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183화 (183/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83화

기밀문서를 읽어볼수록 시몬은 기가 막혔다.

혈천교의 목적은 노예도, 산 제물의 확보도 아니었다.

최종목적은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간의 전쟁.

'아무런 목적성도 없는 미치광이 이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었구나.'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양 세력 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 피차 전쟁의 명분이 맞춰지기에는 퍼즐 한두 조각이 부족해서 성사되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여기서 혈천교의 열차납치 이슈가 터지고, 그 배후가 키젠과 암흑연합의 네크로맨서들이라는 사실이 연방 전 지역에 보도된다면?

네크로맨서에 대한 적대심과 전쟁 여론은 극도로 들끓을 테고, 그때는 천하의 교황이라고 해도 전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진짜 전쟁이 날지도 모르겠네요."

옆에서 같이 문서를 보던 메틴도 같은 생각인 듯 침음을 흘렸다.

"문서를 보면 혈천교에서 일부러 심문청장에게 정보를 흘려서, 그로 하여금 본부를 덮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심문청장은 가장 극단적인 전쟁파 중 한 명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번 일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키려 들겠죠.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입니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사람인가요?"

"예."

모든 이단 심문관의 보스, 심문청장 레이트는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양쪽 모두에서 악명으로 이름 높았다.

젊은 시절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네크로맨서들을 붉은 십자가에 매달았던 자비 없는 전쟁광. 심문청장 자리에 오른 지금에는 매년 수백명의 연방민들을 마녀사냥으로 불태워 죽이는 과격파였다.

설명을 듣던 시몬이 턱에 손을 올렸다.

"어디까지나 만약인데요. 그 레이트란 분에게 이 문서를 증거자료로 제출하면......."

메틴이 고개를 저었다.

"청장님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서는 바로 불태워 버릴 거고, 입을 막는답시고 우릴 죽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네요."

"......끙."

메틴의 말이 사실이라면 설득은 불가능해 보인다.

시몬이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메틴은 문서를 내려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은 저도 어느 정도의 전쟁은 필요하다는 주의였지만."

메틴이 시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이 일으킨 그 '기적'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난 너무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드네요."

시몬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이내 억지웃음을 꾸며내며 성호를 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제님! 하하!"

그런 시몬의 반응에 메틴은 픽 웃었다. 정체는 철저하게도 숨기는군.

시몬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심문청장이 사건 현장을 덮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증거자료를 언론에 알리는 건 어떤가요?"

메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타이밍 싸움이었다.

레이트의 수작으로 네크로맨서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가 팽배해진 뒤에, '사실은 모두 혈천교의 흉계였답니다!' 하고 뒷북치면 너무 늦는다.

전쟁 이슈에 묻혀 버리거나 자질구레한 음모론 취급이나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혈천교 기사를 써서 놈들이 신성연방과 암흑연합을 싸움 붙이려 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인식에 박아놓으면, 이후에 레이트가 네크로맨서 혐오를 조장하는 기사를 써도 파장이 적다.

혈천교의 의도대로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는 반항심리가 생성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계획에서 한 가지 리스크가 있다면, 신성연방의 언론은 에프넬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기사든 에프넬의 허락을 받고 써야 하므로 작성에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 레이트가 손을 써서 기사가 반려될 위험도 있었다.

"다 됐다!"

그때 레테가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그녀가 만지고 있던 신성 마법진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더니, 열차의 차체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조종할 수 있는 거야?"

"물론임다! 조금 느리겠지만 후진도 가능해요. 그보다 조사는 어떻게 결론 났슴까?"

시몬은 그동안 알아낸 정보들을 레테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이번 사건은 혈천교가 두 세력 간의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벌인 짓이었고, 이 사태를 수습하러 올 인물도 극단적 전쟁파인 심문청장. 이란 검까?"

"맞아."

"......."

그녀가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언론을 이용하는 건 동의함다. 하지만 내 생각엔, 뭣도 영향력 없는 우리가 이 자료를 언론에 제출하는 것보다는 영향력이 있는 인물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영향력 있는 인물?"

"예. 내가 아는 지인에게 연락해 보겠슴다. 에프넬과 언론사 모두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누구보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인물이에요. 이 정도면 괜찮죠?"

레테가 통신 수정구를 품에서 꺼내 조작하기 시작했다.

치직!

잠시 후 통신이 연결되자 레테가 극도로 정중하게 말했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레테 샤르데나입니다."

시몬은 깜짝 놀랐다.

저건 고위 프리스트에게 하는 인사였다.

* * *

"그래, 알겠다."

달칵.

통신수정구를 내려놓은 남자가 옅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조명 하나 없는 방. 창가에 커튼을 쳐서 사무실은 극히 어두웠다.

그리고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는 실내에서도 중갑옷으로 무장하고 몸 곳곳에 무기들을 차고 있었다. 오른눈은 흰자만 보였고, 짧은 검은 머리에 고집스럽고 굳센 인상이었다.

"때가 왔다."

그의 말에 기립하고 있던 측근이 말을 받았다.

"혈천교 놈들이 열차를 납치했다고 합니까?"

"그래."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네크로맨서를 죽였다고 알려진 남자, 심문청장 '레이트'였다.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혈천교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심문청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자신들은 모두 몸을 피한 뒤에, 이단 심문관들을 불러들여 증거를 수집하도록 하는 게 계획의 골자였다.

하지만 그들이 심문청에 정보를 흘리기도 전에, 심문청장 레이트는 이미 자신만의 정보 루트로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모든 상황은 레이트의 손안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건방진 놈들."

그가 입꼬리를 울렸다.

"우릴 이용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리가 놈들을 이용한다. 내일 새벽 급습으로 혈천교를 남김없이 치우고, 전 언론사에 혈천교의 배후에 암흑연합이 있다고 알릴 것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 내가 직접 에프넬로 올라가서 교황 성하를 알현하겠다."

"예! 빈틈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레이트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커튼이 걷히며 창가로 빛이 들어왔다.

"끄으으......."

어둠이 걷히자,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붉은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몸엔 커다란 못이 틀어박혀 있었고, 손톱과 혀가 뽑혔으며, 달구어진 쇠로 생살을 지진 흔적이 보였다. 사람들의 눈에는 총기가 없었고 삶에 대한 일말의 의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5415번. 자백했습니다."

"수고했다."

레이트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심문관들이 피범벅이 된 사람들을 질질 끌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이들은 신성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처형당하고, 비로소 고문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그들이 끌려간 뒤에는 긴 핏자국만이 남았다.

"드디어."

레이트가 몸을 일으켰다. 삼 미터가 넘는 거구가 우뚝 솟아올랐다.

"전쟁의 때가 다가오는구나."

그가 흰자만 남은 오른눈을 매만졌다.

네프티스에게 당한 상처. 이제 곧 그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일 때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아아아악!

그의 등 뒤에서 폭발적인 신성이 일어났다. 기립하고 있던 심문관들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이게 바로 소문의......!'

레이트의 신성은, 이단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에 한정해서, 레이트의 신성은 그에게 '무한'을 부여했다. 수백 수천의 전장을 넘나들고도 그는 지치지 않았다. 무한히 공급되는 신성으로 끝없이 일어나고 부활해 무수한 네크로맨서를 때려잡았다. 언제나 승리는, 마지막까지 서 있는 그의 차지였다.

"내년까지 대륙에 남아 있는 모든 악의 존재들을 쳐죽일 것이다!"

신성은 여신의 뜻.

여신의 뜻은 전쟁이다.

"처형을 준비해라! 십자가를 깎아라! 그 위에 붉은 칠을 해라!"

그가 입을 찢었다.

"올해, 목수들은 바빠질 것이다."

* * *

날이 어두워졌다.

레테가 기껏 마법진의 조작법을 알아내 열차를 후진시켰지만, 얼마 안 가 멈췄다.

문제는 연료 부족. 치열한 전투 중 열차기관에 연료를 채워 넣는 파이프가 망가졌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메틴은 승객 중에서 건장한 남자 몇 명을 뽑아 함께 수작업으로 연료를 충전했다. 관련 지식들을 아는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하는 바람에 시행착오가 꽤 있었다.

연료가 충전되는 사이, 어둠이 찾아오고 밤이 되었다.

연료가 찰 때까지는 멈춘 열차 안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혈천교의 공격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승객들은 몸을 떨었다.

레테는 열차 내에 싸울 수 있는 프리스트와 클레릭들을 뽑아서 임시 자경단을 조직했고, 창고에 남은 식량을 분배해서 승객들의 주린 배를 채우도록 했다.

아직 공격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시몬과 레테, 엘렌은 벽이 휑하니 뚫린 빈 객실에 앉아 바깥을 주시하면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물우물.

레테는 사실 먹성이 좋은 편이었다. 정신없이 스테이크 한 그릇을 해치운 그녀가 옆의 도시락까지 뜯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그분과 또 통화했는데, 직접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하네요."

시몬의 눈이 커졌다.

"어, 진짜? 여기 오신다고?"

"저도 깜짝 놀랐슴다. 워낙 바쁘고 엉덩이가 무거운 분이신데, 사태가 심각한 것 같다면서 바로 달려오겠다고 하시네요."

이야기하는 레테 본인도 정말로 의외라는 투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시는 건데?"

"초고가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남발하면서 오고 계심다. 본인 눈으로 직접 상황을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그래서 저는 열차를 출발시킨 다음에, 혈천교의 본부 근처에 텔레포트 유도 마법진을 깔러 가야 함다."

열심히 음식에 집중하던 엘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그건 너무 위험해요! 그 끔찍한 이단들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쩔 수 없슴다. 제가 부른 분이니까 제가 책임져야죠."

"나도 같이 갈게."

시몬의 말에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겠슴까? 그럼 이번 일만 끝내고 바로 생명의 나무로 이동하죠.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시몬이 잠시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엘렌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쭉 밀었다.

"레테 레테! 근데 둘이 무슨 사이에요? 죽이 착착 맞네?"

"닥쳐요. 턱주가리를 코뼈까지 들어 올려줄까?"

"히잉, 레테는 나한테만 너무 차가워!"

레테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 사이도 아님다."

그 대답이 오히려 엘렌에게 불을 붙였다. 그녀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에이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구요? 네크로맨서인 시몬을 여기까지 데려오는 일은 레테도 목숨을 걸어야 하잖아요! 상식적으로 생판 남을 위해 목숨을 걸 수가 있나?"

레테가 눈을 치켜뜨며 또박또박 정정했다.

"내게 있어 은인이신 분의 목숨이 걸린 일이고, 그분의 아들이 협력자로 온 것뿐임다."

그렇게 대답하던 레테가 나는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나 생각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빤하다 빤해. 철 좀 드십쇼. 우릴 뭘로 엮고 싶어 하는지 알겠는데, 니가 원하는 그런 즐거운 그림 아니에요."

"그런가?"

엘렌이 쿡쿡 웃었다.

"그럼 오늘 내가 시몬한테 고백해도 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