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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382화 (382/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82화

진급시험까지 남은 기간 1주일. 시몬은 맹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다 칠흑이 바닥나면 신성 방어학 교수 '파라한'의 집에 방문했다.

이곳의 식물과 결계는 대기 중의 신성을 빨아들여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했기에, 남 눈치 보지 않고 신성 훈련을 하기엔 적격이었다.

"아칼리온! 일어나!"

시몬의 지시에, 작은 곰인형 같던 아칼리온이 신성에 뒤덮이며 우락부락한 괴물 곰으로 변했다. 시몬은 아칼리온의 몸에 그려진 신성 마법진 하나를 작동시켰다.

"달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던 아칼리온이 훌쩍 뛰어올랐다.

이때 시몬은 신성 마법진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법진에 흘러나온 신성이 빠르게 뻗어 나가 아칼리온의 앞발에 휘감겼다.

꽝!

그리고 내리치는 일격에 커다란 바위가 박살 났다.

"잘했어!"

시몬이 환하게 웃었다. 아칼리온도 하늘을 향해 천둥처럼 울부짖었다.

백마법 쪽도 빠트릴 순 없다. 자칭 신수학 지망생으로서 열심히 훈련하는 중이었다.

-냥!

-야옹! 아옹!

구경하던 새끼 고양이들도 짜리몽땅한 앞발로 냥냥 펀치를 몇 번 날리다가 제자리에 에쿵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시몬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따라 하고 싶었어?"

시몬이 하양이와 까망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몇 개월째 덩치는 그대로인데, 뿔은 조금 자라나서 이제는 털 위로 보일 정도가 됐다. 신수는 신수인 모양이었다.

"언제쯤 어엿한 신수로 성장해서 날 도와줄 거야?"

시몬이 두 고양이의 몸에 신성을 불어넣고 가볍게 공중으로 던졌다.

공중에 부웅 떠오른 고양이들의 눈부신 빛무리에 휩싸이며 형태가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파앗!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야옹! 냐아아옹!

'신나! 또 해줘!'

고양이들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시몬에게 신성을 써달라며 앙탈을 부려댔다.

그렇게 신성을 일으켜 던져줬더니 또 해달라고 쪼르르 오고, 다시 해줬더니 또 쪼르르 달려왔다.

"이, 이제 그만하자. 피곤해."

칠흑과 신성 모두 바닥나서 풀밭에 드러눕자, 하양이는 시몬의 머리 위로 올라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고 까망이는 다리 밑의 그늘에서 교복을 발톱으로 벅벅 긁어댔다.

기말고사 준비로 쌓인 피로 때문에 낮잠이 절실했다.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돌아와, 아칼리온."

아칼리온의 신성을 회수해 버리자, 근육질 가득한 곰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우욱 줄어들며 작은 곰돌이 인형처럼 변해 버렸다.

-우엉!

그리고 작아진 아칼리온을 보자마자, 새끼 고양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우다다다 달려갔다.

"미안해. 조금만 애들이랑 놀아줘."

-우어엉!

고양이들에게 도망치는 아칼리온이 원망 가득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 * *

모든 1학년 키젠 학생들은 진급시험 대비 특훈에 들어갔다.

기말고사 이후에는 전 과목이 단축수업이었다. 교수들도 필기수업과 교과서 진도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던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속성 훈련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별야의 연구실.

"뺀질이, 네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돼지우리처럼 엉망이었던 연구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쓰레기도 잘 묶어서 분류했고, 먼지나 얼룩도 말끔하게 닦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 청소용 메이드옷을 입은 딕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씩 웃고 있었다.

"나 참."

별야가 픽 웃으며 걸어가다가 깨끗해진 자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딕도 잽싸게 뒤따라와 고풍스러운 도자기에 담긴 술병을 내밀었다. 그러곤 직접 개봉해서 잔에 따라주기까지 했다.

"뭔데?"

"일단 한번 드셔보시죠."

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별야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셔보았다.

"!!"

그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한 잔을 싹 비웠다. 그러곤 멈추지 않고 남아 있는 술병까지 들어서 꼴딱꼴딱 전부 마셔 버렸다.

"캬하!"

그녀가 아저씨 같은 추임새를 쏟아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눈을 감은 그 표정에는 잠시 아련한 추억이 흘러가고 있었다.

"뺀질이. 이거 어디서 구했냐?"

딕이 방긋 웃었다.

"초원의 마르라트족들은 특별한 마유주를 즐겨 먹는다고 하더라구요. 홍펭 교수님께 들었습니다!"

"......새끼."

그녀들이 살던 초원과는 한참을 떨어진 이 로크섬에서는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물건이었다.

그녀가 입가를 슥 닦으며 말했다.

"뭘 원하냐?"

그 즉시 딕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샥샥 손바닥을 비볐다.

"하하! 보상을 원해서 한 일은 아니고, 그냥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봐!"

"제가 잘하는 건 정보전이거든요.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서 공략해 내는 게 특기죠. 근데 던전은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몬스터들이 나올 수 있잖아요."

"그렇지!"

"사전정보가 없는 장소에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순수한 강함."

술기운에 뺨이 불그스름해진 별야가 삐쭉삐쭉한 이를 드러냈다.

"그럴 때야말로 순수한 나 자신의 힘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제가 그런 쪽에 좀 약합니다."

달칵!

자리에서 일어난 별야가 겉옷을 어깨에 걸치며 손짓했다.

"아, 뭐 해? 빨랑빨랑 따라 나와."

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옙! 교수님!"

* * *

"시작할게. 카미!"

"네! 메이린!"

메이린이 두 팔을 휘두르자 방대한 범위의 얼음폭풍이 펼쳐지며 정면을 가득 메웠다.

그것은 마치 얼음의 사자가 입을 쩍 벌리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프로스트 노바>

콰콰콰콰콰콰콰!

거기에 메이린의 마법진 변형 수식을 넣어, 얼음 폭풍에 더해 얼음 조각까지 카미바레즈에게 쏟아졌다.

"흡!"

카미바레즈는 뒤로 물러나면서 왼손을 총처럼 말아쥐더니 혈류탄을 연사했다. 위력이 절감됐지만 반동이 안정적으로 변했고, 날아오는 조각을 정확히 맞춰 쓰러트렸다.

차악!

이내 그녀가 자리에서 멈추며 몸을 빙글 회전시키더니, 오른손바닥에 완성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우르슬라 오리지널 - 블러드 스톰>

고오오오오!

피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전진하여 얼음폭풍에 부딪혔다. 사방으로 핏방울이 얼음의 파편이 튀었다.

이렇게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우와아~"

그곳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건물의 유리창.

은발 머리카락의 소녀가 두 손바닥과 얼굴을 창문에 착 붙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잘 싸운다! 파이팅~ 파이팅~!"

"......."

그리고 그런 소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남자, 카쟌은 습관처럼 눈에 난 흉터를 긁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키젠에 돌아오셨군요. 네프티스 님."

"웅!"

네프티스는 다시 창가에서 떨어져 소파 위에 폴짝 걸터앉았다.

"요즘 많이 바빴거든!"

"국경에서 신성연방의 도발 수위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은 수습할 만해~ 카쟌은 학교생활 어때? 재밌어?"

카쟌이 한숨을 푹 쉬었다. 흉터를 긁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빠졌다.

"임무에 집중하고 싶지만 학교에서 내는 과제를 소화하는 것도 벅찹니다."

"와웅!"

"와웅이 아닙니다. 임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프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 안 돼! 그럼 교직원들이 내가 심어둔 스파이가 누군지 다 알게 되는걸!"

"......."

"연속 유급은 안 되는 거 알지? 이번엔 2학년으로 꼭 진급 성공해야 해. 그게 이번 임무야."

카쟌이 힘겨운 소리를 냈다. 네프티스는 그저 순진무구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그보다."

스윽.

카쟌이 어떤 서류를 내밀었다.

"암흑연합의 지배자께서 일개 요원을 만나줄 만큼 시간이 있으시다면, 이거나 한번 봐주시죠."

"뭔데에?"

"시몬이 조사를 부탁한 내용입니다. 그는 실라지의 대타인 발터 교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네프티스가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서류를 들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발터? 본부에서 정신계 저주까지 걸어서 빡세게 검증했다는데."

"그 사람들 일 처리를 믿습니까?"

"못 믿지~ 헤헤!"

그때 서류를 읽어내던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웅? 근데 이거 의심하는 자료 맞아? 조혈주사 이상없음. 필체검증 이상없음. 뭐 그런 내용인데?"

"의심하는 자료가 아니라 발터 교수에 관련된 자료들을 전부 가져온 겁니다."

"오히려 지들이 검증해 놓곤 뭐래~"

네프티스가 서류를 툭 내려놓았다.

"그럼 카쟌이 발터를 의심하는 이유는?"

"발터 교수와 관련된 용의자. '카론 백작'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실종됐죠."

"응. 그런데?"

"그의 죽음을 깊게 파헤칠수록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나왔습니다."

가문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구매품들.

가문의 창고를 외지인에게 대여해 준 흔적.

네크로맨서도 아니면서 심장수집을 위해 몬스터 농장을 운영한 정황.

저택에 정체불명의 괴인들이 왔다 갔다 했다는 하인들의 증언.

그리고, 폭풍우에 휩쓸리기 일주일 전, 나는 이제 죽을 거다. 나는 곧 죽을 거라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는 부인의 증언까지

"하지만 기록이 아닌 흔적이고, 증거가 아닌 증언일 뿐이라, 확실한 무게감이 실리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발터 교수와 연관 짓는 것도 억지스럽죠."

"내가 봐도 그래."

네프티스가 짧은 다리를 휙휙 흔들었다.

"다 알면서 굳이 내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제게 수사권을 주십시오."

"으으음~ 이 증거로 키젠 교수를 수사하는 건 택도 없다는 거 알지?"

"비공식 수사권이면 됩니다."

"그런 거라면, 좋아."

네프티스가 턱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찜찜하다고 느꼈다면 이번에 한 번 해소하는 것도 좋겠지. 한번 해봐. 넌 감이 좋은 아이니까."

그 말에 카쟌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 *

다음 날.

카쟌은 발터의 조교 중 한 사람을 조용히 불러냈다. 그것도 가장 신참으로.

"무, 무슨 일인가요 학생?"

불려 나온 조교는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키젠 학생이라지만 1학년이 조교를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하다니, 건방지기 그지없었다.

"협조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네?"

그녀의 관자놀이에 '빠직'하고 혈관이 맺혔다.

'내가 언젠가 이 일 때려치우고 말지 진짜.'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귀족 꼬맹이들 헛소리 받아주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조교 신분으로 이런 일을 숱하게 겪었던 그녀는 비즈니스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학생? 물어볼 게 있다면 학과사무실에 찾아와서 정식으로 절차를 밟......."

"정식절차를 밟을 일이 아닙니다."

카쟌이 품을 뒤적거리더니, 메모장 쪽지를 수사 영장처럼 당당하게 들어 올렸다.

어린 아동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게 분명한 꽃이나 나무, 구름 등의 유아틱한 낙서가 보였다.

"하, 학생.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얼굴이 시뻘게진 조교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카쟌은 말없이 낙서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모든 교직원들은 카쟌 에드발트의 수사에 협조할 것! -네프티스- >

그리고 적혀 있는 네프티스 본인의 서명까지.

장난하지 말라며 화를 내려던 조교는 서명을 보았다. 그리고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이 유아틱한 그림체.

그러나 아랫부분에는 고즈넉한 필체가 묻어나는 서명.

알고 보니 이 서명에는 칠흑이 묻어나 있었다. 섬뜩하고 압도적인 느낌의 칠흑은 그 사람이 확실했다.

얼굴이 백지장이 된 조교가 기겁하며 말했다.

"뭐, 뭐뭐, 뭐든지 하명해 주십시오!"

조교의 신뢰를 얻은 카쟌은 비로소 계획을 설명했다.

계획이라 할 것도 없이 간단했다.

"이 깃펜으로 발터 교수의 서명을 받아내 주시면 됩니다."

카쟌이 검은 케이스를 열자 까마귀 깃털로 만든 깃펜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뭔데요?"

"평범한 깃펜처럼 보이지만 나름 아티팩트입니다. 효과는 하나."

카쟌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본인의 이름만을 쓰게 되는 깃펜입니다."

임무를 이해해야 했기에, 카쟌은 그녀에게 깃펜을 쥐게 하고 아무 글자나 써보도록 했다.

그녀는 오늘 먹고 싶은 메뉴를 힘주어 썼지만, 정작 종이에 적힌 건 '아미레트 마샤니'라는 본인의 이름이었다.

"와......! 신기하네요."

"이제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현재 네프티스는 키젠 본부를 움직여 발터에게 업무 폭탄을 터뜨렸다. 발터는 지금 본인 연구실에서 일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그때 조교가 들어가서 한창 바쁜 발터의 서명을 받아낸다. 발터는 본인의 이름을 쓰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깃펜을 들고도, 발터가 자신의 이름인 '발터 한'을 쓴다면 그는 결백하다.

하지만 다른 이름이 나온다면, 발터는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속이고 키젠에 들어온 것이다. 공식으로 키젠 본부의 수사가 가능해진다.

어쨌거나 카쟌의 목적은 발터를 공식수사로 넘기는 것. 물론 '유다'라는 이름이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다. 시몬의 의심이 맞아떨어지는 거였으니까.

"혹시 발터 교수님은 서명에 신경을 쏟는 스타일입니까?"

"아, 아뇨. 그냥 보지도 않고 휙휙 휘갈겨 쓰는 타입이세요."

"잘됐군요.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카쟌이 호출어를 말했다.

"'와인'으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조교는 서명을 받을 서류와 깃펜을 들고 발터의 연구실로 향했다.

높으신 분들의 명령이라서 따르기는 하지만, 왜 비밀리에 발터를 수사하는지는 조금 의아했다.

'이번 일로 발터 교수님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 뭐.'

수사를 맡은 그 카쟌이란 사람도 크게 기대하진 않는 눈치였다. 애초에 이름을 쓰는 걸로 뭘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터의 연구실 앞에 섰다.

콜록 콜록!

문 너머로 기침 소리가 들린다. 최근 발터는 몸이 좋지 않다.

"발터 교수님, 막내 조교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 들어오세요. 콜록!"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발터가 서류의 산에 파묻혀 정신없이 서명을 휘갈기는 모습이 보인다.

카쟌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조금 바빠서......."

"아,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저번 분기 회계장부 문서인데 교수님 서명이 없으면 안 돼서요."

그녀는 서류판에 꽂은 문서와 깃펜을 함께 책상에 내려놓고 발터 쪽으로 스윽 밀었다.

발터는 문서의 제목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별 의심 없이 그녀가 준 깃펜으로 마지막 장에 서명하고는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낙엽 빛깔의 머리카락, 지적인 안경, 업무 폭탄을 맞아 힘든 와중에도 보이는 자신에게 지어주는 미소까지.

매번 보는 얼굴이지만 질리지 않는 외모였다.

조교는 발그레한 홍조를 띤 채 서류철과 깃펜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나가려는 그때.

"아미레트 마샤니 조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발터가 무척이나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싸! 이름으로 불러줬다!

그녀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발터는 그녀에게 한번 웃어주고는 다시 서류 작업에 몰두했다. 사각 사각 깃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이런 반듯한 사람한테 무슨 의혹이 있다고 수사? 신인 교수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조교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서류판에 꽂힌 서류를 들어 올렸다.

교수의 서명이 빠짐없이 됐는지 확인하는 것도 조교의 임무였으니까.

그렇게 서류를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녀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팔락-

발터 교수님이 언제 내 풀네임을 알고 있었지?

팔락-

첫 대면식에서 조교들이 단체로 이름만 언급하고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그냥 막내로 통했다.

기억력이 좋으신건가?

팔락-

불갈한 예감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치밀기 마련이었다.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파르르 떨린다. 넘어가는 이 종이가, 마치 자신의 수명처럼 느껴졌다.

팔락-

이윽고 도착한 마지막 장.

서류가 넘겨지는 중이라 앞에 한 글자만 보였다.

-실

아직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라

서류가 더 벌어지며 두 번째 글자가 보인다.

그녀는 비로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카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떤 경우에도 본인의 이름을 쓰게 되는 깃펜입니다.

마침내 페이지가 완전히 넘어가고.

발터가 쓴 서명이 그녀의 눈에 확실히 보였다.

그것은.

-실라지 비사바르.

악몽이었다.

전신에 닭살이 쫘아악 돋았다. 온몸의 피가 굳어졌다. 그녀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바, 바, 발터 교수님이...... 실라지 교수님이라고?'

그녀는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삐걱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서류에 파묻혀 정신없이 일하던 발터가.

"......."

어느새 소름 끼치는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왜 그러십니까? 아미레트 조교."

싸늘한 표정이 이내 빙그레 미소 짓는 얼굴로 바뀌었다.

나가야 했다. 나가야 했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아, 아! 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수님! 그럼 저는 이만......!"

그녀가 얼른 고개를 되돌리며 발터의 연구실에서 빠져나가려는 순간.

뚝.

그녀가 든 서류 위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뚝 뚝.

핏방울이 번져 나가며 서류가 붉게 변했다.

그녀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코에서 코피를 뚝뚝 떨어뜨리던 그녀는.

이내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고, 귀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네는 예전부터 그랬지."

발터에게서 들은 적 없는, 그러나 귀에 익숙한 어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아. 푹 쉬게."

그녀의 의식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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