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76화
흑연이 피어오르는 불구덩이의 경기장에서, 두 소녀가 격돌하고 있었다.
퍼어엉! 꽈앙!
공중에서 세르네의 '다크 플레어'가 무차별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잿더미가 내려앉아 빛바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메이린은 정신없이 경기장을 내달리고 있었다.
"하읍!"
공중으로 힘껏 도약해 쏟아지는 화염구를 피한 그녀가 검지를 쭉 뻗어 세르네를 조준했다.
<바운스(Bounce)>
손끝이 반동으로 밀려나고, 연기의 형상을 한 저주가 번쩍이며 날아갔다.
"흐응."
세르네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도 검지를 뻗었다.
날아가던 저주가 마치 안테나처럼 세르네의 검지에 빨려 들어가더니,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검지를 이리저리 흔들던 세르네가, '얍'하는 소리와 함께 손끝을 옆으로 세웠다.
쾅!
직후, 저주가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날아가 경기장 벽이 움푹 들어갔다.
"네 주특기인 칠흑원소계도 안 먹히는데, 저주라고 뭐가 다르겠니?"
"......큭!"
"이제 다시 내 차례야."
공중에서 다크플레어가 연달아 내려왔다. 메이린이 달리는 방향마다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흑연이 솟구쳤다.
"꺄하하하하!"
악역 같은 세르네의 웃음소리가 경기장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일방적인 힘의 폭력이었다.
"......모, 못 보겠어요."
마음 약한 카미바레즈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묻고 있었다. 딕도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이걸 어떻게...... 어? 시몬은?"
"시몬?"
두 사람이 뒤늦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같이 관중석에 있던 시몬이 사라져 있었다.
쿵!!
한편, 메이린은 날아오는 다크 플레어를 피하느라 경기장 끝까지 몰려 있었다.
커헉! 하고 그녀의 입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칠흑 역류증상까지 나타났다.
[세르네 아인다르크 : 100%]
[메이린 빌렌느 : 4%]
"하아. 하아."
한계다.
시야가 꿀렁거리면서 어지럽게 흔들렸고, 그렇게 꺾고 싶었던 세르네의 모습도 점점 흐릿해진다.
진짜 더럽게 강하다.
닿을 수조차 없다.
어르신들이 왜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물렸는지, 왜 탑의 법률까지 바꿔가며 세르네를 후계자에 올렸는지.
나 자신마저, 수긍해 버리고 만다.
분노에서 기인한 악바리가 풀리며 메이린의 전신에 서서히 힘이 떨어져 간다.
"메이린!!"
그때였다.
마치 귓가로 파고드는 듯한 그 강렬한 외침에, 메이린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바로 위쪽 관중석에 시몬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시, 시몬! 너 경기는......!"
"그런 것보다!"
시몬은 세르네 쪽을 한번 훑어보며 경계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잘하는 걸 생각해!"
"......뭐, 뭐?"
"넌 지금 상대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어. 이런 식이면 계속 놀아날 뿐이야! 지금까지 네가 배웠던 것들! 네가 잘하는 것들만 생각해!"
메이린이 더듬거렸다.
"하, 하지만! 지금 이거 안 보여? 경기장이 온통 불바다인데 여기서 칠흑빙결계가 무슨 의미가......!"
이 메시지를 단순히 불 vs 얼음으로 받아들이면 메이린은 절대 변화하지 못한다.
시몬의 눈이 번뜩였다.
"누구보다 강해질 거라며?"
그녀가 키젠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칠흑빙결계를 썼던 날.
그때는 의외로 마투학 수업 때였다.
C반과의 합동수업. 반 대항 피구 같은 공놀이 게임을 했었다. 메이린은 처음으로 칠흑빙결계를 사용해 상대인 세르네를 미끄러뜨리고는 말했다.
-나는 누구보다 강해질 거고, 키젠에서 졸업하기 전까지 널 내 손으로 꺾고 말 거야. 하지만 강해지는 데 굳이 너 하나에 얽매일 필욘 없지.
메이린은 자기 입으로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메이린은 칠흑빙결계를 메인으로 쓰기 시작하며 역량이 대폭발했다.
"명심해. 세르네를 쓰러뜨리는 것도, 이 경기의 승패도."
시몬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국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어머나~"
그때 세르네가 뺨을 감싸며 웃었다. 시몬과 메이린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시몬이 우리 상아탑의 학생을 위해 그렇게까지 말해주다니, 너무너무 행복하네요~"
그녀가 손가락을 세우자 공중의 다크 플레어 마법진들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질질 끌면, 위험할지도 몰라요?"
화아아아아아아악!
십수 개의 다크플레어들이 빈틈없이 날아왔다.
'.......'
메이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뜨거운 화마가 입을 쩍 벌린 채 다가오는 모습을 잠시 관조했다.
'내가 배웠던 것들.'
메이린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남아 있는 칠흑을 전신에 세팅했다.
'내가 잘하는 것들.'
키잉! 키잉!
경기장을 딛고 있는 그녀의 발바닥에 마법진이 펼쳐진다.
'세르네를 꺾는 것도, 이 경기의 승패도, 하나의 과정.'
총명한 사파이어 빛깔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풀려 있는 한쪽 눈이 바로잡히고.
힘이 꽉 들어가 있던 두 팔을 살짝 늘어뜨리며 흐느적거렸다.
"에라-"
비로소.
그녀의 입가에 홀가분한 미소가 걸렸다.
"이젠 나도 몰라!!"
꽈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엉!
다크플레어들이 연달아 바닥과 벽에 떨어져 폭발했다. 관중석에 있던 시몬도 거친 맞바람에 물러났다.
경기장에 보호막이 펼쳐져 있어도 앞 좌석은 녹아버리고 있을 만큼 고화력이었다.
관중들이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 나?"
"아니, 저길 봐!"
화염구가 떨어진 곳에서 한참을 떨어진 지점에, 메이린이 멀쩡하게 쪼그려 앉은 자세로 있었다.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텔레포트?!"
"갑자기 순간이동이라도 한 거야 뭐야?"
하지만 시몬을 포함한 몇몇 눈썰미 좋은 관중들은 간파했다. 그녀가 움직인 흔적을 보여주듯, 바닥에 일열로 쭉 그어진 얼음이 녹아 흐르고 있었다.
스윽.
메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 로드>
촤르르르르르르르륵!
바닥에 붙은 그녀의 두 발이 살짝 들리더니, 그 자리에서 부양하듯 얼음을 쏟아내며 고속 이동했다.
세르네가 즉시 화염구를 발사했지만, 메이린은 압도적인 속도로 바닥을 내달렸다. 바닥을 지나 벽을 올라타더니 급기야 경기장의 천장까지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날아오는 화염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오오오오오!
갑자기 반전된 분위기에 관중들이 환호했다.
세르네가 장악한 이 경기장 안에서 '칠흑빙결계'는 수초 만에 녹아내린다. 투사체로서 기대할 수 없고, 엄폐물로도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얼음을 계속 꺼내서 움직이는 이 아이스 로드라면, 상관없어!'
촤르르르르륵!
별처럼 무수히 날아오는 화염구들을 자유자재로 S턴 Z턴 등으로 피해 다니는 메이린의 실력은 그 누가 봐도 경악할 만한 수준이었다.
쾌속.
그리고 정밀한 컨트롤.
머리에 희멀겋게 쌓여 있던 잿더미가 바람결에 날아가고, 빛을 되찾은 하늘색 머리카락이 시원스럽게 휘날린다.
그녀의 시선이 세르네에게 고정되었다.
'얽매이지 마! 자유롭게 생각해!'
메이린이 손바닥에 마법진을 펼쳤다.
'이 아이스 로드처럼, 내 특기인 칠흑빙결계로 화염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그러고는 수식과 회로를 제멋대로 바꾸기 시작했다.
마법진 수정.
평소엔 엄두도 못 냈던 위험천만한 작업이었지만, 해내야만 했다.
'떠올려! 내가 키젠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그녀의 머릿속에 각종 교재에서 본 무수한 수식과 룬어들이 나열되었다.
"우리 메이린, 요리조리 잘도 피하네?"
화르륵!
세르네가 메이린의 진행 방향을 예측하고는 직접 손바닥에 다크플레어를 그려 발사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바. 다가오는 화염구를 향해 메이린이 올곧게 손바닥을 펼쳤다.
<아이스 캐논>
큼지막한 얼음 포탄이 포성음과 함께 발사됐으나, 화염구에 닿는 순간 치이익! 소리와 함께 녹아내렸다.
"굳이 얼음으로? 억지 부리는 건 좋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던 세르네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칠흑화염계에 녹아서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이 출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촤악! 촥!
물총이 쏘아져 나가듯, 녹은 물이 세르네에게 날아가 그녀의 팔과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배리어 게이지에 처음으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
와아아아아!
메이린의 첫 반격에 관중들이 열광했다.
"한 방 먹였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딕이 흥분하며 말했다.
"빙결마법의 수식을 수정한 거예요!"
카미바레즈가 감격한 목소리로 부르르 떨었다.
본래 칠흑빙결계의 수식은 온도, 강도, 사출속도 등을 강화하는 식이 일반적이지만, 메이린은 모든 수치를 최소한으로 낮추었다.
얼음으로서 기능하는 녹는점까지 떨어뜨리고, 그 대가로 물로 변했을 때의 사출 기능을 집어넣었다.
딕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짧은 시간에 그런 수정이 가능하다고? 마법진 폭발 없이?"
"네! 역시 메이린은 천재예요!"
카미바레즈가 소리쳤다.
"칠흑빙결계를 칠흑수류계로! 이러면 상성이 오히려 유리해지는 거 아닐까요?"
"그건 아냐."
어느새 다시 자리로 복귀한 시몬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시몬!"
"처음부터 칠흑수류계를 준비하고 쓰는 것과, 얼음이 녹은 물로 칠흑수류계를 흉내 내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야."
시몬은 학생회장 판타서스라는 칠흑수류계를 쓰는 괴물 중의 괴물을 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메이린의 사정이 나쁘단 거네."
"응. 그래도 세르네를 상대로 반격할 여지를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해!"
감을 잡은 메이린이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일부러 날아오는 화염에 얼음을 부딪친 다음, 녹은 물을 이용해 세르네를 변칙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동네 꼬마들 물총놀이야? 그냥 찍찍 쏴대는 느낌인데~"
세르네가 여유롭게 말했다.
"더 진지한 공격은 없니? 메이린."
"입 다물어!!"
메이린은 숨넘어갈 기세로 세르네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이스 로드로 피하면서, 얼음이 녹은 물을 끊임없이 날렸다.
"더 이상 네게 놀아나지 않아!"
그녀가 거칠게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경기장 전역의 얼음 녹은 물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마치 간헐천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공중에는 메이린이 안배해둔 마법진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다량의 물이 그 마법진을 통과하는 순간.
꽈드드드득!
꽁꽁 언 얼음송곳으로 변했다. 지금까지 메이린이 이 경기에서 사용한 얼음 중 가장 거대했다.
<메이린 오리지널 - 글레이시아(Glacia)>
"물을 다시 얼렸어!!"
"내리찍어!"
어느덧 경기에 몰입한 관중 모두가 극도로 흥분해서 외쳐댔다.
세르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뻗었다.
<다크 플레어>
화르륵!
세르네의 손바닥에서 일어난 다크플레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빙하를 집어삼켰다.
"나는!! 후계자 후보도! 상아탑의 이인자도! 세르네의 꼬봉도 아냐!"
메이린이 젖먹던 힘까지 다해 두 팔을 내리그었다.
"나는, 메이린 빌렌느다!!"
화아아악!
화염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메이린의 글레이시아가 불길을 뚫으며 내려왔다.
세르네의 놀란 표정과 함께, 얼음이 그녀의 배리어를 강타했다.
"......!"
"경기 종료!"
그 순간, 스크린의 배리어 게이지를 보고 있던 심판이 팔을 뻗으며 힘차게 소리쳤다.
[세르네 아인다르크 : 71%]
[메이린 빌렌느 : 0%]
"승자! 세르네 아인다르크!"
경기장 전역의 고열로, 결국 메이린의 배리어 게이지는 0이 되었다.
하지만 경기장 분위기는 도저히 메이린의 패배가 아니었다.
불끈!
메이린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온 힘을 다해 통쾌하게 소리쳤다.
"야아아아아!"
찌릿찌릿-
그 외침을 들은 모두가 전율했다.
관중들도 뒤따라 주먹을 움켜쥐며 커다란 환호성으로 응답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선배들과 동급생들 앞에서.
상아탑의 세르네란 거대한 이름에 묻혀 있던, 메이린 빌렌느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