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41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랭거스틴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시몬은 육체와 사고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백번 양보해서 랭거스틴 한복판에 테러사태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자.
하지만 테러를 벌인 장본인이 광신도 프리스트들도 아니고, 다름 아닌 로레인이었다.
파지직!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로레인이 강렬한 붉은 전격을 그리며 움직였고, 그 뒤를 순백의 깃털들이 유도화살처럼 쫓아왔다. 그녀의 붉은 단검이 그어질 때마다 깃털들이 갈라져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휘리릭!
이내 그녀의 반대쪽 손에서 회전하고 있던 단검이 착! 소리와 함께 멈추더니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속도로 뻗어 나갔다.
꽝!
단검이 세르네의 바로 앞에서 나타났고, 그녀를 보호하는 쉴드 마법에 막혔다.
엄청난 후폭풍과 함께 주변 유리창들이 깨지고, 바닥 타일들이 뽑혀서 날아다녔지만, 세르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더 이상 네 수작질을 방관하지 않겠어!"
로레인이 광채를 번뜩이며 말했다.
"방관하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요?"
세르네가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받아쳤다.
로레인의 붉은 섬광과 세르네의 하얀 깃털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부딪히고 격돌했다.
일이 터져도 제대로 터졌다는 생각에 시몬이 소리쳤다.
"잠깐만 로레인!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로레인의 소름 끼치는 붉은 눈동자가 시몬 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힐긋 보는 정도뿐, 다시 고개를 돌려 세르네의 전투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로레......!"
터업! 텁!
갑자기 날아온 스켈레톤 두 손이 시몬의 어깨를 붙잡더니 그대로 날아가 반대쪽 건물벽에 고정시켜 버렸다.
'로레인의 스켈레톤?'
아무리 움직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몬은 붙잡힌 채 머리를 굴렸다.
'로레인은 내가 전투에 말려들길 원하지 않아. 동시에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왜지?'
그냥 분노에 눈이 멀어서 '넌 끼어들지 마!'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잠시 머리를 굴려보니 금방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세르네에게 정신지배를 당한 줄 아는 거구나!'
비로소 머릿속의 퍼즐들이 맞춰졌다. 시몬이 왼발을 들어서 건물 벽에 착 붙였다.
'개문!'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오버로드의 촉수칼날이 어깨를 붙들고 있던 스켈레톤의 이음새를 정확히 잘라내 무력화시켰다.
바닥에 내려온 시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공간에서 숏소드 한 자루를 꺼내든 시몬은 그대로 세르네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로레인과 싸우고 있던 세르네는 갑작스러운 등 뒤에서의 습격에 놀라서 반격하려 했지만.
'시몬?'
가까스로 세르네의 깃털이 멈췄다.
시몬은 즉시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서 잡아당기고는 숏소드의 날을 그녀의 목 앞에 세웠다.
"!"
그 모습을 본 로레인은 크게 당황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절대 말리지 못할 것 같았던 두 강자의 전투가 드디어 멈췄다.
"어머나, 과감하셔라~"
세르네는 오히려 기뻐하며 시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발, 긴장하는 척이라도 해!'
진짜 얘는 못 말린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싸움이 멈춘 지금이 기회였다.
시몬이 로레인을 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줘 로레인. 난 세뇌된 게 아냐."
그녀가 이를 갈았다.
"그걸 어떻게 믿어? 이 허술한 인질극도 전부 세르네의 연출이라면?"
대화의 여지가 생겼지만, 로레인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럼 반대로 물을게. 내가 세뇌당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학교에서 대단한 접점도 없던 너희들이 갑자기 연인 행세를 하는 것도 이상하고, 뭣보다 세르네가 네게 저주 계약서를 쓰게 한 거. 그게 결정적인 증거야."
저주 계약서는 대상자가 계약을 어길 시 저주가 발동되는 무시무시한 흑마법 용품이었다.
시몬은 이제야 로레인이 어떤 오해를 했는지 눈치챘다.
"네 눈으로 직접 봐."
시몬이 아공간에서 스켈레톤 꺼내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여전히 경계하는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던 로레인이 스켈레톤이 건넨 서류를 살폈다.
"......."
계약서가 아니라 그냥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는 평범한 물품 주문서였다. 그녀의 표정에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이름을 쓰려는 걸 보고 무조건 저주 계약서라고 생각했는데.'
망원경으로는 계약서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격한 건, 세르네에 대한 강한 의심 때문이었다.
상습 마약중독자가 이상한 가루를 입에 털어 넣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과 같은 심리.
그녀는 오로지 시몬이 상아탑으로 가겠다고 서명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로레인이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교전 중지. 물러나세요."
로레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그녀의 하수인들이 자욱한 폭발구름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로레인 측 하수인들이나, 상아탑의 미행자들이나,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들도 피차 피해자가 발생하면 일이 엄청나게 복잡해지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힘 조절을 한 것이다.
"랭거스틴 시와 왕실에는 이미 보고했습니다. 수습에 전념하세요. 사고 피해액을 추정하고 부상자가 있는지 살피세요. 대기 중인 인원들도 전부 투입시켜서 빠르게 수습하겠습니다. 상아탑 상부에는 제가 따로 연락하겠어요."
그녀의 명령에 하수인들이 흩어졌다.
"에이이~ 재미없어라. 오해했다고 싸움을 중단시킬 필요까지 있어요?"
세르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오히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도발했다.
"피차 서로가 눈꼴사나운 건 마찬가지인데, 그냥 계속 붙어봐요."
"그렇게 나랑 싸우고 싶으면 키젠에서 해."
로레인이 성큼성큼 다가와 시몬의 손목을 붙잡았다.
"돌아가자. 시몬."
"어딜."
세르네도 시몬의 반대 팔을 붙잡았다. 시몬은 졸지에 두 팔이 붙잡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됐다.
"저랑 시몬은 따로 볼일이 있는데요~"
세르네가 시몬의 팔을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로레인은 언제나 그렇듯 차분한 포커페이스였다.
"키젠에 보고도 없이 여기 오는 것 자체가 학칙 위반이야."
"지금 그쪽도 밖에 나왔잖아요? 네프티스의 딸이라고 특혜 있나?"
"뭣보다, 난 시몬이 세뇌당하지 않았다는 것도 완전히 못 믿겠어."
로레인이 시몬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까 막 솜사탕 먹여주고 아이스크림 심부름하고, 끌어안고, 그런 거 다 뭔데?"
"......!!"
그 말을 들은 시몬은 귀까지 시뻘겋게 변했다.
"저, 저, 전부 다 본 거야?"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로레인은 작게 고개만 까닥했다.
"오, 오해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에헤이, 남녀 사이에 뻔하디뻔한 걸 왜 물으시나~"
세르네가 덥석 시몬의 팔을 끌어안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는 볼일이 있어요. 이번 임무평가랑 관련된 사항이기도 해요. 어련히 알아서 잘 돌아갈 테니 신경 끄라고요."
"전례가 있는데 어떻게 신경 꺼? 임무평가 관련이라면 여기서 제대로 보고해."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세르네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짠~ 나랑 시몬은 드레스덴 왕실의 무도회에 초대받았어요! 특례 1번이랑 2번 학생을 대상으로 한 지명의뢰. 왕실에서 1학년 최고의 남녀 한 쌍을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
로레인이 입을 앙다물었고, 세르네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알아들었죠? 우린 지금부터 무도회에 입을 옷 사러 갈 거예요. 많은 사람이 시몬과 상아탑 후계자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겠네요~ 다들 막 잘 어울린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무도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시몬과 상아탑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거예요!"
로레인은 말을 중간 부분부터 듣지 않고 아공간에서 통신 수정구를 꺼내고 있었다.
연결음이 들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엄마."
세르네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으며 상앗빛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17살이나 되어서 일단 엄마부터 찾는 꼴 하고는. 아~ 그럼 나도 오랜만에 아빠한테 연락해 볼까."
친부는 아니지만, 세르네의 아버지는 현 상아탑주였다.
"네, 네, 알았어요."
로레인이 통화를 마치고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 무도회. 나도 참가하게 됐어. 오늘 안으로 왕실에서 나까지 지명할 거야."
시몬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게 바로 권력이라는 건가.
로레인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무도회 옷 사러 간다고 했지? 셋이서 같이 가면 되겠네."
"......."
세르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삐쭉였다.
* * *
결국 셋이서 함께 옷을 사러 왔다.
랭거스틴에서 가장 크고 비싼 매장. 여기서 무도회 옷을 구매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나는 어디인가. 여긴 누군가.'
하지만 시몬은 매장으로 가는 내내 양옆에 있는 두 소녀의 압박감에 몸과 마음이 피로해져 갔다.
세르네는 뭐가 그렇게 공격적인지 툭하면 시몬을 이용해 로레인에게 신경전을 걸었고, 시몬은 계속 로레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죽을 맛이었다.
'벌써 우리 조원들 보고 싶다.'
7조의 세 사람과 있을 때는 마음 놓고 편안히 웃을 수 있었다.
반면 로레인과 세르네는 동갑내기 친구라는 느낌보단, 엄청나게 높고 까탈스러운 두 명의 사장님을 모시는 기분이었다. 실시간으로 기가 빨려 나갔다.
"시몬! 어때요?"
세르네가 화사한 와인 톤의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잘 어울려."
"그 칭찬 말고는?"
"......예쁘네."
세르네는 여성의 라인이 드러나는 과감한 복장을 택했다. 굳이 가슴이 파이거나 허벅지가 드러나는 옷만 골라 입고, 시몬 앞에 서서 그의 반응을 보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시몬은 학생 신분으로 가는 거니까 좀 더 평범한 옷을 입으라며 만류했다.
반면 로레인은 홀로 조용조용하게 옷을 골라 입는 중이었다.
그녀가 입는 옷도 한쪽으로 일관됐는데, 꼭 핑크핑크한 파스텔톤 옷이나 프릴 달린 공주님 감성 같은 옷만 고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시크한 분위기의 그녀와 잘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왜 그런 옷만 고르는 거야?"
시몬이 보다 못해 물었다.
"내 취향."
"......."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안타까워라~ 옷 고르는 센스가 유아기에서 멈춰 버렸네요."
그렇게 말하는 세르네는 호피 무늬에 검은 여우털이 달린 드레스 차림이었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접선까지 펼쳐서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시몬이 말했다.
"......넌 조금만 그 센스를 다운시키면 안 될까?"
"아! 저거 귀엽다!"
세르네가 들은 척도 안 하고 달려갔다. 귀엽다고 말한 게 뭔가 했더니 살갗이 비치는 드레스였다.
시몬이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터."
그때 프릴 달린 옷을 꺼낸 로레인이 조용히 말했다.
"엄마가 칙칙하고 격식 있는 옷만 입혀서 이곳저곳 데리고 다녔어. 그래서 차분한 건 좀 질리네."
"......아."
결국, 보다 못한 프로의식 있는 점원이 로레인에게 옷 한 벌을 골라줬다.
클래식하고 깔끔한 블랙 드레스였는데 그녀가 옷을 입고 나오자 점원과 시몬은 물론 지나가던 손님들 마저 입을 벌렸다.
'와, 진짜 사람이 달라 보여!'
17세 소녀가 아니라 세련된 어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무엇보다 그녀와 잘 어울렸다.
네프티스가 칙칙한 옷만 입히려고 한 게 아니라 원래 저런 스타일이 너무 잘 어울려서 다른 선택지가 없던 거였다.
로레인은 사뭇 아쉬운 듯 핑크색 공주님 드레스를 보았지만, 시몬과 점원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쏟아낸 뒤에야 아쉬움을 접었다.
"아, 남자분도 한 벌 구매하실 거죠?"
점원이 다음 타깃을 시몬으로 정했다. 그녀는 크게 망설임 없이 두 개의 턱시도를 뽑아서 비교하다가 한 벌을 시몬에게 건넸다.
"이걸로 입어보시겠어요?"
시몬은 이런 옷을 사는 게 처음인지라 순순히 받아들고 갈아입는 곳으로 갔다.
잠시 후 시몬이 턱시도를 쫙 빼입고 나타났다.
그가 나비넥타이를 살짝 손본 다음 물었다.
"어때?"
"......."
"......."
세르네와 로레인, 그리고 점원까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세르네는 조용히 계산할 돈부터 꺼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