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87화
숲의 어둠은 유난히 짙었다.
음침한 부엉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숲 한복판에서, 결국 시몬 일행을 태운 마차가 멈췄다.
마차를 이끌던 말의 피로도가 극에 달한 것이다.
상처는 회복됐지만 이미 말은 너무 지쳤는지, 바닥에 엎어진 채 의욕을 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야영을 하거나, 마차를 버리고 걸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야영한다면 또 주위에 위험이 없는지 알아봐야 했기에, 시몬은 자청해서 혼자 주위를 정찰하고 있었다.
'배변이나 발자국은 없어. 가까운 위치에 몬스터가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사브작.
그때 풀숲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밤이라 청각에 잔뜩 민감해져 있던 시몬은 즉시 팔에 착용하고 있던 본아머-핸드건의 탄환을 날려 보냈다.
퍽!
탄환에 맞았는지 뭔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얼른 그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수풀을 뒤져보니 하얀 기계 같은 게 보였다. 몸통 한복판에 뼈가 꽂혀 있었고, 그것을 끄집어내 내부를 살피니 신성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크리쳐로군.]
경험 많은 피어는 이 물건을 알고 있었다.
[프리스트 놈들이 정찰용으로 쓰는 일종의 소환수 같은 거다.]
'그럼 진짜 에프넬이 우릴 쫓아보나 보네요.'
[크흐흐, 크리쳐를 먼저 뿌려둔 걸 보면 아직 거리에 여유는 있겠지만, 얼마 안 가 따라잡힐 거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영은 포기하고, 바로 움직여야겠어요.'
* * *
한편 마차 앞에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은 푹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해요!"
메이린은 야영을 주장했고.
"작전의 급박함을 고려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사샤를 일으키세요!"
세이위르는 걸어서라도 움직이자고 말했다.
"말도 안 돼요! 마차도 없이 숲에서 나와봐야 뭘 할 수 있는데요? 게다가 사샤는 다쳤다고요!"
메이린의 외침에 카미바레즈가 동의하듯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옆에는 사샤가 꼭 붙어 있었다.
"움직이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업고 가면 되겠군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메이린은 본격적으로 세이위르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요원님은 아니겠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전투를 겪었어요. 다들 지쳐 있다구요! 그리고 요원님이 처음부터 벤젼스 본부와 연락되는 통신 수정구를 들고 있었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그냥 지원을 요청하면 되는 건데!"
"급박한 전투를 치르느라 품에서 떨어져 분실하고 말았군요. 하늘이 돕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이것 또한 현장의 수많은 변수 중 하나."
"우리가 싸우는 내내 도움도 안 주셨으면서 급박함은 무슨......!"
세이위르가 고개를 좌우로 휙휙 흔들더니, 손등으로 앞머리를 넘겼다.
"자꾸 그렇게 팀워크를 해친다면, 최하 점수를 각오해야 할 겁니다. 메이린 요원."
메이린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걸 진짜 한 대 칠 수도 없고.
더럽게 수상하긴 하지만, 그의 거짓말을 밝혀낼 만한 증거가 없었다.
차박차박.
그때 마침 풀밭을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찰을 다녀온 시몬이 도착했다.
"무슨 일 있었어?"
시몬이 어색한 분위를 느끼고는 물었다.
"시몬! 뭐라고 말 좀 해봐!"
메이린이 다가가서 조용히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무조건 자기 말이 맞대! 자꾸 점수 어쩌고 하면서 찍어누른다니까!"
시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이위르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일단 정찰 결과부터 보고하자면, 야영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시몬이 세이위르의 손을 들어주자, 메이린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고, 세이위르는 잘난 척하며 앞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역시 시몬 요원은 말이 통하는군요! 팀워크 점수를......."
"이런 게 있었습니다."
시몬이 손바닥을 펼쳐 인형 조각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 이거 크리쳐 맞지? 진짜 쫓아오나 보네."
딕이 골치가 아프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몬이 크리쳐의 잔해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스트와 싸우기 전에, 일단 내부의 문제부터 처리하자."
"내부의 문제?"
"응."
시몬이 시선을 돌렸다.
"세이위르 요원님."
"네."
"진짜 통신 수정구를 분실하신 겁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가지고 오지 않으셨던 겁니까?"
시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세이위르는 불쾌한 듯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시몬 요원."
"세이위르 요원님께서 진짜 저희 멘토 네크로맨서이신지 여쭙는 겁니다."
이상한 부분이야 많았다.
처음 중립지대에 도착해서 세이위르에게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때, 시몬은 편지에서 흐릿하지만 글자를 봤다.
거기 적힌 이름은 세이위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외에도 사샤가 살던 켈소 마을에서 프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바닥이 갈라지고 박살 나고 난리가 났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깨끗하게 원상복구 되어 있었다.
주위의 마을 주민들도 지나치게 태연했다. 무법지대라곤 하지만 마을 내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렇게 태연하게 돗자리 깔고 물건을 파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거기에 세이위르는 이번 전투에 끼지 않았고,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줄 통신 수정구도 뜬금없이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이상한 것들투성이다.
그동안은 딱히 캐묻진 않았지만, 이제 에프넬의 습격을 앞둔 시점에서 불확실성은 확실히 제거하는 게 낫다고 시몬은 판단했다.
시몬의 이야기를 들은 세이위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부 비약이고, 당신의 망상일 뿐이지 않습니까? 시몬 요원."
"......."
"우린 지금 잘하고 있어요. 탈취당한 타깃도 확보했죠. 굳이 이런 때에 요원 간의 신뢰를 깨고 팀워크를 박살 내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최하점을 줄 수밖에......."
"주셔도 됩니다."
시몬의 충격 선언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신 저는 키젠의 징계위원회에서 이렇게 발언할 겁니다. 세이위르 요원은 애초에 내 멘토가 될 자격이 없었다고."
"뭐요?"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세이위르 요원."
"시몬!!"
"야,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카미바레즈와 딕이 뜯어말렸지만, 시몬은 웃는 얼굴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키젠은 실력 만능주의니까요. 저보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멘토라면, 학교에서도 제 말을 인정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이군요."
쿠구구구구구구구!
세이위르의 몸에서 거대한 칠흑이 솟아올랐다.
"나는 연방 공인 3위계, 벤젼스 소속의 네크로맨서입니다! 더 이상의 모욕은 묵과할 수 없습니다!"
시몬도 천천히 칠흑을 끌어올리자 메이린이 기겁하며 시몬의 손을 붙잡았다.
"에프넬도 오고 있다며!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
"금방 끝낼게. 괜찮아."
시몬이 달래듯 말하고는 세이위르에게 다가갔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시몬 요원!"
그가 엄숙하게 경고했다.
"나는 키젠으로부터 당신들의 합법적 지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당장 사죄하고 내 지시에 복종하십시오!"
"그러길 원하신다면 실력을 보여주세요."
시몬이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갔다.
"감히!!"
세이위르가 손바닥에 마법진을 펼치더니, 흑마법을 발동시켰다. 그의 등 뒤로 뿌연 연기가 망토처럼 흘러나가 카펫처럼 깔리고 그 속에서 흐릿한 형체의 거인들이 솟아 나왔다.
딕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사령학의 강림술이야! 그것도 여섯 채!"
전에 한번 싸운 적이 있는, 키젠 2학년이었던 안드레 왕자가 단 하나의 강림체를 사용한 것에 비해, 세이위르는 무려 여섯 채의 강림체를 꺼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입니다."
세이위르가 앞머리를 손등으로 올리고 턱을 세우며 시몬을 내려다보았다.
"물러나세요."
시몬은 무시하고 그냥 계속 걸어갔다. 이쯤에서 물러설 줄 알았던 세이위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크흠! 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특별히 용서해 주......!"
"계속하시죠. 결투잖아요?"
"진짜 진짜 마지막입니다!"
갑자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지켜보던 네 사람은 눈을 끔뻑였다.
"내 인내를 시험하지 마! 거기서 멈추십시오 시몬 폴렌티아!"
시몬은 무시했다. 세이위르가 결국 거칠게 팔을 내렸다.
"포기해!!"
여섯 채의 강림체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후우웅!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시몬의 목 앞에서 멈췄다. 조원들이 놀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시몬은 한술 더 떴다. 대담하게도 스스로 목을 강림체의 무기에 댔다. 그러나 목에서 피가 나거나 베이긴커녕, 그대로 시몬의 몸이 통과해 버렸다.
"환상 마법."
시몬이 강림체의 몸에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그냥 통과했다.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줘서 속였던 거죠? 빈 편지에서부터, 마을에서 프리스트 무리와 싸운 것까지."
"큭......!"
세이위르가 시뻘게진 얼굴로 뒷걸음질 치더니, 급기야 등을 돌려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 순간, 인챈트 된 밧줄이 잽싸게 날아가 세이위르의 다리를 묶었다.
그가 '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어딜 가시나~"
딕이었다.
세이위르가 엎어진 자세로 학생들과 사샤가 있는 곳까지 질질질 끌려왔다.
"자, 잠깐 딕 요원! 당신이라면 날 믿어주......!"
"아- 이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 더럽네."
딕이 세이위르의 등을 발로 거칠게 짓밟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우릴 갖고 논 거예요?"
"커흑! 그, 그게 아니......!"
"비켜봐 평민."
메이린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다가왔다.
"나도 볼일이 있으니까."
"허, 허억!"
"얘들아 잠깐만."
시몬이 말렸다. 메이린이 휙 돌아보며 외쳤다.
"야, 말리지 마!"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전후 사정을 들어보자. 패는 건 그다음에."
"패는 건 확정인 겁니까!"
결국 자신이 멘토라고 주장하던 세이위르는 학생들에게 제압당해 밧줄에 꽁꽁 묶여 본심을 털어놓게 됐다.
세이위르는 벤젼스에 입사한 지 1년 차인 신출내기였다. 계급이 3위계인 것도 거짓말이고 1위계의 네크로맨서 초년생이었다. 당연히 키젠 졸업도 거짓말이고, 알란드 네크로맨서학교 중퇴 출신이었다.
그는 프로 네크로맨서로서는 여러모로 수준 미달이었지만, 딱 한 가지 분야. '환상계'만큼은 인정받아 벤젼스에 첩보 임무 등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잘난척하는 것치고는 실수투성이였고, 벤젼스에서도 실속이 없다는 평판이 퍼졌다.
벤젼스의 사장에게 먼지 나도록 탈탈 털리고 2위계 승급은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릴 들었다.
결국 세이위르는 하반기 정리해고 대상자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걸 알게 됐다. 벤젼스에서 잘리고, 그 기록이 남게 된다면 네크로맨서 업계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공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마침 최근 벤젼스에 두 가지 큰 건이 들어왔다.
바로 키젠 학생들의 파견과, 유력한 성녀 후보자의 회수.
세이위르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해고당할 바엔, 자신이 저 두 가지를 전부 성공시키자는 생각이었다.
세이위르는 마을에 잠복해서 키젠 학생들이 오길 기다렸다가, 이들이 중립지대에 도착하는 순간 환상마법을 걸어서 자신에게 오도록 했다.
그러곤 자신이 멘토라고 속이며 학생들이 따르도록 하고, 중요임무 중 하나였던 성녀 후보자 확보를 학생들의 힘으로 수행하기로 했다.
임무는 전적으로 유능한 키젠 학생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교육 명목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기다리는 계획이었다. 과연, 그들은 키젠답게 우수했고 사샤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당당히 벤젼스 본부에 귀환해서 임무 성공을 선언하면, 자신을 보는 보스와 동료들의 눈도 달라질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진짜 미쳤네, 미쳤어."
결국 학생들에게 정체를 들켜 밧줄에 꽁꽁 묶인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메이린이 싸늘하게 말했다.
"키젠이 장난이야? 임무가 장난이고! 당신 욕심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콧대 높게 굴던 세이위르는 고작 몇 분 만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메이린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사납게 그를 쏘아보았다. 딕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냥 전투 중에 당한 걸로 하고, 나무에 묶어놓고 갈까? 몬스터 밥이나 주게."
세이위르의 동공에 빠르게 눈물이 맺혔다.
"사, 살려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목숨, 목숨만은......!"
그때 시몬이 앞으로 나왔다.
"더 추궁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에프넬이 추격이 본격화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야 해."
그렇게 말한 시몬이 세이위르를 보았다.
"세이위르 요원님. 당신이 해줘야 하는 일이 있어요."
"무, 무슨 일입니까?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시몬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미끼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