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95화
"자! 여기가 우리가 이틀 동안 묵을 곳이야!"
딕이 두 팔을 펼치며 소리쳤다.
네 사람이 도착한 곳은 랭거스틴 번화가의 중앙 시계탑 건물 꼭대기였다. 시몬과 카미바레즈, 메이린 모두 놀라자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 숙소가 있었어?"
바로 천장 위에 그 유명한 시계탑의 형광 시계가 있다. 건물의 빈 공간을 숙소건물로 개조한 형태였다.
공간의 절반은 침대와 가구가 배치된 숙소였고 나머지 절반은 식사를 위한 테이블이 있는 대형 발코니였다.
네 사람은 발코니 쪽으로 나와보았다.
"와아아!"
랭거스틴의 황홀한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카미바레즈가 감격한 표정으로 콩콩 뛰어다녔다.
"정말 대단해요 딕! 이런 숙소를 구하다니!"
"흐흐."
딕이 팔짱을 끼며 으스댔다.
"내가 또 할 땐 하지. 니들도 두 시간 알바 좀 뛰어서 이런 숙소 잡은 거면 괜찮지 않냐?"
"응, 정말 좋다."
시몬이 야경을 감상하며 그렇게 말하는데, 옆에서 메이린이 분주하게 기름종이와 물풀 등을 꺼내고 있었다. 아까 올라오기 전에 노점에서 구매한 재료들이었다.
"그것보다 슬슬 준비해! 이제 30분 후면 '천 개의 불빛'이 시작한다고!"
"......그거 꼭 해야 해?"
"당연하지!"
랭거스틴의 필수 관광 코스인 '천 개의 불빛'은 매일 밤 8시 정각에 사람들이 등불을 날려 보내는 의식이었다. 시몬도 처음 랭거스틴에 왔을 때 로레인과 함께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다소 밋밋한 반응이었고, 딕은 야경 몇 분 보다가 춥다며 숙소에 들어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기 시작했다.
메이린이 버럭 소리쳤다.
"아! 여기 왔음 무조건 등불은 날리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이거 안 할 거면 랭거스틴에 왜 왔냐?"
"맞아요!"
여학생들은 마음이 맞는지 열심히 등불을 접기 시작했다.
"메이린! 여기에 풀칠하면 안 되는 거 아녜요?"
"악! 실수했다! 이거 한 장 버려야 해!"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시몬이 다가와 앉더니 슥슥 종이를 접고 등불의 뼈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카미바레즈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짝짝 손뼉을 쳤다.
"대단해요! 시몬은 대체 못 만드는 게 뭐예요?"
심지어 메이린이 실패한 것까지 복구해냈다. 그녀가 민망한 듯 입술을 샐쭉였다.
"참나. 만드는 방법 알고 있었으면 진작 좀 도와주든가."
"하하, 방법을 아는 건 아냐. 저번에 로레인이랑 왔을 때 한번 만들어봐서 그런지 감이 남아 있나 봐."
그 말에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동시에 움찔했다.
"어, 언제? 걔랑은 왜?"
시몬은 등불을 접는 데 집중하느라 인상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키젠 입학 전날에 교과서랑 준비물 사는 걸 도와준 게 로레인이었거든. 그땐 처음 고향 밖에 나와서 아무것도 모를 때라 도움을 많이 받았어."
"호, 혹시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어요?"
"그때 처음 만났지."
두 사람이 묘한 표정으로 시몬을 힐끔거렸다.
"와-"
그때 침대에 뒹굴거리다가 음료 한잔을 꺼내 든 딕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그거 커플들끼리 같이 날리는 거 아님? 좋겠다. 네프티스의 따님이랑 사귀면 인생 펴......."
"야."
메이린이 차갑게 쏘아보았다. 평소 때리려고 할 때의 그 눈빛이라 딕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어, 어? 왜?"
"니만 입이냐? 어? 여기 입이 세 갠데 빨리 세잔 더 가져와!"
"크흡. 겁나 부려먹네."
딕이 불쌍한 시늉을 하며 주방으로 갔다.
이 와중에 뭔가를 시작하면 최선을 다해야 적성이 풀리는 시몬은 등불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기어이 등불 네 장을 완성했다.
"아! 저길 봐요! 사람들이 전망대로 모여들고 있어요!"
카미바레즈가 언덕을 가리켰다.
무수한 여행객과 커플들이 전망대나 언덕, 높은 건물 옥상 등으로 올라와 등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제일 높게 날리겠네."
메이린이 신이 나서 말했다. 전망대든, 언덕 위든, 이 도시에 제일 높은 곳은 그들이 있는 시계탑 건물이었다.
"자, 그럼 불붙일게."
개인당 하나씩 등불을 날리기로 했다.
세 사람이 등불을 들자 시몬이 촛불로 불을 붙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시몬도 자신의 등불에 불을 붙이고 뜨겁지 않게 손끝으로 들었다.
"이제 시작해요!"
도시 곳곳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선홍색의 등불들이 밤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시몬 일행은 다른 등불들이 도착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지금이야!"
메이린의 외침을 신호로 네 사람이 동시에 손을 놓았다. 시계탑에서 출발한 네 개의 등불이 가장 먼저 높은 하늘로 올라갔고, 뒤따르는 나머지 빛의 조각들도 합류하며 밤의 도시를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였다.
날린 등불을 보며 네 사람은 가볍게 소원을 빌었다.
'2학기가 끝나도, 네 명 모두 살아남아서 계속 키젠 교복을 입을 수 있기를.'
시몬은 소원을 빌고는 눈을 떴다. 그리고 은하수처럼 밤하늘을 밝게 물들이고 있는 불꽃의 향연을 응시했다.
"너무 예쁘다."
메이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워요."
천 개의 불빛을 보는 게 처음 보는 카미바레즈도 감격한 눈으로 말을 받았다. 딕이 씩 웃으며 시몬의 팔꿈치를 가볍게 쳤다.
"네 소감은 어때?"
시몬이 묵묵하게 대꾸했다.
"여러분의 200실버가 하늘에서 터지고 있습니다."
"푸하핫!"
딕이 배를 잡고 웃었다. 메이린이 깬다는 표정으로 시몬을 째려보았고 카미바레즈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그럼! 종이 한 장에 200실버는 비싸지!"
"으휴, 로망 없는 것들아. 그런 것도 병이다 병."
한동안 등불을 구경하던 네 사람은 이제 넓은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꺼냈다. 시몬은 안나가 직접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작은 도시락 용기 안에 꽉꽉 차 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정성 가득한 안나의 쪽지를 보며 모두가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였다. 음식 맛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시몬! 어머님께 너무너무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어머님 계신 쪽으로 절 박겠습니다."
와인을 곁들여 도시락을 먹으며, 세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달 동안 할 이야기가 정말로 많이 쌓여 있었다. 다들 열심히 자신의 모험담을 늘어놓으며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그런데 방학 이야기만 나오면 시몬만 좀 조용한데?"
딕이 말했다.
"......어, 음. 난 그냥 영주 일만 해서."
"으휴, 귀중한 방학 그냥 놀았네 놀았어."
신성연방에 갔다는 사실을 들으면 세 사람 다 뒤집힐 거라는 생각에 시몬은 미소 지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 * *
"웅냐 음냐."
시몬은 바닥에 누워 잠든 카미바레즈를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메이린이 교복 차림 그대로 퍼질러져 누워 있었다. 이불은 또 어느새 발로 걷어찬 뒤였다.
시몬은 그 옆자리에 카미바레즈를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새근새근 잠든 두 사람을 본 시몬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으허헣. 너무 많이 마셨......."
그리고 자신은 멀쩡하다고 주장하던 딕이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툭 쓰러졌다. 시몬이 킥킥거렸다.
"너 세 잔 마셨잖아."
"세잔이면 거으이 주당인...... 음으 므므."
시몬이 혓바닥이 꼬인 딕을 부축해서 질질 끌어다가 1인용 침대에 눕혔다. 그러곤 기지개를 쭉 켜며 테라스로 나왔다.
시원한 밤바람에 술이 깼다. 시몬은 테라스에 기대어 팔꿈치를 댔다.
이제는 천 개의 불빛도 없고, 가게들의 조명도 없이 새까맣기만 한 랭거스틴의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버님."
그 말에 검은 인형이 훅 테라스에 내려앉았다.
두 발을 테라스에 붙인 채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은 새까만 신형이 시몬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등불 날릴 때부터요."
뱀파이어 로드, 디트리히가 히죽 웃었다.
"너무 오래 지체했어. 나는 이제 랭거스틴을 떠나야 한다."
"네. 카미는 제가......."
"카미바레즈는 불량품이다."
그 말에 시몬의 표정이 굳어졌다.
"힘과 강함만이 미덕이고, 약육강식의 뱀파이어 사회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아이다. 힘으로나, 마음으로나 말이다."
"자기 자식을 불량품이라고 하는 부모도 있습니까?"
"당돌한 놈."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자 송곳니가 무서운 예기를 일으켰다.
"나는 뱀파이어 로드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해도 일족 전체를 이끄는 자로서 사사로운 정을 내비칠 수는 없지."
"그래도 카미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았는데요."
"내 업이니까."
그의 시선이 어둠에 잠긴 랭거스틴을 응시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잘나고 선구자인 줄 알지만, 역사는 반복되기만 한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찬찬히 깔렸다.
"찰나의 원초적인 충동에 패배한 나는 인간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고, 여자는 내 아기를 가졌다. 뱀파이어의 아이를 낳는 건 인간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겠지."
뱀파이어 아기는 인간 산모를 죽인다. 그것을 알고도 두 사람은 몸을 섞었다.
"나는 그 일로 무엇보다 사랑하던 여자를 잃었다. 그리고 카미를 완성된 뱀파이어가 아니라 불량품으로서 낳았지.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했다. 모든 것은 나의 업이다."
그의 눈빛에 짙은 회한이 아른거렸다.
"그럼 반대로 물을게요. 카미의 어머님을 만나고 사랑한 그 모든 걸."
시몬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까?"
"......."
뱀파이어 로드의 입이 떨어졌다.
"아니."
"그럼 됐네요."
시몬이 빙긋 웃었다.
"모든 게 순리대로, 짜놓은 대로, 계획대로만 이루어지는 건 불가능해요. 아버님의 그건 한순간의 강렬한 충동 같은 게 아니라, 카미를 만나기 위한 어떤 필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크하하하하하!"
디트리히가 쩌렁쩌렁 웃었다.
시몬은 움찔하며 뒤쪽을 응시했지만 다행히 그 웃음소리에 깬 사람은 없었다.
"내 삶의 반의반의 반도 살지 못하는 꼬맹이가 잘도 지껄이는구나!"
하지만 짧은 생각이기에 담백한 맛도 있다. 디트리히가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가렸다.
"내 딸을 잘 부탁하마."
"네. 맡겨주세요."
그 말만 남기고 디트리히의 몸이 무수한 박쥐로 흩어져 사라졌다.
싹싹하게 웃고 있던 시몬의 표정이 풀어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짜 박력이...... 엄청 긴장했네.'
시몬도 등을 돌려 숙소로 들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이제 개학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적어도 오늘은 즐거운 일들만 잔뜩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건 메이린이 딕의 방학 숙제를 들여다보다가 시작됐다.
"이 미친놈 진짜! 방학 숙제 반도 안 했어!!"
메이린의 외침에 딕이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이, 이제 너희들이랑 같이할 계획이었지."
"같이할 계획이었지가 아니라 도와주세요겠지! 안 되겠어! 니들도 다 숙제한 거 꺼내!"
졸지에 잘 자고 있던 시몬과 카미바레즈도 숙제검사를 맡게 됐다.
카미바레즈는 딕보다는 상황이 나았지만, 개인 훈련에 집중하느라 빠진 부분이 듬성듬성 있었고, 시몬은 그런대로 성실하게 하기는 했지만 소환학 외에 전 과목의 필기 성적이 열세여서 틀린 내용이 상당히 많았다.
"......와 진짜. 와."
7조 조장은 이마를 짚다가 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남은 세 사람은 메이린의 앞에 기립한 채 삐질삐질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제 내 감동 다 물어내 이것들아. 뭐가 천 개의 불빛이고 뭐가 야경 보면서 와인 한잔이야."
그녀가 싸늘하게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이대로는 키젠에 들어가자마자 최하점 받고 핸디캡 먹고 빌빌 기어야 할 거야! 특히 딕! 너는 그냥 영원한 방학에 들어가는 거야! 제인 교수님 성격 몰라? 두 달 쉬었다고 감 다 떨어졌네?"
딕이 애써 웃으며 두 손바닥을 착 모았다.
"자, 자,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일단 좀 진정해. 그리고 혼날 땐 혼나더라도 이유는 명확하게......."
"이유? 이유라고 했냐?"
그녀가 딕의 숙제 중에 혈류학과제를 꺼내 들었다.
"혈류마법 카타포레트의 시전 시, 시전자의 핸디캡에 대해 고찰하시오. 라는 문제였는데. 딕의 답."
그녀가 이를 갈며 말했다.
"몸에 피가 빠지면 어지럽습니다. 이걸 답이라고 내놨냐 이 미친놈아!!"
"아니, 혈류계 흑마법인데 틀린 말은 아니잖......."
바로 메이린이 과제뭉치를 집어 던졌고 딕이 얼굴에 맞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미쳐 진짜! 내가 이런 조원들을 믿고 통합 2학기를 보내려 했다니!"
조별수업은 2학기에도 계속 진행된다.
만약 다른 조원들이 성적이 떨어져서 키젠에서 나가게 되거나, 다른 핸디캡 등으로 조별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환경이 되면 피해자는 남은 조원일 수밖에 없었다.
카미바레즈가 두 손을 모으고 헤헤 웃으며 화를 풀어줄 겸 귀엽게 말했다.
"......어, 엄마."
"시끄러 카미. 너도 이번엔 좋은 말 못 들을 줄 알아."
택도 없다는 걸 깨달은 카미바레즈가 몸을 바짝 세우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난 좀 낫지?"
"다 똑같아 이것들아! 오늘 이거 다 할 때까지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
조장 메이린이 엉망진창인 조원들의 방학과제를 한 아름 안아서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새로 해!"
"네!"
세 사람이 즉시 깃펜을 들고 숙제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딕이 엄지를 척 세우며 낙관적으로 말했다.
"역시 방학숙제는 몰아서 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가 증명되는 순간이군."
"널 시계탑에서 떨어뜨려 중력을 증명해 줄까?"
딕의 고개가 바로 숙제 쪽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