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40화
금제(金帝), 바릭 하츠.
수백 년 전에 대륙에 실존했으며, 금속을 조종하는 이능으로 만 개의 무기를 동시에 다루던 전설적인 인물.
걸출한 영웅을 배출한 '하츠' 가문도 번영을 누렸으나, 시간이 지나며 금제의 피는 흐려져 갔다. 현재에 이르러 후손들에게 남은 능력으로는 사교회에서 숟가락 구부리는 장기자랑 용도가 최선이었다.
그렇게 구시대의 유물 취급받으며 하츠 가문도 쇠퇴해 갔지만, 어느 날 금제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났다.
바로 밀레나 하츠.
그녀는 형제자매들보다 우월한 금속 조종 능력을 보유했고, 형제들 중 유일하게 '가문 고유의 흑마법'을 전수받았다.
그것은 대네크로맨서 시대에 하츠 가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흑마법으로, 이능에 저주를 걸어 금속 외에 다른 물질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기술이었다.
물론 이 저주를 쓰는 동안은.
"한 번에 하나의 물질만 컨트롤할 수 있단 거지?"
메이린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밀레나를 보며 말했다.
밀레나는 충격받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 어떻게 거기까지......!'
그 말대로였다.
베이스는 금속 조종이긴 하지만 물체를 한번 만지고 자신의 옆구리에 그려진 영속 마법진에 가져다 대면, 저주의 힘이 이능의 효력에 간섭해서 그 물체를 조종하는 능력으로 바뀐다.
밀레나는 이 힘으로 딕을 상대할 때는 공성 사다리나 벽돌들을 던졌다가, 메이린을 상대할 때는 얼음을 만져서 자유자재로 마법을 회피한 것이다.
그리고 얼음 조종 능력으로 변해 있는 이때. 쏟아지는 화염은 어쩌질 못한 것이다.
"어쩐지 염력을 힘들이지 않고 마구 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메이린이 두 눈을 번뜩이며 칠흑을 일으켰다.
"날 가지고 논 대가는 비싸게 치러야 할 거야. 하츠 가문."
"......큿!"
밀레나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상황이 역전됐고, 이번에는 메이린이 그녀를 뒤쫓으며 흑마법을 시전했다.
<다크 위스프>
작은 불공들이 통통 튀며 날아갔다. 밀레나는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며 유리창을 깨고 빈 건물로 들어갔다.
"숨어봐야 소용없어!"
메이린도 유리창을 깨고 건물 안에 진입했다.
'발 하난 더럽게 빠르네.'
밀레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척이 없는 걸 보니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메이린이 손바닥에 칠흑화염계를 준비한 채 좁은 복도로 들어가는 순간, 밀레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메이린이 팔을 뻗었다.
<다크 블레이즈>
화아아아악!
화염이 정면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밀레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화염이 밀레나를 태우지 못하고 좌우로 벌어져 흐트러진 것이다.
'아까 잔불을 만져서 화염 컨트롤로 바꿔놨지!'
밀레나는 피해 없이 메이린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하지만 메이린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콜드 볼트>
메이린의 반대쪽 손에서 날아간 얼음 조각이 밀레나의 가슴과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그녀가 '커헉!'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내가 그런 수를 대비 안 했을까 봐?"
메이린이 이번엔 두 손바닥을 펼쳤다. 서로 다른 마법진이 쌓아 올려지며 한쪽에는 냉기, 다른 한쪽에는 불꽃이 일어났다.
'다중 영창!'
단순히 같은 마법을 여러 개 만드는 수준이 아니었다. 메이린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마법을 동시에 일으키고 있었다.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각 다른 도형을 그려야 하는 것처럼 극도로 까다로운 컨트롤이었다.
'어, 어쩌지?'
아까 저주도 메이린에게 날려봤지만, 캔슬레이션으로 깔끔하게 막아내는 걸 보니 저주에 대한 이해도도 최상급이었다.
역시 상아탑은 강했다.
이제는 과거뿐인 자신의 하츠 가문과는 다르게, 현재도 당당히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괴물 같은 가문.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저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태산처럼 거대해 보였다.
"크윽!"
밀레나가 다시 등을 돌려 유리창을 깨고 도망쳤고 메이린이 즉각 뒤쫓았다.
화르르륵!
콰드드득!
화염과 얼음이 번갈아 가며 밀레나에게 쏟아진다.
그녀는 정신없이 도망치기만 했다. 닥치는 대로 집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고 메이린도 집요하게 뒤쫓았다.
'그나마 내가 저 상아탑보다 유리한 점은......!'
밀레나가 다시 한번 유리창을 깨고 몸을 던졌다.
메이린도 바로 뒤따라왔지만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3층이었다.
'지형지물의 이해도!'
밀레나는 이번이 3회차였다. 그녀의 몸이 빠르게 떨어져 간다.
"내가 못 따라갈 것 같아?"
메이린도 망설임 없이 창가에서 뛰어내리며 두 팔을 뻗었다.
화르르륵!
콰드드득!
각각 화염과 냉기가 날아가 밀레나의 좌우로 치달았다.
한쪽은 불, 한쪽은 얼음. 어느 쪽을 컨트롤하면 다른 한쪽에 당한다.
-밀레나, 내 딸. 가문의 유일한 빛.
-키젠에 가거라. 가서 하츠 가문이 아직 살아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고 오거라.
밀레나가 이를 앙다물며 두 팔을 착 펼쳤다.
"나도 키젠이야!"
그녀의 눈에 예기가 깃들었다.
"나는 니들처럼 성장 안 할 것 같아?"
그녀의 허리춤에 있는 영속마법진과, 두 손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동시에 진동한다.
<이중 통제>
화아아악!
쿠구구구!
화염과 얼음이 간발의 차이로 밀레나 앞에서 멈췄다. 그 모습을 본 메이린의 눈이 커졌다.
'뭐야? 방금 두 물질을 동시에 컨트롤했어?'
쿨럭! 컥!
그러나 이 힘을 밀레나가 쓰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성공 확률도 10%대 미만에, 한번 쓰면 본래의 사양을 초월한 고유능력 발휘로 신체에 엄청난 부담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를 뚫었어!'
피를 토하면서도 밀레나는 잠시 스스로에게 감격했다.
그녀는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울부짖으며 메이린에게 달려들었다. 메이린은 아직 공중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이런!'
메이린은 재빨리 착지 지점을 포착하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월 오브 아이스>
쿠르르르르!
얼음벽이 솟구치고 메이린이 그 뒤로 내려왔다. 돌진하던 밀레나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급하게 벽을 치느라 얼음이 얇아!'
밀레나는 달리는 동시에 주머니에 넣어둔 다 녹아가는 얼음을 꺼내 옆구리에 붙였다. 저주가 가동하며 통제 물질이 화염에서 얼음으로 전환된다.
두 번 연속의 '이중 통제'는 불가능하다. 저 벽을 넘어봐야 메이린은 물러나면서 화염이나 얼음 따위를 날릴 것이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뚫고 들어가겠어!'
그녀의 두 팔이 얼음벽에 닿았다. 예상대로 얼음은 얇았다. 쩌적! 소리와 함께 얼음벽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돌진해서 메이린의 몸에 한 번이라도 닿으면......!
쩌어어어엉!
밀레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뇌가 새하얘지는 충격이 복부에서 치밀며 그녀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배를 주먹으로 강타당한 것처럼 숨이 턱 막히며 다리가 부르르 떨린다.
콰르르르-
이내 무너지는 얼음 사이로, 메이린이 주먹을 내지른 자세를 취한 모습이 보였다.
"마투......?"
밀레나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메이린은 눈을 감으며 천천히 주먹을 내렸다.
"괜히."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밀레나에게로 향했다.
"니가 멋진 모습 보이니까 나도 자극받았잖아."
<홍펭 오리지널 - 천흉>
털썩.
밀레나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자신의 얼음을 벽으로 삼아 관통기를 쓰다니.'
방금의 천흉이 제대로 적중하며, 밀레나의 배리어 게이지는 0%가 됐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기숙사로 들어가서 너무 질질 짜진 마~ 하츠 가문."
메이린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날 상대로도 그 정도로 싸운 건 동네방네 자랑할 일이니까."
밀레나가 쓴웃음을 흘렸다.
"역시 자만이 하늘을 찌르네, 상아탑."
미소와 함께 밀레나의 몸이 사라져갔다.
[밀레나 하츠 탈락.]
[수성팀 (15/15)]
[공성팀 (13/15)]
메이린이 홀가분한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시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에 닿은 것을 인지하지 않고, 그 너머를 찌른다는 느낌이야.
-앞에 있는 물체는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고, 그 너머의 대상에 집중해.
그녀가 헤실헤실 웃으며 가녀린 주먹을 꼬옥 쥐었다.
'천흉을 가르쳐 줘서 고마워, 시몬.'
다소 무모한 시도긴 했지만.
마투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며칠 전.
-시몬, 내가 생각하는 네 가장 큰 단점은 지속력이야.
딕의 공성전 강의에서 메이린은 그렇게 지적했다.
-물론 넌 강해. 공성전에서도 한 명은 확실히 잡을 수 있겠지. 문제는 넌 상대가 누구든 화력을 쾅쾅 퍼붓고 보는 타입이잖아. 오버로드도 그렇고, 특히 친위대가 그래. 한 명 잡고 지쳐서 금방 퍼져버리는 네크로맨서는 전장에서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시몬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며 메이린의 말에 동의했다.
공성전은 12시간 내내 전투가 끊이질 않는 장기전이다. 체력과 칠흑 안배, 그리고 지속력 있는 싸움이야말로 시몬에게 필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시몬은 스켈레톤 메이지를 준비했고, 화력으로 적 병사들을 압도하기보다는 기름열매로 주위에 불을 붙여가는 식으로 싸웠다. 메이린이 지적한 바를 정확히 고친 것이다.
그런데.
"......으,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방금 중요한 적수 한 명을 쓰러트렸음에도, 메이린의 얼굴은 뒤늦게 몰려든 부끄러움으로 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남한테는 지속력이 어쩌고 지적한 주제에, 정작 그녀 본인은 한 명 쓰러트리고 체력이고 칠흑이고 죄다 고갈된 상태였다.
"하으, 쪽팔려."
물론 밀레나 하츠를 쓰러트린 건 대단한 일이다. 수성팀 그 누구도 메이린을 비난하진 못하겠지만, 괜히 과거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터덜터덜 지붕 위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칠흑이 고갈된 지금 성벽에 가봐야 방해만 되리라.
칠흑도 회복할 겸 시몬이 날린 화살을 회수하러 왔다.
화살에는 시몬의 교복이 매달려 있었다. 혹시나 메이린이 보지 못할 걸 대비한 것 같았다.
"굳이 통신이 아니라 화살로 알려준 이유는 역시 그거겠지?"
사실 밀레나에 대한 정보를 통신으로 전달하는 것까지가 딕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몬은 거기에 아이디어를 하나 더 냈다.
통신으로 말하면 상대도 자연히 듣게 된다.
메이린이 상대에 대해 몰라서 고전하는 거라면, 그녀가 그 정보를 알게 됐을 때의 이점까지 활용하길 바랐다. 그래서 통신 대신 화살에 쪽지를 매달고 날렸다.
만약 메이린이 못 보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 뒤에 통신으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메이린은 무사히 혼자서 그 쪽지를 확인했고, 방심하고 있던 밀레나를 칠흑화염계로 직격시켜서 되갚아주는 데 성공했다.
부스럭 부스럭.
메이린이 화살에 매달린 시몬의 교복 재킷을 펼쳐 들었다.
"......."
잠시 시몬의 교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메이린은 슬쩍 자신이 입어보았다.
나란히 설 때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체격 차가 있는 건지 품이 엄청나게 컸다. 자켓이 허벅지까지 내려왔고 팔을 쭉 펼쳐도 소매 때문에 손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몬도 보기보다 크구나."
커다란 소매를 팔랑팔랑 흔들어보았다. 어쩐지 아기가 된 기분이라 웃겼다.
싱숭생숭한 기분이 된 메이린은 내친김에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소매도, 카라에도, 시몬의 잔향을 맡을 수 있었다. 향수는 뿌리지 않았지만 은은한 냄새가 난다.
그녀는 과감하게 옷 속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아보았다.
"!"
거짓말처럼 마음이 차분해지고, 스트레스 지수가 내려간다.
완벽한 안정감.
이렇게 시몬의 냄새를 맡으니 자연스레 시몬과의 여러 장면들이 머리에 스친다.
-됐어, 네가 더 중요해. 가르쳐 줄 테니까 자세 잡아봐.
시몬과의 마투학 시간을 떠올린 메이린의 얼굴이 화아악 뜨거워졌다.
그녀가 얼른 시몬의 옷에서 얼굴을 뗐다.
"......아, 진짜. 변태 같아."
위대한 상아탑 가문의 영애로서 체통을 지켜야 했다.
누가 보는 사람 없는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성벽으로 걸어갔다.
'근데 이대로 남의 옷 입고 가긴 좀 그렇나?'
메이린은 옷을 벗은 다음, 자신의 어깨에 살짝 걸치듯 했다.
이거 좋다.
왠지 추운 날, 신사가 겉옷을 벗어줘서 숙녀의 어깨에 둘러주는 그런 느낌.
메이린이 콧노래를 흘리며 성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칠흑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칠흑 회복이 조금은 느려졌으면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