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10화
시험 실행본부.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던 두 까마귀는 신경전을 멈췄다. 이제는 아예 의자에 마주 앉아서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 네 직속제자였으면 말을 했어야지."
뜨거운 차를 쭉 들이켜던 에반겔로스가 바힐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그럼 나도 슬슬 봐주고 했을 거 아냐."
"직속제자는 아닙니다."
되돌아온 대답에 에반겔로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냐? 가지고 싶은 건 무조건 가져야 적성이 풀리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무슨 말씀을. 그리고 이 학교가 그렇게 만만한 바닥은 아닙니다."
에반겔로스가 혀를 찼다.
"허! 그 악랄하던 바힐 다 죽었나 벼. 다른 교수들의 방해가 짜증 나면 저 시몬이란 놈한테 티 안 나는 저주라도 걸든지."
바힐도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더운지 머리에 쓴 중절모를 벗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특례 1번은 네프티스 님께서 직접 지켜보는 아이입니다. 저주로 학생의 마음을 얻는 건 너무 위험해요. 그리고 뭣보다."
바힐이 고개를 젖혔다.
"내가 싫습니다."
"오호?"
"천재란 건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지성, 경험, 가치관, 성격, 부모의 훈육 등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 어떤 특정한 밸런스를 이루었을 때 천재가 나오는 겁니다. 내가 저주를 걸어 그런 걸작에 스스로 흠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는 인형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길 원합니다."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던 바힐이 갑자기 인상을 괴물처럼 구기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가 날 진심으로 믿고 따르기를 바랍니다. 온 마음으로 존경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나의 철학과 뜻을 이해하며, 마음 놓고 세상의 본질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그런 제자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진정 변태 같은 새끼.
라고 생각했지만 에반겔로스는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네가 그렇게 집착하는 꼴을 보니까. 신인 교수 때 꼭 가르치고 싶다며 맹독학 전공 여학생을 졸졸 따라다니던 때가 떠오르는군."
"아, 체헤클 말입니까? 그녀는 제 수석조교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주 유능한 인재죠."
"하여튼 개또라이 같은 새끼."
에반겔로스가 화면을 보며 주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마지막 단계는 총감독관인 나도 간섭 못 해. 이제 어쩔 셈이지?"
키젠 교정으로 향하는 입구 앞에는 마지막 관문이 시몬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했고, 이제는 온전히 시몬의 몫이겠죠."
바힐이 덤덤하게 말했다.
"진정 내 애제자가 될 인재라면 이 난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 *
골렘 보드를 탄 시몬은 엄청나게 익숙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키젠 캠퍼스와 로체스트를 잇는 바로 그 길목. 여기서 슬쩍 옆으로 빠져나가면 금지된 숲이 있고, 피어의 유적이 나온다.
피어와 에르제베트와는 방학이 끝나고 유적에서 만나기로 했다. 두 사람의 재회도 기대됐다.
'두 사람 다 로크섬에 와 있으려나?'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정말로 에프넬이 키젠을 습격한 거라면, 시몬은 캠퍼스의 상황을 확인한 뒤 바로 방향을 틀어서 피어의 유적으로 갈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피온' 복귀. 거기에 에르제베트와 프린스를 모두 동원해 군단장의 힘으로 프리스트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시몬이 골렘의 속도를 더 높이는 그때.
후우웅!
하늘에서 프리스트의 신성창이 시몬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신성창 하나쯤이야. 시몬이 피하려고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신성창은 그리 빠르지도 않은 것 같은 속도로 매끄럽게 떨어지더니 너무나 쉽게 툭! 하고 골렘 보드에 박혔다.
'......?!'
난데없이 시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어느새 신성창이 골렘 보드의 몸체에 구멍을 뚫고 바닥에 들어가 있었다. 시몬의 몸이 관성으로 날아올랐다.
'뭐야? 창의 궤도가 꺾였어?'
우당탕탕!
곧이어 시몬의 몸이 내려와 바닥에 강하게 부딪혔다. 공처럼 몇 번이나 튕겨 나가다가 풀밭을 굴렀다. 흙 맛과 피비린내가 입에서 감돌며 머리가 미친 듯이 어지러웠다.
몇 번을 구른 뒤에야 몸이 멈췄다. 자욱한 흙먼지에 속에서 시몬이 콜록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깨끗했던 검은 교복이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온몸의 뼈가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
'크윽.'
게다가 아까 착지를 잘못해서 그런지 왼팔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 최악의 컨디션에서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키젠 교정으로 향하는 길목, 그 중앙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드높은 산에 군림하는 신선처럼 보였다.
하얀 도복을 입고 한 손은 뒷짐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부채질을 하고 있다.
흰 수염과 세어버린 머리카락, 얼굴 곳곳에 깊은 주름살이 보인다. 시몬은 그에게서 방대한 신성의 흐름을 느꼈다.
'프리스트다. 그것도 지금까지 만난 프리스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자야.'
최종보스 같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젊은 네크로맨서여. 여기서부터는 더 나아갈 수 없네."
중후하고 인자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불길하고 찐득찐득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아까운 목숨을 건사하고 싶다면 이만 돌아가시게."
시몬이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공간이 열리고, 그 안에서 스켈레톤과 좀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중 몇 기의 스켈레톤은 시몬의 다리에 본 아머를 입히고, 움직이지 않는 왼팔에도 장착됐다. 시몬의 몸에서 방대한 투기가 흘러나왔다.
"거기서 비켜주세요."
'호오.'
시몬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방금 충격이 꽤 컸을 텐데, 지쳐서 숨을 헐떡이면서도 소년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좋구만. 눈동자에 심지가 꽉 박혀 있으이.'
저 나이에 이런 눈빛을 가진 아이들은 흔치 않다. 기분이 좋아진 노인이 사뭇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는 것도 용기라네. 격의 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닐 터."
시몬은 입을 다물고 본 아머를 착용한 팔과 두 다리를 움직여 전투 자세를 취했다. 마투의 준비 자세였다.
노인 또한 시몬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접선을 접어서 등 뒤의 허리띠 뒤에 낀 그가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신성이 그의 손안으로 모여들더니 1미터가 훌쩍 넘는 장검으로 변했다.
스엉! 스엉!
신성검이 휘둘러지는 소리엔 공기를 베어내는 것 같은 섬뜩함과 예리함이 있었다. 가볍게 두 차례 휘둘러본 노인이 신성검을 앞세우고 말했다.
"들어와 보게."
타닷!
시몬이 지면을 박차고 돌진했다. 본 아머로 무장된 오른 주먹이 날아왔고, 노인은 제자리에서 가뿐히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신성검과 본 아머가 부딪히며 불똥이 튀겼다.
시몬의 눈이 커졌다. 방금의 일격만으로 본 아머가 금이 가버리고 칠흑도 꺼져 버렸다.
'하지만!'
펀치는 페이크. 시몬은 휘두른 왼팔을 축처럼 삼아 몸을 회전시켰다. 연결 동작처럼 오른 다리의 회축으로 넘어가는 그의 주특기 연계였다.
카앙!
그러나 이번에도 노인이 간단히 휘두른 일 검에 본 부츠가 박살 나버렸다. 노인이 시몬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그의 몸이 가볍게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작이 너무 크다네."
노인이 손바닥에 신성을 일으켰다.
우웅!
허공에 신성으로 구축한 유리판이 펼쳐졌다. 노인이 검을 휘둘러 그것을 깨뜨리자, 유리판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신성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원거리 공격!'
시몬이 급히 바닥을 짚고 몸을 날렸다. 신성 파편들이 바닥에 박히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 멀었네."
노인은 허공에 유리판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한 손으로 뒷짐을 쥔 채 그 옆을 지나가며 검을 휙휙 휘둘렀다. 시몬을 향해 신성 파편들이 물밀 듯 쏟아졌다.
콰콰콰콰콰!
신성 파편에 맞닿은 본 아머는 가볍게 찢어지거나 무력화됐다. 파편 몇 개가 시몬의 몸에 틀어박히자, 그가 극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흠. 코어는 살짝 피해줬건만, 너무 심했나?'
노인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살짝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니, 진짜.'
시몬은 바닥에 머리를 댄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짜 하나도 안 아파. 이래도 되는 거야?'
필사적인 연기.
플레마에게 한번 써먹어 봐서 신성에 당해주는 이런 연기에는 경험이 있었다.
만약 이게 키젠 측의 시험이라면 옵저버로 보고 있을 터, 정말로 에프넬의 프리스트라도 신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비장의 한 수니 쉽게 들통나선 안 된다.
시몬이 이를 악물고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제 차롑니다!"
시몬이 시간을 번 사이, 숲에서 빠져나와 좌우 양옆으로 노인을 포위한 스켈레톤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노인은 이번에도 제자리에서 검을 몇 번 휘둘렀다. 허공에 은빛 칼날이 연달아 그어지며 스켈레톤들이 모두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아직!'
시몬이 집중력을 확 끌어올렸다.
'안 끝났어!'
검에 부딪혀 날아가던 스켈레톤들이 멈칫하더니 수십 개의 뼈로 흩어졌다. 신성검에 베인 부위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뼈들이 정면으로 돌진할 준비를 마쳤다.
시몬의 주력기 중 하나인 '본 네일'이었다.
'여기에!'
촤르르르르르륵!
여섯 개의 오버로드 칼날이 아공간에서 튀어나왔다.
본 네일과 오버로드의 합공.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린 인간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공세가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회피 불능으로 몰아놓은 건 좋지만, 프리스트를 상대로는 별로 좋은 전략이 아닐세."
노인이 신성검을 앞으로 세우고 성호를 그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신성 방어막이 펼쳐졌고 모든 공세가 튕겨 나갔다.
시몬이 숨을 헐떡이며 오버로드를 회수했다.
"그리고 자네가 이렇게 장황하게 시선을 끄는 이유는."
노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까 옆으로 몰래 보내둔 좀비들 때문이겠지? 언제 그것들을 쓸 생각인가."
시몬의 등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다 꿰뚫고 있었나.'
저 경험에서 나오는 태연한 태도가 더없이 공포스러웠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변수를 만들 만한 일말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 딱 한 가지 유리한 점.'
시몬이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좀비들이 있는 방향으로 뻗었다.
"로크섬은 처음 오시죠?"
소년은 미소 짓고 있었다. 노인이 흥미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흠, 확실히 그렇네만. 그게 뭔가 문제가 되는가?"
"지형지물에 대한 이해도."
시몬 손바닥에 시체폭발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이곳은 산지 지형이다. 로체스트에 내려갈 때마다 자주 왔다 갔다 하던 이 길은 지반이 불안정해서, 비가 오는 날엔 토사가 범람해 길이 더러워지곤 했다.
하수인들이 암반 경계면에 목책을 쌓아서 보강했지만.
'바로 그걸 강한 충격으로 무너뜨리면!'
시몬이 폭탄의 점화 스위치를 누르듯 주먹을 꽉 쥐었다.
쿠르르르르릉!
연달아 울리는 폭음. 그리고 지진처럼 주위가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오른편에서 막대한 토사가 쏟아져 내렸다.
"!!"
쿠구구구구구구구!
토사는 제일 먼저 노인을 덮쳤다. 그가 제자리에서 신성 방어막을 펼쳤고 쏟아져 온 토사가 앞을 뿌옇게 가렸다.
'허허허! 이건 확실히 당했군!'
노인이 방어막을 펼치고 있을 때, 시몬은 다시 골렘 보드를 만들어서 토사 위를 주행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몬의 눈이 집중력으로 번들거렸다.
"입구까지!"
콰콰콰콰콰콰!
사실 저 산사태는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노인은 이 자연재해의 규모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확실하게 제자리에 결계를 쳤고, 시몬은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단지 그 차이로 노인과 시몬의 거리는 크게 벌어졌다.
'해냈어!'
이제 키젠 교정까지 일직선이다. 익숙한 키젠 입구가 보였고 문도 열려 있었다.
시몬이 그대로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벽력처럼 울려 퍼지는 거대한 환호성이 시몬의 정신을 일깨웠다.
'?!'
보드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