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07화
시몬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처음에 이상한 폭음이 들리면서 황천고래가 괴로워했고, 그 안에 있는 배도 흔들렸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해무가 뿌옇게 일어난 바닷가의 어딘가.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시몬은 바닷물에 젖은 교복 재킷과 신발을 벗어들고는 첨벙첨벙 걸어갔다.
얕은 물가를 지나 하얀 모래사장 위로 올라오니 부드러운 모래를 밟는 감촉이 기분이 좋았다. 조금 더 걷자 나무와 풀이 자라난 지형도 보인다.
험준한 산맥 출신인 시몬은 일단 식물부터 눈이 갔다. 그의 시선이 나무를 지나 피어난 꽃이나 풀로 향했다.
'이건.......'
로크섬의 식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로크섬 서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환경. 홍펭의 수업 때 워낙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든 로크섬에 도착한 건가?'
뒤를 돌아보자 수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쏴아 쏴아 하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일단 섬에 온 건 확실해 보인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황천고래로 이동 중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다. 황천고래는 추락했고 시몬도 정신을 잃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파도에 떠밀려서 로크섬 끝자락에 닿았다.
이게 지금 추정해 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황의 흐름이다.
'......물론, 그렇게 덥석 믿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지만.'
시몬은 근처 바위에 신발을 올려놓고는 교복을 꽈배기처럼 꼬아서 물을 짜고 탈탈 털어서 입었다.
축축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때 시몬은 키젠 교복에 걸려 있어야 할 '방호마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발에 차 있던 물도 빼고, 근처의 물 먹는 이파리들을 구겨 넣어서 대충 습기도 처리한 다음, 다시 신발을 신었다.
여기서 한가하게 옷이나 말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조원들을 찾아야 해.'
시몬이 그렇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였다.
-그그그그그극!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즉시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수풀이 울창한 곳. 숲의 어둠을 뚫고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몬스터인가? 아님 야생동물?'
시몬이 긴장하며 전투 채비를 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놀란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
그것은 전신이 새하얗고,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 괴물이었다. 저게 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 불과 두 달 전의 일을 어찌 잊겠는가.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의 괴물......!'
잊고 있었던 성녀 사태의 끔찍한 악몽이 강제로 끄집어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눈앞에서 네 발로 떡하니 서 있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시몬은 차라리 지금이 꿈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그그그그그극!
새하얀 괴물이 네 발로 달려들었다.
머릿속의 혼란이 잠재워지고 즉시 전투 논리가 자리 잡혔다.
'오버로드로 단숨에 끝낸다.'
시몬은 제자리에 가만히 기다렸다가, 두 개의 촉수 칼날을 꺼냈다.
하나는 정면에 벽처럼 세워서 괴물의 공격을 막고, 다른 하나는 놈의 공격이 막히며 움직임이 경직되는 순간을 노려 바닥에서 올라오게 한다.
촤르르르르륵!
칼날이 놈의 배를 뚫고 위로 들어 올렸다. 시몬은 아공간에서 스켈레톤용 숏소드를 꺼내 직접 손에 쥐고는, 칼날을 밟고 타다닥 뛰어 올라가 그대로 놈의 목을 베어냈다.
하얀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괴물의 몸도 잿더미처럼 분해되다가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차악.
모래사장에 착지한 시몬이 숏소드를 머리 위로 던졌다. 아공간이 열리며 검을 날름 받아먹었다.
"이걸로 확실하네."
방금의 교전으로 결정적인 정보들을 얻었다.
첫째, 방금 싸운 건 프리마 마테리아로 만든 괴물이 확실하다.
둘째, 프리마 마테리아는 사용자의 힘을 본질로 이질적인 괴물들을 끝없이 창조하는 아티팩트다. 무엇을 본질로 사용했느냐고 묻는다면 플레마 때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건 틀림없이.
'신성이야. 누군가 또 신성을 써서 이 괴물들을 만들고 있다.'
정보가 더해질수록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로크섬에 프리스트가 들어온 걸까?
투툭.
바닥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시몬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까의 가설을 증명해 주듯, 아주 적나라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허공이 흔들렸고, 마치 공간이 배설하듯 흰 덩어리가 뚝 떨어졌다. 제대로 된 인과도 없이 하나의 새하얀 괴물이 태어났다.
이번에는 인간처럼 두 발로 바닥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시몬에게 이를 보이며 공격 태세를 보였다.
"......아, 진짜."
시몬은 헛웃음을 흘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진짜 악질이야 당신들."
괴물이 모래사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 *
치칙.
칙.
어두운 조명 위로 무수히 많은 화면이 펼쳐져 있었다.
거의 1,000개가 넘어가는 마나 스크린들.
그리고 이 화면들은 놀랍게도 로크섬 전체에 조난당한 키젠 1학년 학생들의 모습을 제각기 비추고 있었다.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진짜 악질이야 당신들.
제일 먼저 교전에 들어간 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은 남자는 즐겁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 악질이지."
남자가 손에 낀 와인 잔을 굴렸다.
검정 제복 차림에, 가슴에는 온갖 훈장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어깨엔 견장을 찼고 반대쪽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다 알면서 입학했잖아? 안 그래?"
그의 이름은 에반겔로스 알포니아.
키젠 본부의 간부이자, '바늘'이라는 이명을 가진 네크로맨서였다.
"에반겔로스 님."
본부 직원 두 명이 의자에 앉은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키젠 1학년 948명 전원.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어어, 그래."
에반겔로스가 휙휙 손짓하자 직원들이 다시 일하러 갔다.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마법기구 '옵저버'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마나 스크린의 영상에 송출했다. 물론 옵저버는 투명 마법을 사용해서 학생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저 친구처럼 빠릿빠릿한 학생도 있는가 하면."
시몬을 보던 에반겔로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패닉에 빠진 아가들도 많군."
-으으! 으아아아아!
-저게 왜 로크섬에 있는데!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에반겔로스가 소리 내어 웃어댔다.
주저앉는 아이.
절규하는 아이.
울먹이는 아이.
현실을 부정하는 아이.
이번 1학년들에게 1학기 마지막은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경험이었으리라.
성녀가 직접 키젠이 진입해서 결계로 키젠 1학년들을 가두고 전원 학살하려 했던 전례가 없는 사태. 그런 일을 겪은 유일한 세대들이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많은 학생들이 다쳤고, 여전히 그때를 잊지 못하고 트라우마적인 고통과 악몽을 호소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키젠은 그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보듬어주는 것보다.
간악하게 후벼 파고, 그들이 겪은 과거에 정면으로 맞서고 이겨 나갈 것을 요구했다.
"자, 자! 자! 언제까지 그 위대한 교복을 입고 질질 짜기만 할 거냐? 제대로 멘탈 챙겨. 죽기 싫으면 정신 차리고 싸워!"
에반겔로스가 지팡이를 흔들며 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때 아무도 안 죽었잖아? 별것도 아닌 일로 트라우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확실히 평화의 시대이긴 한가 봐? 현장에선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겪어. 이 정도도 못 견디는 아가들은."
에반겔로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키젠을 자칭할 자격이 없다."
일하면서 슬쩍 에반겔로스의 눈치를 보던 직원들은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에반겔로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학생들 심리상태나 행동을 잘 체크해 둬. 상황 대처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아가들은 바로 쳐낸다."
"예!"
* * *
"후욱!"
시몬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리를 내렸다. 칠흑 먹인 회축에 제대로 머리를 가격당한 괴물이 축 늘어지더니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시몬이 잡은 괴물의 수는 이제 막 열 기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나하나 다 잡고 있다가는 끝도 없겠어.'
명확한 행동지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은 일단 두 가지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정말로 에프넬이 키젠을 공격했고 프리마 마테리아를 탈취해서 무한한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있거나.
아니면 키젠 측이 학생들을 시험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연출하고 있는 상황이거나.
시몬은 후자에 조금 더 비중을 싣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타이밍이나 상황이 너무나 인위적이었으니까.
천하의 키젠이 프리마 마테리아를 프리스트들에게 또 빼앗겼다는 무능함도 그렇고, 아무런 낌새가 없던 에프넬의 공세가 정확히 개학식에 벌어진 것도 그렇다.
교황의 맘이 확 한쪽으로 기운 게 아니라면, 온건파 성녀 이스라필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줬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 흰 괴물을 만들어내려면 프리스트가 있어야 하지 않나? 어떻게 키젠에서 신성 괴물들을 만들어 낸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시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의문은 일단 제쳐놓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의문에 꼬리를 잡고 잡았다간 끝이 없다.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키젠 교정을 향해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시험이라면 그곳까지 도착하는 순간 시험이 끝날 테고.
정말로 프리스트들의 공격이라면 더더욱 교정 내의 지휘통제실에 가서 프리마 마테리아를 쓰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좋아, 출발하자.'
결심을 굳힌 시몬은 걸음을 내디뎠다.
사실 전략적 판단보다는 세 사람이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그들이 어디 있는지 이 섬에 있긴 한 건지도 미지수다.
지금은 같은 키젠 학생으로서 그들의 실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그그그그극.
-기긱.
하지만 얼마 걷지도 않아 또 프리마 마테리아의 괴물들을 발견했다.
소형과 중형, 대형이 골고루 섞인 일곱 기의 무리가 시몬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일일이 상대할 시간은 없어.'
시몬은 다리에 칠흑을 폭발시키며 그대로 괴물들의 무리로 파고들었다.
소형의 공격을 피해 중형의 몸 위로 올라갔다. 바로 중형과 대형들이 주먹을 휘둘렀지만 시몬은 다시 훌쩍 뛰어올라 대형의 팔을 타고 순식간에 몸까지 올라갔다.
지능은 떨어지는지 자기들끼리 얽히고설키는 사이 시몬은 대형 몬스터의 어깨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고 있었다.
'본 아머!'
아공간이 열리고 두 개의 스켈레톤이 시몬의 몸에 달라붙었다.
'앞으로!'
그리고 절대명령으로 스켈레톤의 인력을 활성화해 글라이더 같은 효과를 냈다.
시몬의 몸이 빠르게 공중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뒤에서는 괴물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다.
'시험이든 진짜든 최대한 빨리 이 미친 짓을 끝내겠어!'
잔챙이들은 빠르게 넘기고, 최단거리로 키젠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