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78화
오늘은 개교기념일이었다.
학교에 갈 일은 없지만 키젠은 이런 공휴일도 빠트릴 수 없다는 듯, 자유 보충 강의를 열었다.
교수 없이 조교진이 가르치는 보충수업의 성격이었는데, 최하위권 성적인 학생들만 의무수업이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골라 들을 수 있었다.
"키젠이나 학생들이나, 두 쪽 다 제정신이 아냐."
책상에 앉아 발명품을 끄적거리던 딕이 투덜댔다.
"저주학이랑 맹독학은 벌써 자리가 꽉 찼대. 개교기념일이면 좀 쉬지 진짜."
시몬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넌 의무수업 있어?"
"어. 저주학 들으러 가야 함."
"안됐네."
시몬은 유일하게 최약체인 사령학을 제외해서 의무수업은 없었다. 그런 사실에 감사하며, 깍지낀 손을 스트레칭하듯 쭉 뻗었다.
"그보다 파견평가가 기대된다."
"나도!"
말 나온 김에 시몬은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중립지대에 갈 거면 이런저런 필수품들 챙겨야 할 것 같지 않아? 메이린이랑 카미랑 불러서 같이 로체스트에 쇼핑하러 갈래?"
그 말에 딕의 동작이 우뚝 멈추며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래?"
"아아- 그, 그게."
언제나 느물거리던 딕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이번 파견평가는 니들이랑 같이 못 갈 것 같은데."
시몬이 멈칫했다.
"어, 진짜?"
"미안하다. G반 애들이랑 선약을 잡아놔서 거기 들어가기로 했어."
딕의 말에 시몬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아쉽네."
"미안 미안. 메이린한테 한번 가봐. 걔 오늘 하루 내내 도서관에 있을 거라고 했어."
조별 구성과 보고는 내일까지다.
4인 1조니까, 한 명이 비었다면 얼른 다시 채워 넣어야 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 * *
도서관에 도착했다.
메이린은 어디서나 돋보이는 하늘색 머리카락 덕분에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공부하다가 잠시 쉬러 나왔는지, 열람실 밖에서 한 여학생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시몬이 그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메이린!"
메이린도 시몬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시몬이 급히 말을 이었다.
"메이린. 들었어? 딕이......!"
"잠깐만 시몬, 나 중요한 이야기 좀."
"아, 응."
마음이 급하다 보니 실례할 뻔했다. 시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물러나 기다렸다.
이내 두 소녀가 다시금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대충 한 귀로 흘려듣자면 남의 연애 이야기였다. 누구랑 누구랑 사귀는데, 남자애가 바람 피웠고, 여자애가 울고불고 화를 냈는데 남자애는 뻔뻔하게도 전혀 반성할 기미가 없고, 뭐 그런 레퍼토리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듣던 메이린이 격노했다.
"미친 거 아냐?"
"진짜!"
두 여학생의 수다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일종의 소우주급 간격을 느낀 시몬은 뻘쭘하게 거리를 벌리고 기다렸다.
그렇게 20분이 지나서, 수다를 떨던 여학생이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그제야 메이린이 시몬을 봐주었다.
"무슨 일이야?"
"아, 파견평가 문제 때문에."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왔다.
"딕이 다른 반 애들이랑 같이 파견평가를 가겠다고 해서. 우리 조도 한 명 빠르게 충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조?"
그 말을 들은 메이린이 '푸핫!'하고 실소했다.
"야! 뭔데 '우리'야?"
"음?"
"너 나랑 같이 갈 생각이었어?"
"......아, 아냐?"
어제 온종일 같이 중립지대에 관해 이야기했으니까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았다.
"어휴, 진짜. 누가 촌스럽게 파견평가를 같은 반 애들끼리 가냐? 누가 들으면 비웃어."
그녀가 질색하듯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우리 그동안 맨날 같이 붙어 다녔잖아. 이럴 때 다른 반 애들도 사귀어보고 그래야지. 난 아까 니가 본 걔랑, H반 두 명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
"그. 그래?"
원래 파견평가는 다른 반 애들이랑 섞여 가는 분위기인가?
조금 어안이 벙벙하긴 했지만 딕도, 메이린도, 그런 이야기를 쉽게 말하고 있었다.
"카미한테는 아직 안 가봤지?"
메이린이 물었다.
"이제 가보려고. 혹시 어딨는지 알아?"
"혈류학 보강 신청했잖아. 마탄 사격 실습관에 있을걸."
* * *
시몬은 바로 혈류학 수업이 있는 마탄 사격 실습관에 도착했다.
창문으로 슬쩍 보니, 강의실에서 한 조교가 열렬히 침을 튀기며 강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서 어렵지 않게 등 뒤에 박쥐 날개가 달린 카미바레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필기할 때마다 날개가 팔락팔락 흔들리고, 중요한 설명을 할 때는 귀가 쫑긋쫑긋했다. 가만 지켜보고 있으려니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그럼, 보충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후 강의도 신청한 학생들은 두 시간 뒤에 또 뵙죠."
"수고하셨습니다!"
혈류학 조교가 떠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몬은 다른 학생들이 빠르게 지나갈 수 있도록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
거의 마지막 즈음에 카미바레즈가 교과서를 두 팔로 끌어안고 강의실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카미!"
"아, 시몬-!"
그녀가 활짝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기분이 좋은지 날개가 빠르게 팔락팔락 흔들렸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파견평가에서 딕과 메이린이 다른 애들이랑 갈 것 같다.
다른 두 명을 구해야 할 것 같다.
라고 말하려던 시몬은 이내 조심스럽게 이쪽 말부터 꺼냈다.
"혹시 카미는 파견평가 같이 가는 사람 있어?"
"......아."
그 물음에 카미바레즈의 동공이 데구르르 흔들렸다. 낯빛이 어두워지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발밑으로 향한 채 가만히 있었다.
시몬이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말해도 돼."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 사실 사담 동아리 분들과 같이 가기로 해서......."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시몬은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원 보고는 내일까지였다.
* * *
그 뒤로 시몬은 정신없이 팀원들을 구하러 다녔다.
"아, 제안은 정말 정말 고마워! 그치만 우리는 처음부터 같은 조 애들끼리 하기로 했거든. 미안해."
제일 먼저 같은 반이자 같은 동아리인 토토에게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조가 있었다.
"뭐? 조원을 찾고 있다고?"
다음 차례는 A반의 반장으로 통하는 제이미 빅토리아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시몬의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들었다.
"너희 혹시 싸웠니? 무슨 일이야? 7조 니들은 워낙 사이가 좋아서 걱정 하나도 안 했는데!"
"아니. 싸운 건 아니고."
시몬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녀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파견평가는 같은 반 조원들끼리 같이 가는 게 맞지!"
"그, 그래?"
"파견평가가 무슨 룰루랄라 소풍인 줄 아니? 당연히 손발이 잘 맞고, 반년 내내 호흡을 맞춰본 같은 조원들끼리 가는 게 훨씬 유리해! 다른 반 애들이랑 가면 언제 또 호흡 맞추고, 전술 짜고, 손발 맞춰보고 할 건데?"
"......."
시몬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부분은 생각 못 했다.
"그래서 내가 싸웠냐고 물어본 거야."
제이미가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진짜 어지간히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니라면 다들 같은 조원들끼리 가는 추세야. 나도 그렇고."
"......그래.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캐묻지는 않겠지만, 7조에 무슨 일 있음 솔직히 나한테 말해줘. 알았지?"
"진짜 싸운 거 아냐."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시몬은 의문을 품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제이미에게 위치를 듣고 클라우디아에게 찾아가 보았다. 최근 그녀와도 여러 일을 겪으면서 꽤 친해져 있었다.
"아니, 그건 진짜 아니지! 너무한 거 아냐?"
시몬의 이야기를 들은 클라우디아는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반장이 말한 대로 같은 조 애들끼리 가는 게 맞아. 그리고! 다른 반 애들이랑 같이 갈 거면 너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두는 게 예의지! 메이린 걔도 참....... 카미도 그렇게 안 봤는데!"
"화를 내주는 건 고맙지만."
시몬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앞에서 조원들 뒷담화는 조금 그런데."
"아, 그, 그래? 미안......!"
클라우디아가 바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자마자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야! 나중에 확실히 사과를 받아내야 할 문제야 이건!"
"......."
그렇게 클라우디아와 헤어진 이후로도, 시몬은 여러 학생들과 만나 보았다.
하지만 좀처럼 조원을 구하지 못했다. 다들 어지간하면 같은 조원들끼리 파견조를 맞추고 있었다.
시몬이 홀로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빈 강의실에서 조원들 4명이 둘러앉아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즐거워 보이네.'
조금 쓸쓸했다.
키젠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외로움.
시몬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도 네 명의 학생들이 뭉쳐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옆자리가 더 휑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
A반 애들 몇 명 더 돌아보고, 안되면 카쟌, 로레인, 피츠제럴드, 세르네까지도. 세르네는 또 이상한 걸 요구할까 봐 무섭긴 하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시몬은 클라우디아가 알려준 3층으로 올라갔다. 같은 A반의 신디 비바체가 3층 빈 강의실 302호에서 스터디 중이라고 했다.
'신디도 같은 조원끼리 할 것 같긴한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었다. 신디가 아니라도 거기서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302호 강의실 앞에 도착한 시몬이 가볍게 노크했다.
"누구?"
문 너머에서 신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시몬. 잠깐 들어가도 될까?"
"어, 들어와!"
허락을 받아낸 시몬이 두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빠아앙!
빵!
난데없이 사방에서 종이 폭죽이 터져 나왔다.
"생일 축하해! 시몬!!"
와아아-!
열렬한 환호성이 쏟아지고, 색종이와 꽃가루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눈앞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보인다.
'......??'
시몬이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의실 안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폭죽을 든 딕과,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는 메이린, 그리고 케이크를 든 채 미소 짓는 카미바레즈가 보였다.
그 뒤로는 제이미와 클라우디아, 신디도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생일?
내 생일?
"설마 그럼......."
"뭐겠니? 전부 서프라이즈지!!"
메이린이 웃으며 소리쳤다.
케이크를 두 손으로 든 카미바레즈가 다가오며 말했다.
"후 불어주세요! 시몬!"
시몬이 얼떨떨한 얼굴로 촛불을 불어서 꺼트리자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딕이 남아 있는 생일 폭죽을 전부 터뜨렸다.
"......아하하."
서운했던 감정이 눈 녹듯 녹아내리고 가슴 찡한 무언가만 남았다.
색종이와 꽃장식을 잔뜩 뒤집어쓴 시몬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웃음을 보였다.
"......진짜 놀랐잖아."
딕이 캬캬캬 웃으며 시몬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 의심했어야지! 우리가 누굴 버리고 딴 조에 가겠냐!"
"속여서 죄송해요 시몬!"
처음부터 서프라이즈였다. 제이미와 클라우디아, 신디도 케이크에 매수된 거였다.
오늘의 주인공인 시몬이 케이크를 잘라서 접시에 담았다. 얼마나 큰지 한 조각씩 덜어도 반이 넘게 남았다.
"근데 애들아. 나 고백할 게 있어."
시몬의 말에, 이번엔 나머지 7조 조원 세 사람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뭔데요?"
카미바레즈가 물었다.
"야! 너 설마 그사이 우리 버리고 다른 조원 구한 거 아니지!!"
메이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몬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오늘 생일 아닌데."
멈칫.
갑자기 강의실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모두의 시선이 딕에게로 모였다.
"야 이 븅딱아! 오늘 시몬 생일 맞다며!!"
메이린이 버럭 소리 질렀다.
딕도 당황한 듯 어버버하다가 시몬을 보았다.
"너 기숙사 방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했잖아! 거기 생일이라고 적어놨으면서......!"
"아, 그거 엄마 생일이야."
"......."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메이린과 시몬이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메이린이 반만 남은 케이크를 들고 냅다 달려들더니.
파아악!
딕의 얼굴에 케이크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하하하하하하!"
"속 시원하다!"
모두가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웃었다. 얼굴이 케이크 범벅이 된 딕도 유쾌하게 웃으며 혓바닥으로 케이크를 쓸어 먹었다.
"아, 아아! 눈이 안 보여!"
그렇게 말하며 딕이 메이린의 교복에 얼굴을 닦으러 돌진했다.
"으악! 야! 가까이 오지 마!"
"복수다!!"
다들 웃고 떠들며 즐기는 가운데, 카미바레즈가 시몬의 옆으로 와서 말했다.
"이번 파견도 잘 부탁드려요 시몬!"
시몬도 빙긋 웃었다.
"나도 잘 부탁해."
가슴이 따뜻해졌다.
비록 진짜 생일은 아니었지만, 오늘 모두가 열어준 이 파티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뭔가 부럽네. 우리 조도 좀 이런 분위기였으면."
클라우디아가 중얼거리고 있는데 메이린이 달려들어 뺨에 케이크를 묻혔다. 이번엔 두 사람이 왁왁 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