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14화
"우리들은 키젠 학생으로서......."
시몬은 눈앞에 보이는 내용만을 읽어내려가는 데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말을 더듬는 것도 안 되고, 삑사리는 절대 안 된다.
선서 내용은 명예를 알고 품위를 지키고 교육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뭐 그런 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잔뜩 집중하다 보니 소리 내어 말해도 좀처럼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1분이 지나가며 선서도 끝났다.
'하아아아. 실수 안 했다.'
"뭘 그렇게 떨어요?"
세르네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시몬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수 안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했나 봐."
"유창하게 말 잘하시던데~"
이어지는 아론의 지시에 따라 선서를 마친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갔다.
"잘했어요 시몬!"
카미바레즈와 딕이 반겨주었다. 시몬은 자리에 돌아와 앉아서 슬쩍 메이린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매우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았냐?"
왠지 여기선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났어."
메이린이 콧방귀를 꼈다.
그렇게 학생대표 선서도 모두 끝나고 이제 개학식의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왔다.
"교수진. 입장해 주십시오."
어느 때보다 가장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 하나같이 스타들로 이루어진 키젠 교수들이 강당에 모습을 드러내자 학생들은 어느 때보다 크게 환호했다.
'다들 잘 계시는구나!'
시몬의 시선은 익숙한 얼굴들에 머물러 있었다.
A반 담당교수이자 부총장인 제인.
마투학 교수 홍펭과 저주학 교수 바힐.
그 외에도 칠흑역학 교수 에릭과 사령학 교수 움브라 등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추가 공지사항이 있다. 이번 통합 2학기에 새로운 교수님들이 합류하셨다."
아론의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맹독학 교수가 누굴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소개하겠다. 세 분 교수님.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학생들에게는 다소 낯선 세 명의 남녀가 강단 앞으로 나왔다. 아론이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소개했다.
"다소 의외일 수는 있겠군. 현재 임무를 수행 중인 실라지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혈류학 수업을 담당하게 된 발터 한 교수님이시다."
안경을 쓴 갈색 정장 차림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여학생들의 비명은 거의 포성을 연상케 했다.
"누구야 누구야?"
"와, 이건 뭐 얼굴이 반칙인데."
"혈류학 전공생 늘어나는 소리 들린다."
발터를 처음 본 메이린 또한 놀란 반응이었고, 남학생들마저도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그냥 질투를 느낄 레벨이 아니라 마치 걸어 다니는 조각상 같았다. 앞으로 나온 발터는 하수인이 건네준 확성 수정구를 들었다.
"반가워요 여러분. 발터 한이라고 합니다."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곳곳에서 여학생들이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영광스럽게도 실라지 교수님을 대신해 앞으로 혈류학 수업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실라지 교수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우렁찬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어서 간단하게 몇 마디만 더 하고 소개를 마친 발터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론이 다음 교수를 소개했다.
"다음으로는 신성방어학의 새로운 교수님이시다."
지금까지의 신성방어학 수업은 신성을 방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기보다는, 일종의 정신교육 시간에 가까웠다.
특히 1학기에 신성방어학을 가르쳤던 훌루트 교수는 일평생 연방의 최전선을 지키던 네크로맨서였다. 뼛속부터 군인이었고 프리스트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왜 프리스트는 나쁜가.
왜 우리는 신성연방을 무찔러야 하는가.
그는 프리스트들의 잔혹함과 양면성을 이야기했고, 광신도들이 일으킨 테러 사태와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학생들의 증오와 분노를 부추겼다.
그런 정신교육이 주류라 그런지, 정작 중요한 신성 방어법에는 다소 소홀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결국 이번 성녀 사태로, 네프티스가 대대적인 결단을 내렸다. 이 인사는 정말로 파격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흠흠."
흰 도복을 입고 한 손으로 접선을 흔들고 있는 이 노인은, 1학년 모두가 키젠 입구 앞에서 한번은 마주했던 바로 그 무지막지하게 강한 프리스트였다.
"소개 전에 미리 말해두지만."
아론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께 실례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싸늘할 정도로 차가운 아론의 말에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몇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학생들은 프리스트라는 말에 야유를 준비하고 있다가 아론의 엄포에 입이 쏙 들어가 버렸다.
"정말 힘들게 모신 분이다. 반신성연방 협회의 총장이시자, 전 에프넬의 주교셨던 파라한 교수님이시다."
짝짝짝.
자잘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발터에게 보냈던 박수와는 완전히 상반된 박수 소리. 오히려 박수를 치던 학생들이 주위에 눈치를 보느라 금방 끊어졌다.
그럼에도 파라한은 흘흘 웃으며 아론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의미였다. 아론도 깍듯이 고개 숙여 답했다.
싸늘할 정도의 정적 속에서, 앞으로 나온 파라한이 하수인으로부터 확성 수정구를 건네받았다.
"......."
확실히, 이것은 전례 없는 사태였다.
프리스트가 공식적으로 교권을 잡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 교권이 어디 시골 학교도 아닌 키젠이라는 사실은 학생들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이제 꼼짝없이 프리스트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적지 않은 비율의 학생들이 프리스트는 죽여 없애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고, 성녀 사태로 프리스트에 대한 적개심은 최고조였다.
과연 이런 때에 신성연방에서 넘어온 파라한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시몬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자리에 앉아 있는 교수들도 힐끔거리며 파라한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펑퍼짐하고 흰 도복을 흩날리며 마치 신선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온 파라한이 확성 수정구를 입 가까이 댔다.
"에프넬은."
그가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세상 그 무엇보다 내 목을 노리고 있다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의 손바닥에서 신성의 불꽃이 천장에 닿을 기세로 커져 나갔다.
사방에서 비명과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뒤쪽의 교수들조차도 움찔하며 등을 제쳤다.
"에프넬에서는 이 신성을 '여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내려오는 힘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그가 불꽃을 꺼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바로 이 몸의 존재가, 그런 그들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네. 어찌 나를 죽이고 싶지 아니하겠는가. 그들은 하루에도 백번 천번은 내게 천벌이 내려오길 기도하고 있을 걸세."
노인의 목소리가 대강당 전체를 울렸다. 신성을 이용한 연출로 완벽하게 어수선한 좌중을 휘어잡아 버린 모습에, 자리에 앉아 있는 시몬도 감탄했다.
"정말로 에프넬이 여신의 뜻을 대표하는 조직이라면, 에프넬에 반하는 이 늙은이의 신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과 아픔을 담고 있었다.
"듣게나 젊은이들이여. 에프넬이 주민들을 통치하는 방법은 '거짓'이라네.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그 어떤 사상과 지식도 통용되지 않아. 오로지 어두운 방 안에서 등불과 경전만을 내려놓고, 그것만을 읽게 해서 사람의 머리와 마음과 가치관을 굳어지게 한다네. 그게 그들의 방식이야."
단호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듯 퍼져 나간다.
"여신의 이름으로, 주민들은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기는 일을 기쁨으로 여겨야 하네. 여신의 이름으로, 다른 문물들은 머리를 흐려지게 한다며 거절해야 하네. 의문을 가진 자들은 이단심문관에게 고문을 받고 공포로서 탄압당하네. 과연."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여신의 천벌을 받아야 할 자는 어느 쪽인가!"
짝.
학생들 중 누군가가 멍한 표정으로 박수를 한 번 쳤다.
짝. 짝.
주위의 두 명, 세 명이 합류했다.
짝짝짝짝짝짝.
크진 않지만 자잘한 박수들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파라한은 신의 존재를 믿지만, 에프넬이 진정한 신의 뜻을 왜곡하고 곡해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시키고 사리사욕을 탐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경전에서 여신은 만물과 인간을 평등하게 아끼고 사랑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남은 절반의 인간들은 죽이라고 가르치는가.
경전에서 여신은 만민에게 깨어 있으라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게 하는가.
신앙생활을 이어갈수록 이러한 의문들은 커져갔고 결국은 주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의 행선지는 암흑연합이었다. 네프티스는 흔쾌히 그를 받아들였고, 배교한 프리스트들을 규합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나는 내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에프넬이 우리 모두의 공공의 적임은 확신하네. 이 늙은이는 아마 해방의 때를 보지 못하겠지. 하지만 씨앗을 뿌릴 수는 있네. 내 지식과 경험으로 신성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네. 그대들이 언젠가, 악을 몰아내고 죄 없는 주민들을 구해주길 바라겠네."
파라한이 수정구를 입에서 떼고, 아론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다는 뜻이었다.
아론이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자, 박수."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적대심과 뿌리 깊은 인식은 말 몇 다리로 바뀌지 않았지만, 처음 파라한이 올라왔을 때보다 박수 소리는 조금 더 커져 있었다.
파라한이 교수석으로 들어가 발터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젠에 합류하신 교수님이시다. 이분도 정말 어렵게 모셨다."
또각또각.
끈으로 잘 정돈해 묶은 포니테일 형태의 회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20대 후반 정도의 여성이 강단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급격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 누구야?"
"나도 몰라."
"약간 얼굴에 홍펭 교수님 느낌 있지 않냐?"
"나도 그 생각했어."
웅성 웅성 웅성.
학생들의 앞에선 별야가 걸음을 멈췄다. 자리에 앉아 있는 시몬이 숨죽여 웃었다.
'엄청 긴장하셨나 본데.'
그녀는 이상하다 못해 괴이한 누더기 차림을 벗어나, 제대로 검정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화장도 했는지 얼굴도 말끔했다. 이렇게 정상인처럼 차려입고 있으니 미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별야 본인은 지금 이런 본인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듯, 다소 멍하니 있었다. 하수인이 확성 수정구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아론이 설명했다.
"랭 교수님을 대신하여, 앞으로 맹독학을 가르쳐 주실 '별야 툰 소쿰 마르라트' 교수님이시다. 너희가 잘 아는 홍펭 교수님과는 쌍둥이 자매 관계다."
오오오!
학생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물들었고, 이번엔 남학생들 쪽에서 큰 반응이 터져 나왔다. 특히 맹독학 지망생들은 기대감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
그런데 정작 별야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뜬 채, 두 어깨는 귀에 닿을 정도로 바짝 세우고 허리도 구부정했다. 간헐적으로 몸을 불편하게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에게 싫어하는 옷을 강제로 입혀서 고장 난 것과도 같은 모습.
별야는 그 상태 그대로 몇 분째 아무 말도 없었다. 학생들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사회를 맡은 아론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별야는 여전히 어깨를 바짝 세운 자세 그대로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학생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져갔고, 방송 담당 하수인들은 울상을 지으며 뭐라도 말하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
드디어 첫마디가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침묵.
시몬의 시선은 뒤편의 교수석에 앉아 있는 홍펭 쪽으로 향했다. 홍펭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푹 쉬는 모습이 보였다.
"......으."
그때 별야의 어깨가 격렬하게 움찔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으으으...... 으...... 으아으아으......."
아론이 당황하며 말했다.
"교수님. 혹시 불편하신 곳이라도."
"X나! 불! 편! 해애애애애애애!!!!"
그녀가 대뜸 입고 있던 정장을 덥석 붙잡더니 신경질적으로 북북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키젠 교수라는 사람의 괴행동에 대강당은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사방으로 정장 쪼가리들이 흩어진다. 정장 치마도 일자로 쭉 찢어버리고 스타킹에는 숭숭 구멍을 냈다.
정장 안에 입고 있던 별야의 누더기 차림이 드러냈다. 굽 높은 힐을 휙휙 벗어 던지며 맨발이 되었고, 머리를 묶었던 끈도 풀자 회갈색 머리카락이 흩어지며 자유롭게 휘날렸다.
"후아! 쓰아아아압!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녀가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방송 담당 하수인이 울먹이며 아론에게 제발 말려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상황을 통제해야 할 아론은 동류를 만난 것 같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시 나한테 이딴 갑갑한 옷 입히면 죽여버릴 줄 알아!!"
커다란 소리로 코디네이터들에게 경고한 그녀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확성 수정구를 들었다.
"반갑다 꼬맹이들아! 나는 별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