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64화
그날 밤.
맹독학 조교들은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다녔다.
기숙사 측에 양해를 구하고, 보이콧에 참여한 맹독학 지망생들 한 명 한 명 찾아가 직접 별야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별야 교수님께서 직접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클라우디아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보이콧에 참여하는 각 반의 학생들을 전부 기숙사 앞으로 불러모았다.
"어쩔 거야? 클라우디아."
머리에 커다란 땜빵이 있는 남학생이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BMAT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그냥 무시하자."
"맞아. 사과부터 해도 모자랄 판에, 조교들 뿌려서 이딴 식으로 집합시키는 건 여전히 우릴 물로 보는 거야."
몇몇 학생들은 별야의 수업을 규탄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별야를 물리쳐야 할 '적'처럼 여기고 있었다.
"가보자."
하지만 리더 격인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별야 교수님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거라면, 우리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쓸데없는 말만 나불대거나, 계속 독 먹는 수업을 강행한다고 하면 그냥 듣지 말고 나와 버리자."
"응."
"그게 맞지."
클라우디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이 보이콧에 가장 열정적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평범했던 학생들이 더 극단적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은 자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명심해. 우리의 목적은 별야 교수님의 은퇴가 아냐. 독 먹는 수업을 중지시키고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케 하는 것. 단지 그뿐이야."
그렇게 클라우디아와 학생들은 조교들이 알려준 약속장소로 향했다.
약속장소는 키젠 교정에서도 구석에 위치한 연구원 건물이었다. 어둡고 먼지 날리는 계단을 지나서 지하실로 내려왔다.
"분위기 음침하네."
아무것도 없이 그냥 휑한 지하실이었다.
"하여간, 기선을 제압하려는 목적이 틀림없어."
클라우디아가 좀 진정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잠시 후,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별야와 조교들이 지하실로 내려왔다.
"......."
학생들은 묘한 긴장감이 서린 눈빛으로 별야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앞에 섰고, 그 뒤를 조교들이 일렬로 쭉 늘어섰다.
"다 왔냐?"
별야가 말했다. 학생들 중에서는 대표인 클라우디아가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네, 다 모였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님."
"어어, 그랬지."
별야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라우디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학생들에게 독을 먹이는 수업을 포기해 주실 건가요?"
"내가 미쳤냐."
학생들의 표정이 곧바로 험악해졌다.
클라우디아는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담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뭐죠?"
별야가 고슴도치처럼 삐쭉삐쭉한 회갈색 머리카락을 문질러 긁었다.
"어떤 놈한테 부탁받았다."
"네?"
"너희들이랑 대화해 보라던데."
이유 모를 이야기를 한 그녀가 뒷짐을 지고 주위를 맴돌았다.
"생각할수록 웃기단 말이야.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을 위해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다니."
별야는 시몬이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네까짓 것들은 몰라도 돼."
히죽 웃으며 걸음을 멈춘 별야가 클라우디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대화하자. 독을 먹이는 항체 수업은 이제 곧 끝나거든? 그 이후에 내가 가르칠 흑마법의 정체를 알려주마."
"!"
클라우디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냥 가자! 독은 계속 먹인다잖아. 더 이야기할 것도 없어!"
아까 반대했던 남학생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클라우디아는 그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말했다.
"알려주세요."
별야가 픽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손안에서 놀라운 속도로 마법진이 구축되더니, 그 위로 올리브색의 가시덩굴이 쑤욱 올라왔다. 이내 사출을 정지한 그녀가 덩굴을 붙잡고 휘둘렀다.
부아아아앙!
학생들이 기겁하며 자세를 낮췄다. 그들의 머리 위로 휘둘러진 가시덩굴이 지하실 벽면에 부딪혔다.
치이이이이!
그러자 가시덩굴이 부딪힌 곳을 기점으로, 지하실 벽이 액체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게?"
"독이었어?"
클라우디아가 설명을 요구하듯 별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도 익히 아는 기술, '맹독채찍'이다."
"이, 이게 맹독채찍이라고요?"
"말도 안 돼!"
흔히 '포이즌 휩'이라고도 부르는 이 기술은 포션의 독을 칠흑과 함께 뭉친 다음, 채찍처럼 길게 휘두르는 원거리 공격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맹독채찍은 훨씬 크고 굵직하고 위력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맹독포션을 쓰지 않았다.
바로 그 사실에서 클라우디아는 깨달았다.
"......설마 칠흑맹독계?"
"역시 엘리트야. 바로 맞췄네."
한때 맹독학은 '칠흑역학'의 하위 학문이었다.
불과 얼음, 바람과 땅, 심지어는 마그마나 미지의 원소를 일으키는 룬어들도 있는데, 독을 일으키는 룬어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칠흑맹독계' 흑마법은 에프넬과의 100년 전쟁에서 완전히 사장당했다. 가장 큰 문제는, 칠흑맹독계로 사용하는 독의 배합이 항상 일정하다는 점이었다.
똑같은 독에 익숙해진 프리스트들은 중독되어도 정화마법 한 번에 벗어날 수 있었고, 심지어 몇 번 맞다 보면 독에 대한 항체까지 생겨서 나중에는 정화마법을 쓸 필요마저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몬스터들마저도 칠흑맹독계의 독에 적응한 개체들이 다수 나타났다.
결국 맹독술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연금술'에 손을 댔다. 독의 배합을 인위적으로 복잡하게 바꿔서 프리스트들이 쉽게 정화하지 못하는 독, 몬스터들에게도 듣는 새로운 독들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현대 맹독술사들의 기원이다. 현대의 맹독술사들은 독이 든 포션이나 용기를 이용해 그것을 흑마법으로 흩뿌리거나 독성을 더 강하게 만드는 스타일을 구사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장된 칠흑맹독계를 가르치겠다고?'
별야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다 보이네. 그럼 이건 어떠냐?"
그녀가 반대쪽 손바닥에 마법진을 펼쳤다.
클라우디아가 보기에 분명히 똑같은 '맹독채찍' 마법진이었는데, 이번엔 분홍색의 가시덩굴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붙잡아 반대쪽 벽에 휘둘렀다.
철퍽!
벽에 맹독채찍이 부딪쳤지만, 아까와는 달리 녹아내리지 않았다. 대신 벽의 색깔이 누렇게 변질하며 점점 더 넓은 범위로 퍼져 나갔다.
'마법진의 구조는 같았는데 독의 종류가 달라졌어!'
다른 학생들도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조용해졌다.
"내가 가르칠 건, 개성이라곤 없는 그 뻔한 칠흑맹독계가 아니야."
별야갸 팔을 내리며 말했다.
"내가 직접 개발한 오리지널이다."
"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별야 오리지널의 칠흑맹독계는 과거와 현재의 좋은 점만 취합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거처럼 독의 배합이 뻔해서 파훼 당할 리도 없고.
현재처럼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내는 등, 번거로운 작업에 시간이 낭비되는 일도 사라진다.
"이 기술을 쓰려면 피를 독으로 바꾸는 '혈독'의 습득이 필수적이야. 그래서 혈독을 습득하기 전에 너희들의 몸을 준비시키려고 항체를 쌓아둔 거지. BMAT 3차 전에, 이 기술을 너희들에게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
지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특히 얼굴이 시뻘게진 클라우디아는 감히 별야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이제 니들에겐 딱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별야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조교들이 바쁘게 움직여 학생들의 발 앞에 독 세트를 내려놓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보이콧으로 수업을 빠진 만큼, 밀려 있는 독들을 내일까지 전부 먹어치우고 항체를 갖춘 뒤에 오는 거야."
내일까지란 말에 학생들의 입이 벌어졌다.
"이건 다 니들이 지랄해서 벌어진 일이야. 급하게 먹느라 부작용이 생기든 뭐든 난 신경 안 쓸 거다. 대신 니들이 진도를 따라잡는다면, 예정대로 BMAT 전에 내 오리지널 칠흑맹독계를 전수해 주마."
그녀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내가 니들을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지. 니들이 정말로 그 인간의 보편적 권리니 뭐니 하는 중대한 사명 때문에 내 수업을 거부한 걸 수도 있잖아? 네크로맨서인데도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클라우디아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그런 사람은 지금 바로 등을 돌려서 떠나도 좋다. 진정한 인권운동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리고 너희들의 그릇에 감탄하며, 떠나는 길에 박수는 쳐주마."
"......."
그렇게 10분이 지났다.
지하실에 들어온 학생들 그 누구도 나가지 않았다.
키젠에서의 생존, 그리고 목적을 잃은 투쟁과 한 줌의 자존심. 네크로맨서라면 저울질할 필요도 없는 가치였다.
전원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입 한번 뻥긋하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다 내 지시에 따르는 걸로 알겠다."
별야가 휙휙 손짓했다.
"그거 들고 나가봐. 내일부터는 수업에 자리가 꽉 차길 바라마."
"네!!"
클라우디아와 학생들이 허겁지겁 독이 든 케이스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어느새 찬바람이 쌩쌩 부는 밤이었다.
"하아! 하아!"
"클라우디아! 같이 가!"
클라우디아는 독이 든 케이스를 가슴에 소중히 꼭 끌어안고 달리고 있었다.
'난 정말 멍청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구제불능이야!'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잔뜩 매달려 있었지만, 적어도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소리 내어 와하하! 큰 소리로 웃어도 보았다. 미친 여자라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드디어 이 괴로운 단체행동을 멈춰도 된다는 해방감에. 다른 과목 지망생들 못지않은 멋진 교수에게 배울 수 있다는 안도감에.
키젠에 입학한 뒤로 제일 행복한 밤이라고, 클라우디아는 생각했다.
* * *
다음 날.
클라우디아 무리가 별야에게 불려갔다는 소식은 키젠에 쫙 퍼졌다.
"누가 이긴 거래?"
"학생들 쪽이 이겼겠지. 별야 교수님이 먼저 애들 부른 거 보면 몰라?"
"근데 걔들 아침에 얼굴에 막 반점 있고 난리였잖아. 독 먹었던 것 같던데."
기숙사 복도에서부터 별야와 클라우디아 무리에 대한 화제가 끊이질 않았다.
"클라우디아랑 거기 갔던 애들이 하나같이 말을 안 해."
딕이 말했다. 그도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대체 별야 교수님께 불려간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으으으! 알고 싶어 죽겠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시몬은 싱글싱글 웃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감사합니다, 별야 교수님!'
오늘 오전 수업은 비었다. 원래는 사령학수업 시간이었지만, 7조 네 명 전원 사령학을 포기해서 공백이었다. 이 시간을 BMAT 훈련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7조 전원 모두 일찍 일어나 외출허가서를 발급받고 해변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몬과 딕은 키젠 입구에 쭉 서 있는 마차 한 대를 골라 탔고, 얼마 안 가 해변가에 도착했다.
해변에는 오늘도 사람이 많았다. 수업이 없는 학생들 다수가 바다에 들어가 수중전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시몬, 딕! 여기에요!"
"왤케 늦어!"
카미바레즈와 메이린은 벌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스트레칭 중이었다. 시몬과 딕도 합류한 뒤, 조장인 메이린이 모두를 주목시키며 말했다.
"오늘이 BMAT 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바닷가 훈련이야! 후회 없도록 열심히 하자!"
"오케이."
"네!"
네 사람이 힘껏 모래사장을 달려가 바닷가로 뛰어들었다.
물살을 가르며 가장 빠르게 헤엄치던 시몬이 팔을 머리 위로 뻗었다.
<본 아머 - 핸드건 모드>
처억! 척!
척!
아공간에서 스켈레톤의 뼈들이 날아와 오른팔에 장착되었다. 시몬은 그대로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꼬르르르륵!
우선 스켈레톤과의 사념 연결상태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네.'
언데드들은 소금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위력이 떨어지지만, 돌연변이 동아리에서 벤야의 도움을 받아 뼈가 견딜 수 있는 약품을 발라두었다.
그리고 핸드건의 사출구 앞에 마법진 하나를 펼쳤다. '칠흑어뢰'의 중추가 되는 수식만 떼어내어 새롭게 개발한 흑마법이었다.
'발사!'
사출구에서 뼈들이 발사되는 동시에 마법진을 통과했다. 그러자 바다를 가르는 탄환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칠흑어뢰의 물저항을 줄이는 수식을 사용한 것이다.
'오케이, 처음은 성공!'
시몬이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시간을 조금 써서 마법진을 그린 다음, 핸드건에 그대로 내렸다.
마법진이 핸드건의 뼈탄환에 녹아 흐르듯 코팅됐다.
시몬은 바로 수면 아래를 겨냥하고 발사명령을 내렸다.
투콱! 투콱!
아까와 같은 위력으로 뼈들이 날아간다. 이 정도면 상대가 키젠 학생이라도 맞출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공격 마법은 문제없네. 그럼 마지막으로.......'
시몬이 머리 위에 아공간을 열고 새로운 소환수를 바다로 불러들였다.
첨벙!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물보라가 일어나며 소환수가 내려왔다.
시몬이 그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달리자. 데이모스."
이번 3차 BMAT의 목표는 전체 1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