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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296화 (296/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96화

켈소의 외곽지역.

여기서는 결계가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더 잘 보였다. 크고 웅장한 벽이 유리창처럼 조각나서 떨어지는 모습은 보기 드문 장관이긴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는 소녀가 있었다.

흰 교복 위에 검은 로브를 걸치고,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놓은 채 서 있는 그녀의 눈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레, 레테 자매님."

그런 그녀의 옆에 있는 건, 같은 기숙사 룸메이트인 리리넷이었다.

그녀 또한 갈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쭈뼛쭈뼛 레테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정말 이게 잘하는 일일까요? 성녀가 죽게 내버려 두다니."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옳은 일임다."

레테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약물로 만들어진 아저씨 성녀? 하! 그딴 더러운 걸 에프넬에서 인정할 리가 없잖슴까."

"그, 그래도 팔라딘을 파견한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인정한 게 아닐까요."

"......."

리리넷의 반박에 레테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할게요."

"?"

레테가 하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솔직히, 누가 뭐래도 이 대륙에서 가장 유력한 성녀 후보자는 나잖아요. 이상한 가짜 성녀에게 기회를 빼앗길 바에는 확 방해하고 싶었슴다. 됐죠?"

"......그,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리리넷의 소심한 반박에 레테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아, 그럼 뭐! 내가 그렇다는데 뭐가 또 아니란 건데!"

"키젠의 파란 머리 남자애."

레테가 멈칫했다.

"사실 그 애를 위해서 한 일 아니에요? 그 애가 켈소에 간다고 했을 때, 레테가 엄청 빠르게 반응해서 팔라딘들까지 막아 세웠잖아요."

리리넷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사실 기숙사에 있을 때 남자한테서 온 그 편지도, 그 키젠 남자애가 보낸 거 아녜요?"

"......하여간."

레테가 실소했다.

"리리넷은 사고가 너무 '그쪽'으로밖에 안 돌아가서 문젬다."

"부, 부정하실 생각인가요?"

"자- 내 얼굴 딱 봐요."

레테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네크로맨서를 도와야 할 이유가 뭔지 말해보십쇼."

"......."

리리넷은 조용히 머릿속으로 시몬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크로맨서긴 하지만 곱상하게 잘생겼던데.

"역시 좋......!"

"경고하는데, 뇌 거치고 말해라."

레테가 으르렁거리며 한발 빠르게 차단하자, 리리넷은 바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레테가 한 걸음 더 다가와 리리넷 앞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내 룸메 맞지? 그럼 말해봐요. 내가 남자 따위에 홀딱 빠질 인간으로 보여요?"

"......."

리리넷은 머릿속에서 레테와 엮인 남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레테와 남자들.

레테와 남자가 같이 있는 장면.

패고, 발로 까고, 패고, 머리 벽에 처박게 하고, 패고, 까고, 패고, 까고.

'어우.'

아무리 생각해도 폭력적인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이 인간은.......

"시, 실언했습니다!"

어이없을 정도로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리리넷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자, 그제야 레테도 쿨하게 등을 돌렸다.

"알아들었으면 됐슴다. 가요, 리리넷."

"네! 자매님!"

리리넷이 평소의 발랄한 목소리로 돌아와 그녀의 팔에 딱 붙었다.

"헤헷! 그럼그럼! 레테 자매님이 그럴 리가 없지! 남자는 그냥 줘패기 좋은 샌드백처럼 여기는 인간이 무슨!"

"......은근슬쩍 디스하지 마라."

"네~"

아무튼 이 동네는 네크로맨서들이 너무 많아서 위험했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겨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는 그때.

저벅.

레테가 입고 있는 검은 로브와는 반대되는, 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반대편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저벅.

두 사람이 백과 흑의 옷자락을 부딪치며 서로를 교차해 걸어갔다.

"!"

레테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시......."

그러나.

"이거 봐요 시몬!"

"야! 너 혹시 너랑 칠흑 색깔 같은 사람 본 적 있냐?"

소년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그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었다.

"레테 자매님!"

갑자기 확 높아지는 목소리에 그녀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리리넷이 뚱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몇 번을 불러야 알아들을래요!"

"아, 음, 미안함다."

"저기서 먹을 것 좀 사 가자니까요! 빨리요!"

레테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가죠."

그렇게 대꾸한 레테가 다시 뒤를 보았다.

하얀 로브의 남자는 어느새 그림처럼 사라져 있었다.

* * *

시몬은 무사히 에르제베트와 교체해서 조원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어 갔다.

사샤는 바로 치료 센터에 옮겨졌고, 더 정밀한 검사를 위해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암흑연합으로 가기로 했다.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중립지대의 자경단 무리가 속속 도착해 사태를 파악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성녀의 힘을 노리던 '피가로'라는 프리스트가, 주민들을 결계로 가두고 학살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며, 중립지대 전체가 분개했다. 에프넬에 대한 적대감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에프넬에서는 다소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피가로에게 가던 팔라딘 무리가 레테에게 급습당해 무력화됐기 때문에, 에프넬에서는 자신들과 피가로와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했다.

또한 그를 성녀로 인정한 적도 없으며, 피가로 개인의 테러행위였다고 공식 해명했다.

키젠에서도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까마귀들을 벤젼스 측에 파견했다.

7조도 몇 가지 심문을 받았다. 본부에서는 시몬과 7조의 임무를 성공으로 볼 것이냐, 실패로 볼 것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의외로 앞장서서 학생들을 변호해 준 건 벤젼스와 블락 요원이었다.

-학생들은 잘못이 없고, 전부 저희의 벤젼스의 불찰입니다.

애초에 사샤를 강탈한 '피가로'는 최소 3위계 네크로맨서급의 실력자였으니 학생들이 막을 수 없는 게 당연하며, 만약 우리가 직원 관리를 철저히 해서 정상적인 멘토가 지정됐다면 결과는 달라졌다고 말했다.

키젠 본부에서도 이를 인정했고, 결국 벤젼스만 징계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죄,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카미바레즈와 학생들이 미안해하자, 블락은 우리의 실수가 맞고, 그간 중립지대에 해온 것들이 있으니 조직이 해체되진 않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벤젼스와 암흑연합, 두 쪽 모두에서 처분 대상이 된 세이위르는 연합으로 소환당했다.

학생들은 켈소 사태에 대한 책임은 백지화됐지만, 새로운 임무를 하나 더 수행해서 임무항목을 채워 넣는 쪽으로 결정 났다.

다만 이번에는 제대로, 원래 네 사람의 멘토였던 '블락' 요원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우리가 수행할 임무는 센티널 갱단 섬멸이다. 놈들이 에프넬의 의뢰를 받은 게 괘씸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이번에 아예 뿌리 뽑기로 했어."

새로운 임무를 하나 더 수행해야 했지만, 7조 조원들은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게 세이위르라는 사람을 겪은 뒤, 원래 멘토인 블락과 같이 일을 하니 쾌적함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블락은 중립지대를 꽉 잡고 있는 업계 전설이었고, 벤젼스를 대표하는 네크로맨서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멘토가 바뀐 것에 감격하는 것 이상으로.

"요원님! 이거 드세요~"

"어, 어?"

더 감격하는 쪽은 블락이었다.

"설마 나도 신경 써준 거야? 고, 고맙다. 정말 고마워!"

블락은 '요즘 애들 공포증'을 중증으로 앓고 있었다. 키젠에서 파견 온다길래 며칠 간 잠도 제대로 못잤고, 이번 세이위르 사태로 더욱 학생들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요즘 애들을 겪어보니 소문과는 달랐다. 이렇게 착하고 똑똑한 애들이 또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 뒤엔 어떻게 됐어요? 더 들려주세요!"

특히 블락이 과거에 있었던 중립지대 이야기를 해주자, 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밤새도록 들려달라고 난리였다.

"정말 궁금해? 그냥 옛날 이야긴데......."

"네! 빨리요!"

블락 쪽은 세이위르와는 달리 진짜 실감 넘치는 경험담이었으니, 학생들은 듣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블락은 학생들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7조 학생들과 지내며, 요즘 애들 공포증과 세대 차이를 실시간으로 이겨내고 있는 블락이었다.

* * *

센티넬.

지하 본부 아지트.

"흐으......."

사샤의 납치를 주도한 센티널 갱단의 '올백머리 대장'은 의자에 누운 채 골골대고 있었다.

'살다 살다 내가 감옥에 들어갈 줄이야.'

키젠의 꼬마 네크로맨서들에게 패해서 중립지대 자경단에 넘겨졌지만, 부하들이 엄청난 양의 보석금을 지불해 올백머리 대장을 빼 온 상태였다.

쿵!

"대장!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온 갱단원의 외침에, 올백머리가 인상을 확 쓰며 말했다.

"또 무슨 소란이야? 골 울린다."

"네, 네크로맨서들이......!"

퍽!

갱단원이 눈에 흰자를 보이며 풀썩 쓰러졌다. 그 뒤로 하늘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녀가 예쁘게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안녕? 우리 또 보네요 아저씨."

올백머리 대장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너는 그......! 키젠의 네크로맨서 여자!"

자리에서 일어난 갱단원들이 험악한 얼굴로 나이프를 꺼냈다.

메이린은 태연하게 준비해 둔 마법진을 펼쳐서 천장 위로 띄워 올렸다.

<피어스 오브 블리자드>

천장에서 얼음송곳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달려들던 갱단원들이 얼음에 맞아 그대로 나가떨어지거나 바닥을 굴렀다.

치이이이이이이!

이번에는 지하실에 녹색 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하하! 독가스 갑니다!"

딕과 카미바레즈도 등장했다.

딕은 인챈트한 그물을 휙휙 던지거나 끈끈이 독을 바닥에 뿌려댔고, 카미바레즈는 혈류탄을 난사하거나, 가끔 작은 몸집으로도 놀라운 체술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아지트는 지하에다가 좁은 공간이었다. 독가스가 퍼지자 수십 명의 인원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반면 저 소년 소녀들은 마스크나 다른 장비를 쓰지도 않고 독가스 속에서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기랄! 어, 어떻게 여기까지!"

올백머리 대장이 굳은 얼굴로 소파 뒤에 숨었다.

"코어 개방한 애들 다 어딨어?!"

"그쪽은 블락 요원이 가셨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올백머리 대장은 심장이 철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붙잡은 장본인이자, 그날 이후 매번 악몽에 나오는 바로 그 푸른 머리의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쯤 전부 당했을걸요. 블락 요원은 3위계의 강자시니까."

"크윽, 네놈!"

올백머리 대장이 검을 꺼내 쥐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당신이 자경단에 뇌물 내고 풀려나게 된 건 제 생각이에요."

시몬이 미소 지었다.

"본거지를 찾아내야 했거든요."

"이 새끼!!"

올백머리 대장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바로 시몬의 발길질에 채여 바닥을 뒹굴었다.

"주민들을 겁박하고, 자릿세 뺏고, 이제 이런 나쁜 일은 청산하시죠."

시몬이 그 위로 올라타 대장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

무려 20년간 존속했던 센티널 갱단이, 무너져 내리는 건 단 하룻밤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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