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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295화 (295/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95화

피가로의 몸이 떨어져 나가고, 사샤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나무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

쩌적! 쩍!

성녀의 힘으로 만들어진 신성결계 또한 유리파편처럼 깨져나갔다.

시몬은 늦기 전에 얼른 사샤에게 다가갔다.

"사샤! 내 말 들려?"

그녀는 여전히 나무에 파묻혀 얼굴만 내민 채 반응이 없었다.

시몬이 나무결에 손을 집어넣고는 힘으로 쩍! 벌렸다. 무너지는 중이어서 그런지 나무의 강도도 약해져 있었다.

시몬이 나무가 벌어진 틈으로 들어가 사샤를 끌어안는 순간.

'!'

다시 한번 세상이 하얗게 일변했다.

시간도 공간도 모든 게 멈췄다. 시몬이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변한 공간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가 턱을 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었어.]

정화의 정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아이의 몸에 들어가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날 잘 다뤄서 놀랐어. 아니, 여자애들까지 통틀어 이렇게 빠르게 내 힘을 끌어낸 아이는 없었어. 특별히 칭찬해 줄게!]

시몬도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역시, 나 아까 성녀가 된 거 맞지?"

[그런 셈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성녀면서 성녀가 아닌 이레귤러.]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 취향은 여자아이 쪽이라~ 나를 받아들일 새로운 여자아이를 찾으러 갈 거야.]

"너와의 결합은 내 쪽에서도 사양이야."

시몬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우리 엄마를 힘들게 했잖아."

[엄마? 아- 그 여자? 이름이 안나라고 했지?]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안나는 정말 최고였어! 지나가다 한번 스치듯 딱 봤는데 첫눈에 반한 거 있지! 심지어 다른 언니가 잠깐 머무른 몸인데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더라! 정신 못 차리고 쑥 들어가 버렸지 뭐야? 그러다 그 언니의 잔재랑 싸우느라 엄청 혼났지!]

"......."

시몬이 말없이 노려보자 그녀가 낄낄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우리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니까.]

그녀가 딴청부리듯 본인의 손등을 휙휙 뒤집어보더니 왕좌에 손을 올렸다. 시몬이 다시 물었다.

"이제 사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잠깐이지만 내가 성녀로 선택한 정은 있으니 회복은 시켜줄게. 그 후엔 새로운 여자아이를 찾으러 갈 거야.]

시몬은 속으로 안도했다.

"확실히 사샤를 떠나는 거지?"

[그래. 내가 떠나도 목숨에 지장은 없겠지만, 약물로 신체를 폭주시킨 반동으로 다시는 신성을 쓰지 못할 거야. 그게 그 애한테는 잘된 일인지 아닐지는 모르겠네.]

그때 하얀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 슬슬 헤어질 시간이야.]

정화의 정수의 눈매가 여우처럼 휘었다.

[여담으로, 나는 절-대 남자아이 몸에 깃들어 살 생각은 없지만~ 네 능력을 알게 된다면 네게 끌리는 '언니'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건 별로 관심 없고."

시몬이 눈에 힘을 주었다.

"네가 다음에 누구의 몸에 깃들든, 그때도 내가 막아내겠어."

[그래?]

그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기대할게.]

화아아아아아악!

순백의 세계가 깨지며 다시 시몬이 속한 세계로 돌아왔다.

시몬은 몸에서 어떤 무형의 에너지 같은 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과 머리색, 머리 길이까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몬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그 에너지는 사샤의 몸을 휘감더니, 이내 하얀 불꽃을 일으킨 후 사라졌다.

어느새 사샤의 몸에 나 있던 주사 자국이나 흉터, 몸 곳곳에 비정상적으로 돋아나 있던 혈관과 핏자국도 말끔하게 없어졌다.

시몬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무너져 내리는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시몬은 공중에서 무형의 망토를 휘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샤까지 빠져나가자 나무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전쟁은 끝났다.

* * *

피가로 사태가 벌어진 켈소 마을에서 몇십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

이곳에서도 큰 전투가 벌어져 있었다.

"으윽......!"

신성연방에서 파견 나온 팔라딘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탄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들은 전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굴고 있는 가운데, 멀쩡하게 우뚝 서 있는 한 명이 있었다.

단신으로 이 모든 팔라딘들을 쓰러트린 게 분명해 보이는 검은 로브의 여성은, 기절한 팔라딘들의 언덕 위에 태평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다, 당신은 대체......!"

수염 난 팔라딘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러는 거요!"

성녀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은 선발대 팔라딘 모두가 그녀의 기습에 당했다. 팔라딘 정예 부대를 텔레포트로 데려오기 위한 '좌표 성물'마저 그녀에게 파괴되었다.

그런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라곤 프리스트라는 점. 그리고 밤하늘처럼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후드를 눌러쓴 데다 고양이 가면까지 써서 얼굴을 알 수도 없었다.

여자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수염이 난 팔라딘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그쪽도 피차 연방의 프리스트인 것 같은데. 우리는 새롭게 탄생한 성녀를 지키러 이곳에 온 거요! 같은 편인데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오 대체!"

딴짓을 피우던 그녀가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로브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팔라딘에게 다가왔다.

"이유?"

쩍!

그러곤 얼굴을 걷어차 기절시켰다.

"그딴 게 어딨슴까."

기어이 팔라딘 전원을 쓰러트린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그들을 떠났다.

쓰러진 팔라딘들을 등지고 그녀가 고양이 가면을 벗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꿈결처럼 흘러내리며 앳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도 참 별짓 다 한다 진짜.'

레테가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결계가 완전히 깨지기 전에 시몬과 프린스, 그리고 피어는 최대한 군단의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바쁘게 움직였다.

스켈레톤들과 송장거미를 초대형 아공간으로 불러들이고, 망가졌거나 파괴된 언데드의 잔해도 티가 나지 않도록 전부 아공간으로 옮겼다.

[나도 들어가?]

시몬을 졸라서 핸드 셰이크를 세 번이나 한 프린스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아공간은 갑갑해! 오랜만에 데스랜드 밖에 나와서 놀러가나 했더니!]

"나중에 따로 시간 내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 사람들한테 들키겠어."

그렇게 전 군단이 철수한 뒤, 시몬은 결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기절한 사샤를 마을 입구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그리고 수풀이 우거진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잠시 후, 결계가 완전히 깨지고 블락 요원을 비롯한 벤젼스의 네크로맨서들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여기!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벤젼스 요원들이 사샤를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나무 뒤에 숨어서 사샤를 잘 데려가나 지켜보고 있던 시몬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게 결계에 들어온 사람들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사샤!!"

바로 카미바레즈였다. 그녀의 뒤에는 딕과 메이린도 있었다.

카미바레즈가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기절한 사샤를 끌어안았다.

'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리고 가장 뒤에는 시몬 본인의 모습도 있었다. 바로 시몬으로 변신한 에르제베트였다.

그녀는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하, 에르제도 못 막았나 보네.'

시몬이 아칼리온을 타고 사샤를 구하러 온 것처럼, 다른 조원 세 사람도 사샤가 납치당했는데 이대로 앉아 있을 수 없다며 움직였다.

딕이 벌목장 마을의 마차를 개조하고, 말도 한 필 빌려서 켈소까지 온 것이다.

'......다들 못 말린다니까.'

그래도 시몬은 자신과 똑같은 판단을 한 조원들이 더더욱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피가로를 어떻게든 시간 내에 쓰러트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피가로가 마을 사람들의 힘을 다 빨아들인 후 결계를 걷고 나오면 벤젼스 요원들은 물론, 조원들까지 싸움에 휘말릴 뻔했다.

한편, 벤젼스 요원들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피가로는?"

"지금 잔해를 찾고 있습니다. 신성의 잔향이 소멸기에 들어선 걸 보면 사망한 것 같습니다만,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그 결계를 자르고 들어간 네크로맨서의 짓인가."

요원들이 상황을 수습하는 사이, 시몬은 사샤가 의료진에 무사히 넘어간 것까지 확인했다.

'이제 돌아가자.'

시몬이 결계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때.

"자, 잠깐만요!"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뒤늦게 사총사 중 한 명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시몬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설마.'

일단 침착하게 손을 움직여 피어의 투구를 제대로 얼굴에 쓰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눈동자만 굴려 뒤쪽을 응시했다.

메이린이 숨을 헐떡이며 시몬의 등 뒤에서 나타나 있었다.

"피온 님! 맞죠?"

큰일이다. 머릿속의 경고등이 연신 깜빡거렸다.

"하얀 검으로 결계를 가르고 들어간 네크로맨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확신했어요!"

메이린이 두 손을 맞잡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어, 어쩌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 타이밍에 피온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것보다 최악은 없었다. 벤전스의 네크로맨서들도 있고, 매그너스가 단서를 찾는답시고 조원들을 노릴 수도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왜 항상 우리가 있는 현장에 나타나는 거예요? 무슨 말이라도......!"

시몬은 그대로 발에 칠흑을 일으켜 공중으로 도망쳤다. 메이린이 깜짝 놀라며 달려왔지만, 그는 이미 나무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뒤였다.

'분명.'

메이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발에 번쩍이는 그 칠흑은 분명히 검푸른색이었다. 같이 키젠에서 생활하면서 몇 번이고 보고 느꼈다.

시몬 고유의 그 칠흑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메이린은 전율했다.

'설마 진짜 피온이......!'

"메이린?"

옆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아. 무슨 일이야?"

메이린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시몬이 앞에 와 있다.

방금 피온이 저 위로 올라가기 무섭게 시몬이 나타났다.

진짜 동일인물이라면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녀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

망토를 휘두르며, 피온이 하늘을 날아 도시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고개를 내리면 시몬이 옆에 떡 하니 존재한다.

'.......'

확신했는데.

메이린은 성큼성큼 다가와 시몬의 손을 착 붙잡았다.

"야! 칠흑 써봐."

"칠흑? 갑자기 왜?"

"이유는 묻지 말고. 빨리!"

시몬은 별걸 다 요구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손바닥에 칠흑을 일으켰다.

'아.'

역시 검푸른색.

이 사람은 가짜나 세이위르의 환상 같은 게 아니라, 시몬 본인이 확실하다.

'그, 그래. 두 사람이 동일인물일 리가 없지.'

그녀가 이마를 짚었다.

찰나의 착각이었지만, 피온이 시몬이라고 생각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아서 한숨이 나왔다.

"왜 그래?"

시몬이 가까이 다가오자 메이린은 더욱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아, 아, 아무것도 아냐! 돌아가자! 아하하!"

그녀가 얼른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러는 사이, 시몬의 모습을 한 에르제베트는 조용히 가슴에 손을 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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