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93화
시몬과 카미바레즈는 사람이 많은 분수대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죄송해요 시몬!"
카미바레즈가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보랏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시몬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나, 난 정말 괜찮아! 다친 데도 없고."
"그래도 죄송해요. 보는 눈이 많으면 자제하실 줄 알았는데...... 아빠가 너무 부끄러워요."
그녀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시몬이 부드럽게 말했다.
"조금 장난기가 많으신 것뿐이야.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자, 장난기요? 방금 시몬은 죽을 뻔했어요!"
그녀가 경악하며 말했다.
'글쎄. 그 사람이 진심으로 죽이려 했다면.'
진작에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져서 바닥을 뒹굴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굳이 이런 화제를 이어나갈 이유가 없었다. 시몬은 손에 들고 있던 포장지에서 종이 케이스를 꺼냈다.
"아이스크림 빵 먹을래? 오는 길에 노점에서 샀어."
"네?"
당황한 카미바레즈는 지금 간식을 먹을 때가 아니라며 한 번 거절했지만, 결국 시몬의 적극적인 권유에 못 이기며 받았다.
그녀가 살짝 한입 깨물어보았다.
"?!"
그녀의 보랏빛 동공이 토끼 눈처럼 커졌다. 다시 한입 더 깨물어 먹은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미소가 그려지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아으으, 맛있어요!"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두 손으로 아이스크림 빵을 꼭 쥐고 한 입씩 우물우물. 정말 맛있게 잘 먹는다.
'어떻게든 잘 넘겼나.'
시몬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카미바레즈는 전혀 눈치 못 챈 모양이지만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디트리히가 눈을 번뜩이는 모습이 보였다.
"자, 그럼 이제 딕을 만나러 갈까?"
"네!"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입술에 묻힌 채 활짝 웃었다.
시몬이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며 그녀의 입술을 가리키자, 목덜미까지 붉게 변한 그녀가 두 손으로 손수건을 받아서 닦았다.
"꼭 세탁해서 돌려 드릴게요!"
"응."
간식을 즐긴 두 사람은 좁은 골목길을 나란히 걸었다.
두 달 가까이 되는 공백기간이 있었던 만큼, 할 이야기가 무척 많았다. 카미바레즈는 아기새처럼 재잘재잘 떠들었고,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잘 들어주었다.
"시몬은 정말 말을 잘하시는 것 같아요!"
시몬이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딱히 별말 안 했는데."
"느낌이 그래요! 저 다른 분들 앞에서는 떠는데, 시몬이랑 이야기하면 편안하게 말이 잘 나오는 것 같아서 좋아요."
뭔진 모르겠지만 좋아해 주니까 이쪽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입학까지 오늘하고 이틀이나 더 남았으니까, 쭉쭉 이야기하자."
"네!"
그녀는 방학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실라지 교수의 추천을 받아 그의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우르슬라의 난폭한 피를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물론 우르슬라의 힘은 우르슬라 가문에서 배우는 게 가장 좋겠지만, 카미바레즈의 경우 피는 뱀파이어라도 신체는 인간에 가까웠다.
'인간이 우르슬라의 피를 쓰는 방법'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난제.
이건 우르슬라에서 가르쳐 줄 수 없는 부분이었고 차라리 같은 인간에게 배우는 편이 더 낫다는 게 실라지의 판단이었다.
"실라지 교수님의 제자는 어떤 분이셨어?"
"아! 박사님이요? 정말 좋은 분이에요! 다소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 친절하시고 배려도 많이 해주셔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요."
"다행이네."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난 실라지 교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실 줄 알았는데."
"박사님께 들었는데, 실라지 교수님은 방학 때 키젠의 비밀임무를 수행하러 가셨다고 해요. 대륙 최고의 혈류술사만 할 수 있는 일이래요."
키젠 교수들은 방학이 되면 그냥 쉬는 게 아니라, 그동안 밀린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들은 교수면서 현역 네크로맨서이기도 했으니까.
"시몬은 이번 방학 어떻게 보내셨어요?"
"나?"
신성연방에 가서 혈천교와 싸웠다. 이제 신성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고 신성 언데드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도 눈을 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학 숙제하고, 아버지 영지일 도와드리고 그랬어. 그것만으로 엄청 바빴거든."
"영주님들은 역시 고생이 많으시네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캠밸로드에서 빠져나와 여러 매장이 밀집한 번화가로 왔다.
시몬은 딕의 편지를 꺼내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몬. 딕은 어디에 있어요?"
"일주일 전부터 랭거스틴에 와서 아르바이트하는 중이래. 대충 이쯤이었는...... 아!"
가게 간판들을 살피던 시몬의 눈이 커졌다.
"여기다! 간판 이름이 블루 호빗."
"가게 이름이 특이하네요."
"들어가 보자."
딸랑딸랑.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진열대에 빼곡하게 놓인 물건들에 눈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오오, 다들 왔어?"
"딕!"
캐주얼한 앞치마를 걸친 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키젠 교복이 아니라 이 가게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으하하! 다들 잘 지냈냐!"
활짝 웃으며 두 사람과 주먹을 부딪쳐 인사한 딕이 손뼉을 짝짝 쳤다.
"참! 이럴 때가 아니야! 두 시간 뒤에 알바 끝나니까 나 좀 도와줘!"
"......갑자기?"
"십 분 뒤에 세일 행사 시작하니까 빨리 옷부터 갈아입고 와! 사장님이 니들 급료도 챙겨주신대. 자, 자."
딕이 시몬과 카미바레즈의 등을 떠밀었다. 두 사람은 졸지에 탈의실에 들어가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됐다.
'입으라고 시켜서 입긴 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꼴이야.'
바지는 키젠 교복 그대로 입었고 그 위에 줄무늬 갈색 앞치마를 둘렀다. 곤색 셔츠 위에는 스카프를 넥타이처럼 맸다.
"시몬~"
여자 탈의실에서 카미바레즈가 수줍은 듯 밖으로 나왔다. 시몬이 킥킥 웃었다.
'귀여워.'
시몬과 같은 복장이었지만, 품이 커서 소매에 손가락 끝만 살짝 보였다. 갈색 앞치마도 잘 어울렸다.
"도와주러 온다는 알바생들이 저 둘인가?"
"넵, 사장님!"
딕과 키가 땅딸막한 중년 남자가 걸어왔다. 그는 시몬과 카미바레즈를 슬쩍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이벤트 코너를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쪽이야!"
딕이 능숙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많이 놀랐지? 미안 미안. 여긴 네크로맨서들의 기술을 가정용품에 적용한 물건들을 파는 곳이야. 아이디어도 얻고 시장조사도 할 겸 여기서 일하고 있어."
"사과는 됐고, 이렇게 일 시킬 거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허허! 원래 인생은 돌발의 연속인 법! 카미는 여길 맡아줘. 디저트 코너야."
카미바레즈가 뻘쭘하게 디저트 코너에 자리 잡았다.
"이거 한 상자씩 뜯어서 종이 접시에 올리고 사람들한테 먹어보라고 하면 돼. 쉽지? 굿?"
"아, 넷!"
벌써 긴장했는지 그녀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딕은 바로 맞은편에 시몬을 데리고 왔다.
"넌 여기야!"
시몬이 눈을 끔뻑였다. 옷들이 쭉 진열된 곳이었다.
"그냥 여기서 옷 피팅해 주고, 잘 어울린다고 입 털면 돼. 쉽지?"
"......아니, 무슨 옷인지 설명은 해줘야 팔지."
"방수마법이랑 뭐 있다고 있는데, 아 그냥 뭐 잘 어울린다고 하면 끝이야! 아, 들어온다!"
시몬과 카미바레즈가 들어온 문은 정문이 아니었다. 다른 곳의 문이 열리더니 손님들이 우르르 가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시몬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말했다. 그때 한 40대 여성이 옷을 훑어보다가 시몬 쪽을 돌아보았다.
"저기......."
"어서 오세요 부인! 피팅해 보시겠어요? 이쪽 모델이 잘 나왔습니다."
시몬은 뭘 하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었다.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는 시몬의 입담에 딕은 작게 감탄성을 터뜨리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한 시간 동안 전 품목 40% 할인 이벤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건 역시.
"부인께는 그 제품보다는 이쪽 브랜드 제품들을 추천드립니다."
"어째서죠?"
깐깐해 보이는 부인이 팔짱을 꼈다.
"부인의 피부가 밝으셔서 파스톤 채색보다는 이쪽의 어두운 계통이 더 잘 어울리십니다."
"오호호호!"
시몬의 주위에는 귀부인들이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카미바레즈도 밀리지 않았다.
"따! 딸기 초콜렛 드시고 가세요오!"
카미바레즈가 달달 떨면서도 열심히 디저트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접객 스킬이 부족한 그녀가 초콜렛을 내밀었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바람에 점점 소심해졌다. 하지만.
"이거 무료예요?"
"네!"
손님 한 명이 초콜렛을 맛보더니 맛있다고 해주었다. 물건을 산 것도 아닌데 그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감사합미다!"
바로 홀린 듯이 두 박스를 구매하는 손님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카미바레즈도 재고를 다 팔아버리기 시작했다.
"자, 이벤트 종료입니다!"
두 시간짜리 짤막한 이벤트는 빠르게 끝났다. 다른 코너는 비싼 가격대에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시몬과 카미바레즈는 재고까지 싹 팔아버렸다.
"정말 고맙네. 키젠 학생분들이라고 하셨나? 다음에도 용돈 부족하면 일하러 들러줘요."
사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추가금을 더 챙겨주었다.
두 사람은 비로소 탈의실로 돌아가 원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은 딕이 사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넨 참 수완이 좋아. 아니지, 오늘의 성공은 자네 능력이 아니라 저 두 사람 덕분인가?"
"아니죠. 저 두 사람을 친구로 둔 제 능력이죠."
"하하하!"
뻔뻔하게 잘도 말한다고 생각하는 시몬이었다. 딕이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자, 가자! 방학 마무리 기념으로 파티해야지! 오늘은 내가 쏠게!"
"와아~"
카미바레즈가 짝짝 손뼉을 치며 웃었다. 시몬이 말했다.
"이제 내일 메이린만 오면 완전체네."
딕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참! 메이린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는데, 니들 다 깜짝 놀랄 거야! 따라와 봐."
"새로운 정보?"
세 사람이 가게 밖으로 나섰다.
* * *
딸랑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검은 망토를 두른 거대한 남자가 들어왔다. 얼마나 키가 큰지, 뒤통수가 가게 천장에 닿을 정도여서 살짝 몸을 숙여야 했다.
사장이 뛰어나왔다.
"어서 오십쇼! 행사 다 끝나서 정가로 구매하셔야 하는데 괜찮으시...... 허억!"
눈빛에서 피어오르는 살기에 가게 사장은 철푸덕 자리에 엎어졌다. 나머지 점원들도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배, 뱀파이어?'
'경비병을 불러야 하나?'
남자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이 가게의 딸기 초콜렛을 전부 가져오도록."
"......네?"
사장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디트리히가 더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딸기 초콜렛."
상황의 인지력이 떨어져서 잠시 멍하니 있던 사장이 다급히 이어서 말했다.
"죄, 죄, 죄송하지만 딸기 초콜렛은 다 팔려서 재고가 없습니다! 이쪽의 오렌지 초콜렛은 어떠신지."
그 말에 남자는 미련없이 바닥에 놓인 주머니를 회수하더니, 무척이나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딸기 초콜렛이 아니면 필요 없다."
디트리히가 성큼성큼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멀뚱히 바라보던 사장의 입에서 이제야 당혹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친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