며 와인잔을 들었다.
"여신의 은총에 감사하며."
""은총에 감사를!!""
모두가 후창하며 술이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풀리고 다시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비로소 레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웃고 즐기며 활기찬 분위기로 돌아왔다.
시몬이 자리에 앉아 말했다.
"어때?"
"......쩝, 잘하긴 하네요."
레테도 2주간 시몬의 노력을 옆에서 봐왔으니 더 뭐라 하진 않았다.
"근데 진짜 여신님도 안 믿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잘하는 검까?"
"건강, 행운, 행복. 신앙은 아니어도 인간의 보편적인 진심은 통하니까."
시몬도 사제 노릇의 첫 스타트를 잘 끊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인이 내려와서 청소가 끝났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지쳐 있던 레테는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고, 시몬은 혼자 물건을 사러 갈 게 있다며 레테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녀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시몬을 훑다가 이내 베개로 얼굴을 묻어버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딱 물건만 사고 돌아와요."
"알았어."
아까 1층에서 레테에게 점수를 따둔 게 좋게 작용한 것 같았다. 시몬은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부는 여관 밖으로 나왔다.
'일단은 자금 확보부터.'
시몬은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마을의 골동품상으로 갔다. 그곳에서 브로커에게 넘겼던 것과 비슷한 고대 동전을 주고 현금으로 바꿨다.
동전의 가치가 브로커에게 줬던 것보다는 낮았지만 그럭저럭 방학 동안 신성연방에서 지낼 돈은 챙겼다.
신성연방의 화폐 제도는 오로지 '블랑'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대략적인 화폐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1골드 = 10만 블랑.
1실버 = 100블랑.
방금 동전을 2천만 블랑으로 교환했으니 암흑 연방의 200골드 정도다. 이 정도면 아주아주 넉넉한 여행자금이었다.
"이 마을에 시장은 어디 있나요?"
"아! 지금 시간이라면 야시장이 열렸을 텐데. 저기 길 쪽에 가봐요."
"감사합니다!"
시몬은 자연스럽게 주민들 사이에 섞였다. 가끔 자신이 네크로맨서라는 자각을 할 때마다 신성연방에 와 있다는 사실에 묘한 스릴감도 느꼈다. 물론 아까 여관에서도 그랬듯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 뭐.'
암흑연합이나 신성연방이나 너무 적대감이 강해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성연방에서는 암흑연합을 사악한 악마들이 점령해서 저주를 받은 땅이라고 교육시켰다.
국토의 90%가 여신의 은총을 받지 못해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둥, 곡식은 물론 풀 한쪼가리 자라지 않는다는 둥, 국민들의 대부분이 좀비로 변했으며 문란한 행위를 일삼는 악의 구렁텅이처럼 묘사했다.
암흑연합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신성연방을 부패한 성직자들이 여신을 위해서라며 일반인들을 죽을 때까지 착취하고 쥐어 짜내는 곳으로 묘사했다. 길거리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지만, 역시 그런 광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실 서로 와보면 그 이야기가 틀렸단 걸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와아.'
야시장에 도착했다. 밤인데도 이국적인 환한 조명이 곳곳에 켜져 있고 수많은 노점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낯선 이방인인 시몬은 여행하는 기분을 제대로 느끼며 불빛이 가득한 시장을 돌아다녔다.
'일단 사야 할 게.......'
시몬은 진열된 노점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라우스! 여신의 가호가 모험가에게 함께하시길. 찾으시는 물건이 있나요?"
신성연방의 상인들은 시끄러운 호객행위가 적은 편이었다. 대신 걸음을 멈추고 물건을 살피면 바로 달려와서 인사를 걸고, 고객의 인사를 받아낸 다음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건 얼마예요?"
시몬이 꺼내든 건 얼굴 전체를 가리는 탈이었다. 흰 바탕에 눈주름과 뺨을 기아학적인 검은 무늬로 덮고 있었다.
시장을 쭉 둘러보니 이렇게 생긴 가면들이 꽤 많았다. 이걸 사 가도 누가 샀는지 모두 조사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5,000블랑입니다!"
대략 50실버 정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어떤 걸로 할까.'
비슷한 디자인이 많아서, 시몬은 어떤 색상으로 할지 고민했다.
* * *
난다.
냄새가 난다.
남자가 냄새를 맡은 건 삼십 분 전, 그는 홀린 것처럼 발걸음을 돌려 야시장으로 들어왔다.
'.......'
시장에는 사람이 많다.
사람이 많으면 냄새도 섞인다.
하지만 살짝 탄내가 감돌면서도 꾸린내가 나는 이 지독한 악취는, 수많은 냄새 속에서도 선명했다.
'칠흑의 냄새.'
남자는 걸었다.
시각이 아니라, 후각에만 의존해 걸었다.
그러다 몇몇 사람들에 부딪혔고, 사람들은 짜증을 내거나 고함을 질렀지만 남자는 무시했다. 미친놈처럼 냄새에만 몰두했다.
정신없이 야시장을 걷던 남자는 킁킁하고 코를 벌렁거렸다.
칠흑 특유의 탄내.
그리고 시체 냄새.
남자는 확신했다.
'네크로맨서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
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냄새가 진해.'
탄내가 코를 찌른다.
이곳이 맞다.
급히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지? 놈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리고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남자의 옆으로는, 인파에 섞여 노점에서 가면을 고르고 있는 시몬이 있었다.
맘에 드는 가면을 선택한 시몬이 값을 지불한 다음 걸어갔다.
"너."
덥석!
남자가 급히 뛰어들어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그러나 남자가 잡은 건 방금 지나가던 시몬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덩치였다. 갑자기 멱살을 잡힌 덩치가 인상을 구겼다.
"뭐, 뭐야? 이 새끼."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덩치의 옷을 확 잡아당겨 찢어버렸다. 그러곤 그의 맨살에 코를 처박았다.
킁킁킁.
코가 벌렁거리며 왼쪽 가슴의 냄새를 맡는다.
탄내가 아니다.
그냥 찌들고 고약한 땀 냄새뿐. 구역질이 올라온.......
쩌어어억!
덩치의 주먹에 얻어맞은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다. 덩치가 질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 미친! 뭐야? 이 정신 나간 또라이 새끼는!"
웅성 웅성 웅성.
시장 사람들이 물러나며 두 사람을 중심으로 원을 만들었다.
"뭐야, 싸움이야?"
"와, 저 사람 몸집 봐."
덩치가 손가락 관절을 풀며 흉악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망할.'
비릿한 피 맛이 코까지 올라오며 냄새를 놓쳤다.
다 잡은 네크로맨서를 놓쳐 버리자, 갑자기 짜증이 울컥 몰아쳤다.
"여신이시여."
남자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성호를 그렸다. 그러곤 작고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중얼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심판의 때를 기다렸나이다. 오늘도 그대의 피조물을 여신의 품으로 보내옵나니, 그의 형벌이 가벼우면 품에 안으시옵고, 형벌이 무겁다면 영겁의 지옥으로 처넣으시옵기를."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아직 덜 맞았냐?"
덩치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주위의 인파들이 빠르게 좌우로 갈라졌다. 이내 덩치가 함성을 지르며 주먹을 날렸다.
터업.
온 힘을 다해 날린 덩치의 주먹이, 들어 올린 남자의 손에 가볍게 막혔다.
덩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무리 힘을 써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먹이 빠지지도 않는다.
우득!
"끄, 끄아아아아악"
덩치의 손등과 손목이 키스했다. 남자가 손을 놓자, 덩치는 관절이 나가 버린 손목을 붙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너."
남자가 쪼그려 앉았다.
"이단이야?"
바로 그 한마디에, 덩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틀어막거나 비명을 질렀다. 멀리 떨어진 사람은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치기까지 했다.
"너 때문에 놈을 놓쳐 버렸잖아. 일부러 그런 거지? 그놈과 무슨 관계냐?"
남자의 등 뒤로 아공간이 열렸다.
철컹! 툭! 쿠웅!
고문 바퀴, 절단기, 고문대, 대형톱, 철퇴, 가시 메이스, 형틀 등 무수한 고문도구들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단심문관 메틴."
그가 가시가 삐쭉삐쭉 솟아 있는 메이스를 손에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단 심문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