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276화 (276/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76화

라흘 교수의 지시를 가볍게 무시한 레테는, 미사실에서 빠져나와 긴 성당청 복도를 성큼성큼 거닐고 있었다.

웅성웅성.

그녀를 발견한 에프넬 학생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선발 1번 학생이자, 차기 유력 성녀 후보자로 손꼽히는 레테는 어딜 가든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다.

"레테 자매님!"

그때 하얀 에프넬 교복을 입은 소녀가 레테의 이름을 부르며 쫄래쫄래 뛰어왔다.

"?"

레테가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반인 여학생이었다. 그녀가 레테의 옆으로 와서 성호를 그렸다.

"라우스(Laus), 레테 자매님.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라우스. 무슨 일 있슴까?"

"아. 그게."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말했다.

"이번 심방(尋訪), 혹시 누구랑 같이 갈 거예요?"

에프넬에서는 지상에 내려가서 수행하는 파견 임무를 '심방'이라고 불렀다.

"혼자~"

"네? 네 명이서 한 조로 가는 거잖아요!"

"귀찮슴다. 그리고 네 명이서 할 일이면 나 혼자로도 충분함다."

"역시 레테 자매님이세요!"

벌써 심방 시즌이구나. 귀찮아지겠네.

레테가 무료한 표정으로 치마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하품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그녀를 향해 에프넬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라우스! 레테 자매님!"

"혹시 팀 구하셨어요?"

"레테 자매님!"

레테를 조에 포함시키는 것만큼 든든한 보험은 없으니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물론 레테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나 혼자 갈 거니까 제발 내버려 두십쇼."

레테가 시니컬하게 대꾸하며 걷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레테가 매달고 다니는 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은 학생을 대동하고 있는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학생이 비율이 20%대로 낮은 에프넬에서, 극도의 인기를 끌고 있는 소년이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눈부신 적발에 조각 같은 외모, 종이가 베일 듯 오똑한 콧대와 부드러운 미소는 여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그가 레테를 발견하고는 슬쩍 미소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라우스! 레테 수석! 좋은 아침이에요."

그가 손을 들고 인사했지만, 레테는 쌩 지나가 버렸다.

"라우스임다, 로맹 차석. 좋은 아침이니 계속 지나가십쇼."

"아하하!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요?"

레테는 무시하면서 계속 걸었고, 로맹은 뒤로 걸으면서 그녀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뭠까, 이번 심방은 나 혼자 할 건데요."

"아, 아니, 그쪽이 아니라 르네 교수님의 성물제작 과제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 궁금해서요."

"그쪽이 신경 쓸 문제 아님다. 지나갈게요."

"사실 내가 묵주 재료로 쓸 '달진주'를 구할 장소를 찾았거든요."

달진주라는 말에 레테도 살짝 반응을 보였다.

당연했다. 달진주는 최상급 성물로서 찾기만 하면 과제 최상위 점수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그가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오늘 저녁에 바로 열차 타고 지상으로 내려갈 건데, 같이 갈래요?"

주위에 몇몇 여학생들이 부러운 소리를 냈지만, 레테는 관심 없다는 듯 차갑게 손을 흔들었다.

"성물제작 과제 1등 미리 축하함다. 그리고 그 귀한 걸 나도 가져가면 당신 순위가 내려갈 수 있다는 건 생각 못 해봤어요?"

"괜찮아요. 레테 수석."

로맹이 눈을 찡긋했다.

"당신의 유일한 라이벌로서, 내 작은 배려예요. 우리 같이 올라가죠."

"하-"

아직도 끈질기게 뒤쫓아오는 로맹을 보며, 레테도 슬슬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라흘 교수님한테 혼나서 좀 얌전히 있어줬더니, 진짜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레, 레테 수석?"

"뭔 놈의 라이벌? 같잖아 죽겠으니까 지랄도 정도껏 해."

그녀가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학교엔 없었다.

"수석이랑 차석이랑 라이벌이지 뭐겠어요?"

로맹이 하하 웃으며 따라붙었다.

"그리고 요즘 맨날 입고 다니는 그 흰 로브, 조오금 촌스러운데."

로맹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상에 내려가면 내가 새로 사주......."

부아아아아앙!

로맹은 난데없이 자신의 시야가 빙그르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이어지는 등과 목에 오는 엄청난 통증. 정신을 차리니 그는 바닥에 퍼질러져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소음이 난자했다.

"더러운 손으로 어딜 손대?"

레테가 차갑게 뇌까렸다.

동시에 로맹 또한 인내심의 선이 뚝 끊기는 걸 느꼈다.

그가 거칠게 몸을 일으켜 그녀의 뺨을 갈기려는 그때.

쩍!

복부에 그녀의 신발이 틀어박혔다. 그가 허억! 하는 소리를 냈다.

'수, 숨을 못 쉬겠......!'

터업.

레테가 로맹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에프넬은 이거 하나만큼은 좋아."

쾅!!!

그러곤 유리 벽에 처박아 넣었다. 그 튼튼하다던 강화 유리 벽 전체가 쩍쩍 금이 가며 갈라졌다.

"줘팬다고 애가 죽을까 걱정 안 해도 되고."

레테가 스산한 안광을 번뜩이며 로맹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질질 끌고 가다가 안면을 벽에 들이밀었다.

"줘팬다고 얼굴이나 몸에 흉터나 상처가 남지 않을까 걱정 안 해도 되고."

드드드드드드드득!

그녀가 그대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로맹의 안면이 벽에 갈려 나가며 끔찍한 소리가 났다. 로맹이 지나갈 때마다 물감을 짠 것처럼 벽에 시뻘건 혈선이 길게 남았다.

"설령 죽기 직전까지 줘패도, 에프넬의 위대한 치유술사들이 깨끗하게 치료해 주고 되살려 줄 테니까 걱정이 없네."

백마법은 쓰지도 않았다.

탄탄한 기본기의 성투와, 거대한 신성량으로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무위.

차석이라던 2위 로맹은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역시- 라이벌다운 대등한 싸움이었슴다. 로맹 차석."

검지 끝으로 뺨에 튄 로맹의 피를 닦아낸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너보다 더 센 애들도 가만히 있는데, 내신으로 차석 딴 주제에 말이 많아."

얼굴이 피범벅이 된 로맹은 눈을 까뒤집은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주위엔 깊은 정적이 흘렀다.

레테가 뒤를 돌아보자, 구경하던 에프넬 학생들이 얼른 눈을 피했다.

"거기 자매들. 이 새끼 치유술사에게 데려가 주십쇼."

"네, 넵!"

학생들이 몰려들어 쓰러진 로맹을 부축했고, 레테는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 * *

달칵!

기숙사 방에 도착한 레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라우스~ 레테 자매님!"

책상에서 숙제를 끄적거리고 있던 룸메이트 소녀가 양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다. 레테도 고개를 까닥하는 것으로 인사했다.

"라우스, 리리넷."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떠들썩하네."

"저도 모름다."

시치미를 뗀 레테가 제일 먼저 어깨에 걸친 로브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겉은 하얀 로브였지만 안에는 까만 안감이 보였다.

"아, 자매님께 편지 와서 책상에 뒀어요."

"편지?"

"네, 그 맨날 오시던 노파분이......."

"!!!"

하루 종일 무표정하던 레테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확 돌았다.

"설마!"

그녀가 후다닥 달려가 책상 앞에 놓여 있는 편지를 보았다.

<레테에게>

이 수려하고 우아하면서도 품격이 배어 나오는 필체. 누가 썼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야 몇천, 몇만 번은 더 본 필체였으니까.

"으앙아아아!! 선생니잉임!"

드디어, 안나에게서 편지가 왔다!

레테는 너무 기쁜 나머지 편지를 품에 안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암흑연합에서 신성연방으로 편지를 보내려면 다소 비공식적 루트를 사용해야 했는데, 그 전파자가 바로 편지를 전해줬다는 노파였다.

리리넷이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레테 자매님도 사실 이런 소녀 같은 면모가 있었다! 하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요? 엄청 궁금해!"

"확 씨, 기분 좋으니까 좀 닥치십쇼."

그녀는 바로 목욕재계부터 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안나의 편지를 읽고 싶었다.

몸을 깨끗하게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이내 편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이 힘겨운 에프넬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

한 줄기 빛.

편지를 열어볼 생각에 두근두근 심장이 뛰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근데 레테 자매님~"

리리넷이 끼릭 의자를 돌리며 말을 걸어왔다.

"누구한테 온 편지길래 그렇게 좋아해요? 혹시 남자?"

"내가 미쳤슴까. 확 맞기 싫으면 조용히 좀 해주세요."

그녀는 무척이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럽게 봉투의 봉인을 뜯고 빳빳한 편지지를 펼쳤다.

하얀 종이 안에 그려진 저 우아한 까만 필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이 행복이란 물질로 잠기는 것만 같았다.

<안녕 레테? 안나 선생님이야. 요즘 에프넬 생활은 어떠니?>

"아으으응!"

레테가 행복감에 겨운 소리를 내며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얼굴에는 잔뜩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게 핑크빛 세상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그때.

툭.

편지 봉투 안에서 또 다른 편지가 떨어졌다.

알고 보니 편지가 두 장이었다. 레테가 의아한 눈으로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시몬이 네가 꼭 봐야 한다며 쓴 편지가 있어. 여기 동봉해서 보낼게.>

"......!!"

그녀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 그 자식의 편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걔가 뭔데 나한테 편지를 보내?

꼭 봐야 한다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폭탄이라도 보는 듯 움찔거리던 그녀가 이내 조심스럽게 떨어진 편지로 팔을 뻗었다.

부르르르르.

팔의 떨림이 엄청나게 심했다. 그녀가 얼른 손을 회수해 가슴 앞에 세우며 당혹스러워했다.

'뭐, 뭐야? 나 왜 긴장하는데?'

난데없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맺혔다.

편지를 집으려다가 망설이기를 몇 번.

'아이 씨! 자존심 상하게 뭔 짓이야!'

그녀가 용감하게 편지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 내용을 살폈다.

<안녕, 레테. 잘 지내고 있어?>

그녀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방학 때는 도와줘서 고마웠어! 평생 은인이라고 생각할게. 이스라필 님께 안부도 물어봐 줘. 란은 잘 있어? 가끔 생각나서 보고 싶네.>

보고 싶네.

보고 싶네.

보고 싶긴 개뿔!

레테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편지를 내려갔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내려갔다.

<열차에서 얻어낸 증거물 기억하지? 거기서 '유다'라는 이름이 있는지 찾아봐 줘.>

"아! 이 새끼가 진짜!"

그녀가 편지를 퍽 소리가 나게 던졌다. 안부 인사는 앞에 살짝만 쓰고, 지가 부탁하고 싶은 것들만 잔뜩 써놨다.

분노로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근데 나 왜 안부 인사 짧게 쓴 걸로 서운해하고 있냐.'

레테가 멍해 있는 그때, 룸메이트 리리넷이 그녀가 집어 던진 편지지를 슬쩍 읽었다.

"어! 남자다! 남자 글씨체 맞죠? 와 이거 뭐예요? 가끔 생각나서 보고 싶다고? 꺄아아악......!"

레테가 싸늘한 표정으로 팔을 세웠다.

찬란한 빛과 함께 허공이 열리더니, 그녀의 신수인 새끼용 '란'이 튀어나와 리리넷을 휘감았다.

"꺄아아아아!"

그녀는 순식간에 란에게 제압당해버렸다. 두 팔이 묶여서 머리 위로 올려지고, 두 다리는 지면에서 떨어졌다.

"내가 말했잖슴까."

레테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시몬의 편지를 주우며 말을 이었다.

"조용히 해달라고."

"으아아앙! 요 용서해 주세요! 레테 자매님!"

"용서 못 해!"

레테가 리리넷의 드러난 겨드랑이를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리리넷이 온몸을 비틀며 깔깔 웃어댔다.

"하하하하! 아악! 하핳! 사, 살려......!"

"부탁이 있슴다."

그녀가 간지럼 고문을 멈추며 말했다. 웃느라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리리넷이 얼른 말했다.

"하, 하명해 주시와요 자매님."

"리리넷 삼촌이 현역 이단심문관이라고 했죠? 연락 좀 부탁드립니다."

결국 삼촌과의 연락을 대가로 리리넷이 구속에서 풀려났다.

"근데 우리 삼촌은 왜요?"

"됐고, 빨리."

리리넷이 통신 수정구를 꺼내 삼촌에게 연락했다.

"네, 네, 삼촌! 저야 잘 지내요. 네, 친구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레테라고 함다."

레테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그녀의 통신수정구를 빼앗아 들었다. 수정구에서 걸쭉한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레테? 조카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같은 방인 에프넬의 선발 1번이 그렇게 성깔 더럽다고.......

"란."

"꺄아아앙아아아!"

리리넷이 다시 란에게 매달렸고, 레테는 삼촌이 조카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등으로 가리고는 말했다.

"사람 한 명을 찾아줬으면 해요."

-조카 친구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누구?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단심문관의 메틴이라는 사람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