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76화
열차 여행 4일 차.
이제는 목적지까지 단 하루만 남겨 놓고 있었다.
그사이에 이런저런 많은 일이 있었다.
시몬은 대낮부터 온종일 낮잠을 자보기도 했고, 엘렌까지 껴서 셋이서 카드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다른 객실에서도 게임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찾아와서 일곱 명이 같이 놀기도 했다.
열차가 역에서 정차하면 밖으로 나와서 힘껏 스트레칭을 했고, 여러 음식들을 사 왔다. 신성열차에서 나오는 음식들도 무난했지만 슬슬 질리던 차, 역에서는 훨씬 맛있고 양도 푸짐한 도시락을 구매할 수 있었다.
역마다 특산물 등으로 차별화를 둔 음식을 먹어보는 재미도 상당히 쏠쏠했다. 신성연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행의 맛이었다.
조금 더 열차 문화를 즐겨보고 싶었던 시몬은 3등실에도 가서 그곳의 여행객들과 어울렸다. 문화는 다를지언정 다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시몬은 특유의 싹싹한 친화력으로 누구와도 금방 친해졌다. 이제는 시몬이 지나가면 아저씨들이 이거 마시라며 럼주부터 들이대곤 했다. 과음 이후 비몽사몽 해져서 객실로 돌아와 책상에 엎드리자, 레테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등을 두들겨 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단 심문관 메틴.
레테에게 끌려가 맞은 이후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시몬을 심문했다. 그때마다 옆에서 레테가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중간에 낀 선배 심문관들의 입장만 난처해졌다.
결국 선배들이 알아서 메틴의 심문을 끊고 데려가는 일이 빈번했다.
레테의 분노가 무섭기도 했지만, 사실 심문관들 사이에서도 독실하고 예의 바른 시몬의 평판 자체가 상당히 좋아진 상태였다. 이제 메틴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야, 야! 인상 풀어 신참."
고작 두 개 질문을 던지고 선배들에게 끌려가는 때에, 선배 심문관이 메틴의 목에 어깨를 두르며 유쾌하게 말했다.
"설령 저 친구가 진짜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이 정도면 인정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저렇게 독실한 친구는 연방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
"......."
그 말에 메틴이 물끄러미 선배 심문관을 바라보았다.
이 선배의 이름은 오델. 4년 차 이단 심문관으로서 팀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선배는."
"음?"
"네크로맨서에 대해서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비꼬는 말이었지만 오델은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아, 당연하지! 내 직업이 그런 것들 때려잡는 건데!"
"네크로맨서는 고인을 능욕하고, 시체에 성적 욕구를 느끼며, 재미로 테러를 일으키는 끔찍한 족속들입니다."
오델이 메틴의 정수리를 가볍게 붙잡더니 좌우로 강하게 파바박 쓰다듬었다.
"윽, 아픕니다!"
"뭐어~ 그 새끼들의 취향은 나도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지만 말이야. 막 도시에 테러를 일으키고 나쁜 짓 하는 놈들은 아주 극단적인 놈들이야. 더 쉽게 말해줄까? 그냥 '그럴 놈들만 그런다'고! 저 성실하고 착한 친구가 막 테러를 저지르고 나쁜 짓을 할 놈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냥 '네크로맨서'라서?"
"......."
그 말에 찰나라도 각오가 흔들리는 걸 느낀 메틴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쁜 짓을 하든 말든, 네크로맨서는 그 존재 자체로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오델이 낄낄 웃었다.
"그래, 그래. 내가 너 같은 독실 청년에게 무슨 납득을 구하고 있냐. 결론은 융통성을 가지란 거야."
어느새 열차의 전면에 있는 심문관 휴게실까지 도착했다. 문 앞에서 선 오델이 메틴의 어깨를 탁탁 털어주며 말을 이었다.
"일반인 중에서 여신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 자기들 삶은 이렇게 피폐한데, 아무리 여신께 기도해도 하늘에서 빵조각 하나 안 떨어지잖아? 그런 주제에 수도원에서는 교회세니, 십이조(十二條)니, 맨날 세금만 거두고 말이야. 그렇게 여신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 다 이단이라고 처넣으면, 농사지을 사람 없어서 연방 전체가 말라 비틀어 뒤질 거다."
"......."
"자, 자, 잔소리가 많았네. 들어가자!"
두 사람이 문을 열고 심문관 휴게실로 들어왔다. 대장인 바카라를 포함해 다섯 명의 남자들이 떠들썩하게 웃고 있었다.
"오, 신참! 오늘도 그 친구한테 털리고 왔냐?"
"죽상인 거 보니 확실하네!"
"하하하하!"
메틴은 그런 소리들을 무시하며 끝자리에 털썩 앉았다. 바카라가 "그만, 그만" 하고 선배들을 제지했다.
"수고했다. 오델, 메틴."
"넵, 대장!"
오델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
메틴은 깍지를 낀 채 고개만 까닥했다. 몇몇 선배 심문관들이 그의 태도를 지적했지만 이번에도 바카라가 제지했다.
'신성열차에서 꿀이나 빠는 놈들이 뭘 안다고.'
메틴은 이곳의 선배들이 못마땅했다.
메틴과 그의 원래 동료들은 최전선의 분쟁지대를 담당했었다. 그곳은 암흑연합의 선전 활동에 물들어 네크로맨서 추종자들과 이단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의심되는 사람이라면 닥치고 심문부터 해서 일벌백계로 기강을 세우고 질서를 만들어야 했다. 안 그러면 잡혀 죽는 건 자신들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열차를 담당하는 심문관들은 평화로운 후방 관할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우유부단했다.
성격만 좋은 대장 바카라부터, 네크로맨서를 옹호하는 오델까지. 다들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 자."
오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
"오늘 일정도 다 끝났고, 어제가 성축일이었는데 그냥 넘겼잖습니까! 오늘 가볍게 한잔 정도는 마셔야죠!"
데바교의 성축일은 수도원에서 만든 레드와인을 마시며 여신께 기도하는 풍습이 있었다. 오델은 그렇게 말하며 본인의 가방에서 최고급 와인을 꺼냈다.
"반야드 수도원에서 가져온 놈입니다! 17년산이죠."
"히야! 비싼 브랜드 아냐?"
"좋지 좋아! 우리도 사제인데 성축일 기념은 해야지."
분위기가 떠들썩해졌다. 오델이 최고급 와인을 한 잔씩 따라서 넘겼다. 메틴은 거절했지만 선배들의 시선과 강압에 마지못해 받았다.
"사라는?"
바카라가 물었다. 그녀는 이 열차 심문관팀의 홍일점인 여성 심문관이었다.
"평소처럼 일 끝나자마자 여성 객실에서 자고 있죠 뭐. 사라는 술 입에도 못 대잖아요."
"우리끼리 깔짝 하고 끝내자고."
의견이 맞춰졌다. 와인의 주인이었던 오델이 잔을 들고 기도를 올렸다. 모두가 눈을 감고 오델의 기도를 들었다.
"위대한 여신의 은총에 감사하며! 라우스!"
"라우스!"
다들 힘차게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곳곳에서 감탄성이 튀어나왔다.
"크으! 맛 좋다!"
"좋네. 근데 이거 약간 목구멍이 타는 느낌이......."
이질을 자각하는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어?"
심문관들이 고개를 내렸다. 그들의 가슴에 시뻘건 뭔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기차의 벽이 살아 있는 살점처럼 붉게 변했고, 그 벽에서 가시가 솟아난 것이다. 와인을 삼키는 순간 몸이 굳어져서, 피하거나 방어막을 펼치지도 못했다.
쨍!
홀로 서 있던 오델이 히죽 웃으며 손에 쥔 와인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와인이 바닥을 피처럼 붉게 만들었다.
"너......!"
바카라의 동공이 떨렸다.
"오델이 아니었......!"
푸욱! 푹! 푹!
오델의 손짓에, 벽에서 무수히 많은 가시들이 튀어나와 바카라의 몸을 꿰뚫었다.
"당신이 여기서 가장 까다로우니까 확실히 죽여놔야겠어. 그런데."
오델이 고개를 돌렸다.
"넌 어떻게 눈치챘지? 신참."
다섯 명의 이단 심문관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가운데, 유일하게 자리에 반쯤 일어서서 가시를 붙잡은 심문관이 있었다.
"네놈에게선 신성도, 칠흑의 냄새도 흐릿해. 그냥 피 냄새만 나."
메틴이 코를 벌렁이며 말했다.
"다른 냄새를 다 묻어버릴 정도의 지독한 피 냄새. 이런 냄새는 희대의 살인귀들에게서나 나는 건데, 그런 것치고 당신은 너무 멀쩡하게 행동했어."
"흠, 그 냄새 어쩌고 하던 게 개소리가 아니었나?"
사실 메틴은 오델이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점을 다른 선배들에게 어필했었다. 하지만 시몬 사태로 신뢰를 잃은 그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부 최전선 이단 심문관 메틴."
우우웅!
메틴이 두 팔을 벌렸다. 아공간이 열리며 고문도구들이 바닥에 떨어지거나 그의 몸에 장착되었다.
메틴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지금부터 이단 심문을 시작하겠다. 순순히 정체를 드러내라."
"마지막 선물로 그것도 좋겠지."
화아아아아아악!
그의 몸에서 지독한 기운이 일어나며 상의가 찢어져 나갔다. 찢겨나간 맨 상체에서 붉은 문양이 온몸에 칠해진 게 보였다.
"내 이름은 알로켄."
오델이 얼굴에 붙어 있는 생체 얼굴을 잡아 뜯자, 눈이 길게 찢어진 중년 남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혈천교의 주교다."
* * *
싸움은 2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메틴이 벽에 부딪힌 채로 쓰러졌다.
"약해."
방해도 되지 않았다. 알로켄은 이를 드러낸 채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 심문관 휴게실 다음에는 승무원실이 있고, 그다음에 기관실이 있었다.
알로켄이 객차를 건너와 문을 열자 한참 식사를 준비 중이던 승무원들이 깜짝 놀라며 동작을 멈췄다. 알로켄이 팔을 올렸다.
퍼억! 퍽! 퍽!
무슨 원리인지도 모를 힘에 승무원 몇몇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다.
"꺄아아아아!"
"입 닫아라."
서늘한 알로켄의 말에 살아남은 승무원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달달 떨었다. 알로켄이 손을 휘젓자 피로 이루어진 올가미가 날아가 승무원들의 목을 휘감았다.
"크윽!"
올가미들을 움켜쥔 알로켄은 바로 기관실로 향했다. 승무원들이 괴로워하며 질질 끌려갔다.
기관실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알로켄이 철문에 손바닥을 대자 선혈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철문을 박살 냈다.
"허억!"
기관장이 기겁하며 앉아 있던 자리에서 넘어졌다.
알로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관실 중앙에는 무척이나 복잡한 영구 신성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마법진에 신성을 공급하는 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금부터 이 열차 전체는 혈천교의 제물이다. 심문관들은 모두 죽었으니 저항은 포기해라."
그 말에 기관장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혈천교라니! 최근 대량학살을 일삼고 다니는 바로 그 미치광이 이단이 아닌가.
"열차의 방향을 돌려라. 기관장."
알로켄이 덜덜 떨고 있는 기관장의 발 앞에 지도를 떨어뜨렸다.
"운행 속도를 줄여서 지도에 표시한 C지점으로 가도록."
기관장이 지도를 보자 정말로 붉은 글자로 'C'라고 적힌 지점이 있었다.
"이, 이쪽은 이미 쓰지 않아서 폐허가 된 철로요! 그쪽으로 열차를 보냈다간......!"
"이미 철로는 우리가 복원해 두었다."
알로켄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기관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나보고 승객들을 위험에 빠뜨리란 말이오? 절대 그럴 순 없......."
퍽!
기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로켄의 손이 뒤로 향했다. 그가 끌고 온 승무원 한 명이 퍽! 소리와 함께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다.
"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기관실을 흔들었다.
"시간 끌 때마다 한 명씩 죽이겠다."
퍽!
두 번째 승무원의 몸에서 피가 터지며 축 늘어졌다.
"이 녀석들 다음에는, 객실의 승객들까지 데리고 와서 전부 네 앞에서 터뜨려 죽여주마."
퍽!
세 번째 승무원의 몸이 터졌다. 기관장의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알로켄이 마지막 승무원에게로 팔을 뻗었다.
"제발! 어허엉! 흐윽! 기관장님! 살려주세요!"
마지막 남은 승무원이 울먹이며 애원했다.
기관장도 눈물을 쏟았다. 이 살인귀는 진심이다. 결국 이곳의 모든 승무원이 희생되어도 정말로 다른 승객들까지 끌고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소."
결국 기관장이 자리에 앉아 신성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잠시 후 속도가 느려진 신성열차가 C 구간의 궤도로 무사히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알로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해."
퍽! 퍽!
기관장과 승무원도 몸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다.
이제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큰 소리로 웃으며 통신 수정구를 꺼냈다.
"계획대로다. 시작해라."
* * *
"모든 건 계획대로네요~"
디저트로 나온 크림 케이크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레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임다. 역에서 내려서 쭉 올라가면 생명의 나무가 나와요. 이제 안나 선생님을 구할 수 있겠네요."
"......."
레테가 말을 멈추고 시몬을 보았다.
"뭠까? 그 심각한 표정은."
"......이상한 냄새 안 나?"
레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도 그 메틴인가 하는 놈한테 전염된 겁니까? 냄새는 무슨."
"피 냄새."
그 말에 레테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