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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292화 (292/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92화

어머니가 불타 죽었다.

솟구치는 하얀 불꽃. 그 안에서 손톱이 뭉개지도록 고통스럽게 벽을 긁어 내리는 어머니의 팔.

당시 어린 피가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네 어머니는 영광스럽게도 '성녀의 정수'의 선택을 받았단다.

-하지만 네 어머니의 믿음과 신앙심이 부족해서 몸이 버티지 못한 게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른들의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스스로 납득을 구하고 싶었다.

피가로는 노력했고, 마침내 신해의 성녀 '이스라필'이 관여하는 정수 연구기관에 들어갔다.

이스라필은 인간의 몸에서 성녀의 정수를 제거하는 방법과, 정수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방법을 교황 몰래 연구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래도 목적은 피차 맞았기에, 피가로는 이곳에서 성녀의 정수를 연구했다.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 안의 분노와 원망은 봄눈 녹아내리듯 사라져 가고, 어느새 새로운 감정이 꽃피워졌다.

경탄했다.

그는 세상에 일곱뿐인 '성녀의 정수'라는 힘에 매료됐다.

이 힘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미친 듯이 연구했다.

기관의 연구원들 중 그 누구도 그의 성과를 뛰어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은 선을 넘었습니다. 피가로.

해고당했다.

무분별한 생체실험을 강행하던 것을 이스라필에게 들켜 버린 게 원인이었다.

직장이 바뀌었다. 수도원 관리라는 평범한 프리스트들의 일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성녀의 정수에 매료되어 있었고, 연구를 계속했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

고민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성수'라며 조금씩 약물을 투여하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몬스터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거듭했다.

-피가로 형제님! 이, 이게 다 뭡니까?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선임에게 들켰다. 이번에도 독한 꾸지람을 들었다.

에프넬은 과학을 천대한다.

사람들은 '성녀의 정수'의 원리까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정수의 선택을 받은 건, 그냥 위대한 여신 데바의 선택을 받은 것뿐이고.

정수를 받아들이지 못해 죽으면, 그냥 신앙심과 믿음이 부족해서 죽은 것뿐이다.

그렇게 머리를 닫고 납득해 버린다.

왜냐하면 이건 여신의 힘이니까.

감히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고 의심해서도 안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에프넬의 철칙.

하지만 피가로는 이런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다들 궁금해하지 않는 거지?

왜 정수는 일곱인지.

왜 여자만 성녀가 될 수 있는지.

정수가 인간을 고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남자도 성녀가 될 수 있는지.

갈수록 정수에 대한 피가로의 갈증과 집착은 심해졌고, 결국 두 번째 직장을 잃었다.

그렇게 몇 달 후, 그는 중립지대에서 일하게 됐다.

명백한 좌천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연방의 눈에서 벗어난 이곳에서는 더 자유롭게 실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중립지대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그 아이'를 만났다.

-꺄아아아아아!

집 전체가 하얀 불꽃으로 불타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들린다.

정확히,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와 같은 광경.

마을 사람들이 양동이에 물을 길어와서 퍼부었지만 저런 걸로 백염이 꺼질 리가 없다.

피가로는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하얀 불꽃 속에서 불타는 여섯 살짜리 소녀를 보았다.

죽어가는 소녀를 보며 피가로가 느낀 감정.

그것은 안쓰러움도, 동정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질투'했다.

'시기'했다.

피가로는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마을에서는 누구보다 더 강했다.

같은 밤을 이 마을에서 보냈는데, 왜 성녀의 힘은 내게 오지 않고, 왜 저런 꼬맹이한테 가는 거지?

그런 의문도 잠시, 피가로는 그간의 연구 지식을 총동원해 사샤를 구해냈다. 그리고 정화의 정수를 그녀의 몸에 그린 마법진에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게 가능한 건 이 대륙에 자신뿐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길어야 두 달이다.

그 안에 이 정수를 손에 넣어, 자신이 성녀가 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남자가 성녀가 되는 법.

간단하다.

이 소녀, 사샤가 정화의 정수를 몸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고.

그 뒤에 그녀의 몸을 가지면 된다.

그녀의 몸은 도구이자, 정수를 담는 그릇이고.

그녀를 움직이는 자신이 바로 성녀가 된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목숨을 구해준 피가로를 대부로서 따랐다. 그는 그녀가 정화의 정수를 버틸 수 있는 육체를 갖게 하기 위해, 그녀의 능력을 폭주시킬 약물을 만들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연구를 진행하는 도중,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이했다.

다음 정화의 성녀가 나타나지 않아 초조해하던 신성연방에서, 중립지대에 '성녀 후보자'로 점찍은 인물들을 데려오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한 것이다.

에프넬의 손에 사샤가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피가로는 인맥을 총동원해 인솔자를 자처했고, 에프넬에서 보낸 학생들을 맞이하며 시간을 끌기로 했다. 그사이 갱단들을 매수해 사샤를 데리고 도망치게 했다.

학생들은 인솔자의 권한으로 적당히 허름한 곳에 박아놓고, 사샤를 데리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키젠이 난입했다.

그들이 갱단들을 무찌르고 사샤를 탈취했기에 계획을 바꾸었다.

에프넬의 프리스트들을 데리고와서 키젠과 정면승부를 벌이도록 했다. 공멸하길 바랐다.

그렇게 두 쪽이 치열하게 싸우는 사이, 피가로는 사샤를 탈취하여 도주했다.

시간이 없다.

에프넬도 키젠도 사샤가 가진 잠재력을 알게 됐고, 학생들이 실패한 다음에는 진짜 강자들을 파견할 것이다.

생각보다 이르지만,

그는 성녀가 되기로 했다.

* * *

'......저게 뭐야?'

시몬은 몇 번이고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불과 어제만 해도 조원들과 이 마을에 있었지만, 저런 거대한 나무는 본 적이 없었다.

[소년.]

피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라. 저 나무의 꼭대기를 보여주마.]

시몬이 쓰고 있는 피어의 두개골 오른쪽 눈에 칠흑이 일렁이며 거울처럼 변했다. 일종의 망원경 효과다.

시몬이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만 나무 꼭대기를 보았다.

"......!"

시몬의 표정이 싸늘하게 질렸다.

나무의 꼭대기, 그곳에는 사샤의 대부라던 오렌지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피가로가 있었다.

그의 하반신은 나무와 융합되었으며 상반신만 빠져나온 상태였다. 피부도 군데군데 나무처럼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 보이는 얼굴.

'사샤......!'

사샤는 온몸이 나무에 파묻힌 채 얼굴만 남겨놓고,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시몬은 충격으로 전율했다.

'그럼 이 큰 나무가 사샤라고?'

[누구냐.]

바로 그때, 거대한 목소리가 결계 전체에 울려 퍼졌다.

피가로의 목소리였다.

[침입자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결계를 힘으로 뚫고 들어오다니, 너는 누구냐?]

전신이 떨려왔다. 압도적인 종류의 힘이 느껴진다.

정화의 성녀, 플레마와 대면했을 때와 똑같은 위압감.

'설마 내 위치까지 아는 거야?'

시몬이 확대된 시야로 나무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피가로가 눈을 크게 뜨고 정확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왕 들켜 버렸으니, 시몬도 피어의 목소리를 이용해 대답했다.

[남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쪽부터 밝히는 게 수순 아닌가?]

[좋다, 숨길 것도 없지.]

피가로가 입가를 찢으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나는 새로운 정화의 성녀, 피가로 메르텐스다!]

시몬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서, 성녀? 남자가?'

[아, 그래.]

피가로가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성녀가 바뀌면 새로운 이명이 붙지! 정화의 성녀는 옛것이니, 무엇이 좋을까? 음- 그래, 그래. 이게 좋겠어.]

우우우우우우우웅!

갑자기 나무줄기들이 자라나며 드넓은 결계의 천장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비대해졌다. 그리고 줄기 아래에서 수많은 과실이 맺히기 시작했다.

[죄의 성녀.]

그것은 새하얀 과실이었다.

투욱.

툭.

하얀 사과들이 나무줄기에서 떨어져 폭격과도 같은 기세로 지상에 내려왔다.

이내 그것이 바닥에 닿자.

투콰아아아아아아악!

사과가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신성의 기둥이 솟구쳐 올라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도시 전체에 이런 빛의 기둥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시몬은 인상을 구기며, 자신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흰 사과를 향해 파멸의 대검을 휘둘렀다.

쩌억!

두 쪽으로 갈라진 사과가 그대로 폭발하며 두 개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에 껴 있는 시몬이 '윽' 소리를 내며 자세를 낮추었다.

'확실히......!'

처음 정화의 성녀를 상대했을 때와 비슷한 신성이 느껴진다.

물론 성질은 바뀌었다.

이전 정화의 성녀의 백염이 단순히 순수한 신성불꽃의 형태로 휘몰아쳤다면, 이 기술은 광범위한 물리적 파괴력까지 갖췄다.

여기에 휘말리면 신성에 면역을 가진 시몬이라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놀랍지 않느냐!]

피가로가 심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염의 과실! 이게 바로 내가 성녀가 된 이후로 얻은 힘이다!]

[말은 똑바로 하지.]

시몬이 차갑게 말했다.

[그건 당신의 힘이 아니라, 사샤의 힘이야.]

[사샤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피가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녀는 이제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의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롯이 나라는 존재만이 남았다!]

꾸드드득!

꾸득!

[경배하라!]

피가로의 나무뿌리 아래로 크고 작은 무수한 식물형 몬스터들의 군대가 형성되어 시몬 쪽으로 다가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까지!'

온몸에 나무줄기 같은 혈관이 돋아난 인간들이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좀비와도 같았다.

[소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네.'

쿠쿠쿠쿠쿵!

콰쾅!

이런 와중에도 마을 전체에 퍼져 있는 넝쿨들과 나무뿌리들은 더더욱 자라나 건축물을 무너뜨렸고, 하늘에서는 하얀 사과가 떨어지고 있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정체를 밝혀라, 이름 모를 네크로맨서여!]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붙잡고는 가볍게 한 바퀴 부웅 휘둘렀다.

쩌어어어억!

쿠구구구국!

다가오던 식물형 몬스터들이 갈라지고 건물이 갈라졌으며 떨어지던 흰 사과들이 폭발했다.

[오호......!]

[나는-]

마을은 전멸당했고, 이 결계 안에서는 정체를 숨길 것도 없다.

시몬이 대검을 잡지 않은 손을 등 뒤로 보내 아공간을 열어젖혔다.

따닥!

키리리리리!

군단화된 검푸른 불꽃의 스켈레톤들과 송장거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몬이 후드를 벗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암흑연합의 군단장이다.]

망자들이 울부짖으며 시몬의 뒤로 거대한 군단을 형성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그때 천장 위의 무수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듯 흔들렸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피가로는 기뻐하고 있었다.

[성녀로서 내 첫 네크로맨서의 상대가 군단장이라니! 아주 인상적이구나!]

최강의 성녀를 넘어 군단장을 꺾은 명예까지. 피가로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데뷔전이었다.

[거기서 딱 기다려.]

시몬의 파멸의 대검을 들어올려 그 끝을 피가로를 향해 겨누었다.

[지금 바로 올라가서 그 목을 떨어뜨릴 테니.]

[재미있구나! 할 테면 해보아라!]

시몬이 대검을 들고 걸어갔다.

[나를 따르라.]

망자들의 괴성을 지르며 시몬을 뒤따랐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겠다! 나는 성녀조차 뛰어넘은 존재다!]

나무뿌리에서 나타난 식물형 괴물들과 감염된 인간들이 돌진해 왔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결계 속에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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