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44화
무도회장에는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귀족들은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술과 약물에 찌든 듯 눈은 회까닥 돌아가 있고, 며칠은 안 씻은 듯 꾀죄죄한 몰골에, 빗물에 젖어 거지꼴이 된 이 남자가 정말로 왕실의 셋째 왕자 안드레라니.
"차암~ 운명이란 건 가혹해. 그렇지?"
안드레의 입에서 혀 꼬인 발음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키젠에서 쫓겨나고, 왕위 계승도 완전히 물 건너간 쩌리 신세가 됐는데."
안드레의 죽은 눈동자가 시몬 쪽으로 향했다.
"누구는 이뤟게! 멋진 옷 쫘으악 빼입궈! 양옆에 예쁜 아가씨들 하나씩 끼궈! 희희낙락 아주우 즐기고 있눼! 흐흫! 크흡......!"
푸하하하하하!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무도회장을 가득 울렸다.
그의 몸이 흐느적거릴 때마다 빗물이 뚝뚝 떨어져 레드카펫을 적셨다.
"차암~ 뻔뻔해!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새끼가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다니!"
"오라버니!"
몰리 공주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뛰어왔다.
"제가 분명히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드렸......!"
"입 닥쳐어어!"
안드레가 발작적으로 소리치자, 몰리 공주마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내가 아직도 널 무서워할 것 같냐! 난 이제 잃을 게 없어! 이미 밑바닥을 찍은 인생에 뭐가 두렵겠느냐! 흐, 흐흫! 하하하하!"
웅성 웅성 웅성.
귀족들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안드레 또한 이 무도회의 주인공인 왕족이었으니, 오늘 밤만큼은 누구도 그에게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안드레의 시선이 시몬에게 똑바로 향했다.
"......"
그의 시선을 받은 시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
로레인이 뒤따라 일어나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굳이 상대할 필욘 없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내 일이야."
키젠에서 안드레와 엮여 버린 이상, 지금의 대면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진흙탕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시몬은 치미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서 예법에 따라 인사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안드레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그의 군화는 카펫을 밟을 때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뻔뻔한 새끼! 이런 뻔뻔한 새끼! 전부 네놈 때문이다! 네가 결투평가때 상식적으로만 대처했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어!"
그가 여기서 말하는 '상식적'이라고 함은, 본인이 밀어준 말콤이 흑기사 갑주를 입었을 때, 시몬이 왕실의 체면을 생각해 결투평가에서 져줘야 했다는 뜻이었다.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입학식 때 선서한 대로, 매사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고저 없이 덤덤하게, 시몬은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동등한 키젠 학생의 약점을 잡아 하인처럼 부린 것도, 노블의 권력으로 학생들을 겁박한 것도, 동아리 예산을 독점하고 사적으로 이용한 것도, 모두 왕자님이 하신 행동이었습니다."
그 행동에 대한 리스크가 돌아갔을 뿐이다. 시몬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X랄!"
술기운에 얼굴이 시뻘게진 안드레가 삿대질했다.
"관례가 왜 관례인 줄 알아? 과거의 사례들이 굳어져 문화가 되면 그게 관례인 거야! 나만 잘못했냐? 동아리 권력을 이용한 게! 예산으로 수작 쓴 게! 남들 다 하는 일이고 안 하는 사람만 바보 되는 게 현실이야!"
그의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했고, 그러다 내가 운 더럽게 걸린 거지! 애초에 결투평가에서 네가 우리 왕실의 R자 상징을 본 순간 관례대로 결투평가를 포기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네가 관례를 깨버려서 모든 게 꼬인 거야! 어떤 미친놈이 왕실의 흑기사 갑주를 입고 있는 사람을 두들겨 패?"
"그런 관례는."
시몬이 눈을 감았다.
"제 알 바 아닙니다."
웅성 웅성 웅성.
상당히 강하게 나오자 귀족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단어를 정정해 드리겠습니다. 관례가 아니라. 악습입니다."
"이 새끼가......!"
안드레가 격분하며 시몬에게 달려들려하자, 즉시 왕실의 정예 기사단인 흑기사들이 안드레의 양팔을 붙잡았다.
"왕자님."
"놔봐!"
안드레가 격렬하게 팔을 움직여 그들을 쳐냈다.
"그래, 좋아. 니가 그렇게 잘난 척 나를 무시한다면!"
안드레가 시몬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로 그 관례로 널 박살 내겠다!"
주위의 인파들이 바다 갈라지듯 주위로 물러났다.
"아아~ 최악의 사태로 전개되네요."
세르네가 중얼거렸다.
안드레가 향하는 곳은 처형대였다. 안드레가 온갖 넝쿨 식물로 장식된 처형대 위로 올라가 종을 흔들었다.
"나는 왕의 핏줄을 물려받은 안드레 드레스덴이다! 시몬 폴렌티아!"
그의 손가락이 시몬으로 향했다.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 * *
쏴아아아아아!
빗줄기는 아까보다 더 굵어졌다.
연회장의 앞의 넓은 공터. 연회객들이 우산을 든 채 모여들어 있었다. 그 널찍한 공터 중앙에는 두 소년이 마주 본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시몬, 아직 안 늦었어."
로레인이 시몬을 말리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저래 보여도 산전수전 다 겪은 키젠 2학년이야. 이 승부는 너무 무모해."
세르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의해요. 2학년이 상대인 건 좀 아니죠~"
오랜만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키젠 2학년 한 명이 1학년 열 명의 가치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지옥 같은 경쟁과 스트레스를 견뎌내고 2학년이 된 학생들은 두 말할 것 없이 뛰어났다.
사실상 어른과 아기의 싸움. 두 사람의 매치가 성사됐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당연히 핸디캡 매치로 해야지."
안드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결투를 신청한 장본인인 안드레 본인 또한 말이 안 되는 매치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내 명예회복을 위한 결투다.'
안드레 또한 떳떳한 승리를 원했다.
결투에서 이겨놓고, 옹졸하게 전 후배나 괴롭히는 패배자라는 누명만 돌아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뭐든 말만 해. 1학년에서만 배우는 흑마법으로 승부할까? 아니면 제자리에서 움직이면 패배? 팔다리 한 짝씩 안 쓰기?"
그러니 핸디캡을 덕지덕지 붙여서 승부가 조금이라도 정당하게 보여야, 자신이 승리했을 때의 명예도 커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핸디캡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그때 로레인이 앞으로 나섰다.
학생은 키젠의 자산이고, 키젠은 외압에서 학생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한 가지 주는 걸로 할게요."
안드레가 인상을 썼다.
'역시 키젠 놈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이쪽이 핸디캡을 줘야 왕족이 자비를 베푸는 모습이 되는데, 굳이 또 핸디캡이 아닌 플러스를 저쪽에 주려는 꼴이 아니꼬웠다.
"그래, 그것도 좋지. 하지만 조건이 있다!"
안드레가 두 팔을 펼쳤다.
"네 도움을 받아서도 시몬이 진다면, 네가 내 밭 밑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거드는 거겠지?"
받아들여질 리 없으니 내뱉는, 아무 영양가도 없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네."
로레인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오히려 안드레와 지켜보던 귀족들이 당황해했고, 시몬도 마찬가지였다.
"로, 로레인!"
"네가 이기면 되잖아."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렇기는 한데."
"그럼 됐어."
안드레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도움을 하나 주는 걸로 충분하겠냐? 2학년과 1학년의 싸움인......."
"그럼 저도~"
세르네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와 시몬의 오른팔에 착 달라붙었다.
"시몬에게 도움을 하나 줄게요. 그 대가로 시몬이 지면 상아탑 후계자의 무릎. 괜찮지 않아요?"
"세르네!"
시몬은 이 두 사람이 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흠.'
세르네와 로레인을 음흉한 눈으로 훑어본 안드레가 입술을 할짝였다.
이기면 빅뉴스다. 저 두 괴물들의 흑역사는 평생토록 이어질 테고, 그때마다 자신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다.
그리고 키젠과 상아탑을 물 먹인 아이콘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암흑연합의 모든 반 키젠파가 자신을 주목할 거고, 힘을 실어줄 것이다.
자신을 정쟁 따위로 희생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기사회생의 그림을 그린 안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지!"
그렇게 1학년 시몬과 전 2학년 안드레의 결투가 성립됐다.
시몬은 로레인과 세르네의 도움을 하나씩 받고, 안드레는 전력을 다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이어서 작전타임을 가졌다.
"난 이거."
로레인이 자신의 단검 한 자루를 시몬에게 건넸다. 검날 전체가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떤 종류의 충격이라도 대신 견뎌주는 단검이야. 내 칠흑으로 완충했어. 충격을 견딜 때마다 단검 날의 빨간색이 점점 옅어지다가, 빨간색이 완전히 사라지면 평범한 단검으로 돌아와."
시몬은 단검을 붙잡아 허공에 휘둘러 보았다. 가볍고 그립감도 좋았다.
"고마워, 로레인."
시몬이 감사의 인사를 하기 무섭게,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세르네가 와락! 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기분 좋은 꽃향기가 뒤에서 훅 밀려들고, 시몬의 몸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같잖은 수작질이라고 생각한 로레인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뭘요~ 저도 제 선물을 드리는 건데요?"
승리의 미소를 보낸 세르네가 고개를 쭉 내밀더니 시몬의 귓가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1학기에 합동 수업했을 때, 제가 체내 칠흑 분화 가르쳐 드린 거 기억나시죠?"
"어? 어어."
"그 효과를 그대로 드릴게요."
잠시 후 그녀가 떨어졌다. 몸에 깃털이 붙어 있는 건지 정신이 크게 고양된 것을 느꼈다.
일종의 간이 콤펠로 효과였다.
'이러면.'
시몬의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로레인의 단검을 꾹 쥐었다.
'그냥 질 수가 없는 거 아닌가?'
아직 키젠 2학년의 실력을 모르니 속단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시몬은 자신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시몬이 새로운 힘들을 점검하는 사이, 결투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심판 역할은 옛날에 키젠에 다녔었던 왕실 집사장이 맡기로 했다.
룰은 키젠에서의 결투평가와 동일했다. 금지된 흑마법을 사용하거나, 경기장으로 정한 선 밖으로 나가면 실격. 상대에게 항복을 받아내거나 전투불능으로 만들면 승리였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시몬과 안드레가 앞으로 나왔다.
안드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참! 우리끼리도 내기 하나 걸어야지 않겠나?"
"말씀하시죠."
"내가 이기면 키젠을 그만두는 건 어때? 네가 내 인생을 망쳤으니,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야지."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 그럴까, 안드레는 갈수록 점점 더 큰 무리수를 두고 있었다.
퇴학이란 말에 로레인의 안광이 살기로 번뜩였다. 반면 세르네는 꽤 끌리는 제안이었는지 팔짱을 낀 채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반대로 제가 이기면요?"
"뭐든 말해."
시몬은 조용히 가슴에 매달려 있는 피어의 분신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쳤다.
피어가 머릿속으로 내용을 말했고 시몬은 동의했다.
"현재 드레스덴 왕국 영토에 존재하는 던전들 중."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시몬은 조용히 자신의 조건을 말했다.
"제가 원하는 한 곳의 '독점 공략권'을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
안드레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무슨 던전이든 넘겨줘야 한단 건데, 던전의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지금 네가 어떤 요구를 하는진 알고 있는 게냐?"
"싫으시면 그만두시죠."
안드레가 발끈했다.
시몬이 자신감에 차 있는 정도라면, 안드레는 절대 질 수가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기사회생이 걸려 있는 결투다.
안드레가 가슴 위로 R자를 그리며 선언했다.
"드레스덴 왕실의 이름으로, 시몬 폴렌티아의 조건을 수락하겠다!"
무도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리는 앞에서, 안드레는 약속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등을 돌려 걸어갔다.
[크하하! 당분간 그 던전엔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일이 잘 풀렸군!]
머릿속으로 피어가 말했다.
두 사람이 요청할 던전은, 새로운 에이션트 언데드가 숨어 있을 것으로 유력한 장소였다.
공략권을 가진 왕국 측에서 출입을 엄중하게 통제해서 갈 방법이 없었는데, 이렇게 합법적인 루트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이긴 뒤의 이야기지만요.'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리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되돌아갈 곳은 없다 소년! 상대도 방심 없이 전력으로 나올 거다.]
'네,'
언젠가는 매그너스와도 싸워야 했고, 2학년은 언제가 되든 뛰어넘어야만 하는 산이었다.
시몬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집사장이 입을 얼었다.
"그럼 지금부터 안드레 왕자님과 시몬 폴렌티아 학생의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