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89화
시몬 일행은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몇 번이고 넘어서 산맥의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다. 몬스터의 개체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근데 말야."
메이린이 목덜미를 쓱쓱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저거 나만 신경 쓰이니?"
나란히 걷고 있는 세 사람의 뒤편, 헥토르가 거리를 둔 채 홀로 느린 걸음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불안해. 저 막무가내가 조용히 따라오는 것도 이상하고. 갑자기 확 돌변해서 뒤통수치는 거 아냐?"
토토가 그 말을 받았다.
"괘, 괜찮지 않을까? 상공에는 옵저버도 떠 있고, 우리 모두 녹화용 아티팩트도 차고 있잖아."
시몬도 그 말에 동의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헥토르! 이왕 협력하는 거,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 좀 하자!"
"바, 바보야! 하지 마!"
메이린이 기겁하며 시몬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뒤따르던 헥토르도 표정을 확 구겼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시몬 폴렌티아!"
역시 저렇게 나오는구나. 시몬은 조용히 웃었다.
"......뭘 처웃고 있지?"
헥토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메이린과 토토가 기겁하며 즉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있잖아, 헥토르.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시몬의 말에 헥토르의 걸음이 멈췄다.
"결평 같은 거 말고 개인적으로 겨뤄볼래? 누가 더 강한지."
"......."
헥토르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할 이야기라는 거."
성큼.
칠흑을 일으켜 순식간에 시몬의 옆에서 나타난 헥토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해봐라."
시몬은 씩 웃었고 메이린과 토토는 다소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일단 우리가 알아낸 정보부터 말하자면......."
시몬과 헥토르는 빠르게 정보를 공유했다.
그리고 던전주를 상대할 때 어떤 전술을 구사할 것인지도 논의했다. 헥토르는 기꺼이 자신이 전면을 맡겠다고 했다.
"......남자애들은 가끔 보면 지능이 석기시대에서 멈춘 것 같아."
메이린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토토에게 말했다.
후두두둑!
그때 돌 파편이 네 사람 쪽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높은 언덕 위에 사람들이 있었다.
"잘 만났다! 시몬 폴렌티아!!"
하하하하하! 하고 악당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높은 곳에 있어서 누가 누군지 확실히 구분되진 않았지만, 흰 제복을 어깨에 올려둔 차림을 보니 특례 7번 엘리사가 확실했다. 뒤에는 그녀의 파티원 세 명이 있었다.
"딱 각오해!"
그녀가 신이 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우연에 우연이 겹친 낙석사태가 시작될 테니까!"
암벽 꼭대기에 유령선 두 대가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포격으로 절벽을 부숴서 낙석을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토토가 굳은 표정으로 항의했다.
"비, 비겁하게 무슨 짓이야!"
"엘리사 셀린."
그때 헥토르가 끼어들었다.
뒤늦게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지 알아챈 엘리사가 입을 딱 벌렸다.
"헤, 헥토르? 네가 왜 시몬이랑......?!"
"안녕~"
그 옆의 메이린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럼 나도 우연히 네 배를 불살라도 되겠네?"
엘리사가 가장 경계하는 두 사람이 마침 딱 여기에 있었다.
"엘리사."
그때 시몬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우린 던전주가 있는 곳을 알고 있어."
그녀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던전주의 위치를 안다고?"
"그래. 여기서 싸울 게 아니라, 우리랑 같이 던전주를 잡고 좋은 성적으로 2학년에 진급하는 게 낫지 않을까?"
"......."
"선택은 네 몫이야."
그녀의 파티원들도 결정을 내려달라는 듯 엘리사를 보았다.
엘리사는 엄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엘리사 셀린은 뼛속부터 정치가 체질이다."
헥토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분과 실리를 중시하는 성격이니 거절할 리는 없겠지."
헥토르의 말대로였다. 결국 엘리사도 던전주 사냥에 합류하기로 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
언덕에서 내려온 그녀가 손을 척 뻗었다.
"대장 자리는 내가......!"
"웃기고 있네! 내가 대장이야!"
메이린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왔다.
"껴달라고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은 바에 뭐가 어쩌고저째? 그리고 정치가한테 우리가 권력을 줄 것 같아?"
헥토르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대장은 나였을 텐데."
"넌 갑자기 뭔데!"
역시 아이덴티티가 강한 네크로맨서들. 서로 대장을 하겠다고 싸우는 모습을 보며 시몬은 한숨을 쉬었다.
다툼이 더 커지기 전에 중재해야겠다.
"얘들아, 내 말 좀 들어줘. 일단......."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시몬의 말이 멈췄다. 다투던 세 사람의 목소리도 끊겼다.
주위의 경관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바위도, 절벽도, 대지도, 시뻘건 석양이 내리쬐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저게......?"
던전의 하늘에 고리가 떠 있었다. 그 크기를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피의 고리.
액체처럼 찰랑거리며 흐르는 그것은, 던전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아 세운 채 하늘에서 모든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던전의 트리거를 발동한 거 아냐?"
"이제 보스 몬스터가 나오나 봐!"
다른 학생들은 원래 이런 던전인 줄 알고 전투를 준비했지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몬은 아니었다.
지독하게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훑었고, 뒷목이 뻣뻣하게 당겨지며 입이 바싹 마른다.
모든 오감이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저거,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시몬이 기억을 헤집었다. 그리고 무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 하나가 올라왔다.
로레인이 해준 이야기였다.
-던전의 입구에는 '피의 고리'라는 흑마법을 사용해서 출입을 막아놓았는데, 허락받지 않은 자가 이 고리에 가까이 가면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서 죽는다고 해.
-그 어떤 군대나 치안조작도 출입하지 못하는 철저한 폐쇄성 때문에, 범죄자의 소굴이자 악의 구렁텅이가 됐대.
그랬다. 방과 후 BMAT에서, 로레인에게 실라지가 어디에 갔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그녀의 대답이었다.
틀림없이 실라지 교수가 이 피의 고리를 해제하러 갔다고 했었다.
'그런데 저게 왜 이 던전에 있는 거지?'
"꺄아아아!"
"허어억!"
생각에 잠겨 있던 시몬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사방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미친 듯이 크게 달린다. 타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 몸이......!"
메이린과 토토, 헥토르와 엘리사까지.
시몬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의 몸이 용광로의 끊는 쇳물처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을 중심으로 이질적인 혈관 같은 것이 주르륵 퍼져나갔다.
그 현상은 심장이 있는 가슴에서부터 다리와 머리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뭐야? 대체 무슨......!'
"시몬!"
시몬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메이린마저 변이 상태가 다리까지 퍼져 나갔고 이제는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나......!"
촤르르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동상처럼 변해 멈춰 버렸다. 시몬은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토! 헥토르!"
다른 학생들도 완전히 용광로처럼 붉은빛으로 뒤덮였다.
떠들썩하던 모두가 거짓말처럼 침묵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오로지 심장의 박동만이 들리고 있다. 시몬은 급히 달려가 메이린의 어깨를 짚어보았다.
"윽!"
뜨겁다.
인간의 몸에서 날 수 있는 열기가 아니다.
'역시 저 하늘의 고리가 원인인가?'
투둑. 툭. 툭.
상공에 떠 있어야 할 옵저버들 마저 열기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비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만 멀쩡한 거지?'
두근!
그때 시몬도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것을 느꼈다.
시몬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갑자기 몸의 열기가 화악 달아올랐다.
다른 학생들처럼 변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제기랄!'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법진을 몸에 발동시켜 혈독을 일으켰다.
'맹독학의 저항계로 버티자!'
코어에 쌓아뒀던 칠흑을 온몸으로 보내고, 피를 '혈독'으로 변환시킨다.
혈독이 되자마자 피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듯 들끓는다. 마치 억지로 혈독상태를 해제하려는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저 고리는 일종의 초광범위 혈류계 저주. 그중에서도 피를 변질시키는 종류라고 가정한다면.
'피의 변질을 막는 저항계로 간다.'
시몬은 눈을 감은 채로 아공간에서 해독키트를 꺼낸 다음, 손의 감각을 이용해 재료를 골라 입으로 씹었다.
'버텨! 버텨! 버텨!'
두근-
두근-
몬스터가 공격해 올지도 모르니 스켈레톤을 꺼내놔야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저항계를 갖추는 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고 시몬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집중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아아아아."
서서히 시몬의 몸 안에 열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몬이 굳은 표정으로 눈을 떴다.
'......감사합니다. 별야 교수님.'
상태가 해제된 걸 느끼며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가볍게 움직여보며 상태가 좋아진 걸 확인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여전히 피의 고리는 회전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시뻘건 용광로 속에 들어간 듯한 상태 그대로, 모든 활동을 정지한 채 심장만이 부자연스럽고 거칠게 뛰고 있었다.
마치 심장을 내놓고 몸이 굳어버린 모습이다.
다시 깨울 수 있을까?
"만약 이게 그냥 저주라면......."
신성을 쓰면 해결될지도 모른다.
시몬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단 여기서 가장 몸이 튼튼해 보이는 헥토르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 두 손을 올리자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스스로 암시를 걸듯 중얼거린 시몬이 눈을 부릅떴다.
<큐어(Cure)>
파아앗!
백색의 섬광이 시몬의 손바닥에서 일어났다.
저주나 독을 해제하는 백마법인 '큐어'. 네크로맨서에게는 해일 수도 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이런."
하지만 헥토트의 몸에는 변화가 없었다.
저주라면 뭔가 반응해야 하는데 어떤 반응도 없었다.
'단순한 저주가 아냐.'
시몬은 길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니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긴 고민 끝에.
"피어, 헤르세바. 나와주세요."
시몬이 주력 소환수들을 꺼냈다. 초대형 아공간에서는 피어가, 작은 아공간에서는 헤르세바가 튀어나왔다.
[크흐흐! 괜찮겠나 소년?]
파멸의 대검을 어깨에 올려둔 피어가 망토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옵저버랑 녹화 아티팩트도 전부 무력화된 것 같아서 괜찮아요."
파지직! 파직!
이미 시몬의 아티팩트 목걸이도 피의 고리가 작동한 순간 무력화됐다. 피어는 파멸의 대검으로 그것을 떼어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군단을 들키는 상황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비상사태입니다."
[알겠다!]
시몬은 피어의 본 아머를 입은 다음, 헤르세바와 함께 빠르게 달려갔다.
터엉! 터엉!
피어의 힘으로 바위산을 빠르게 넘어 이동하면서 시몬은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던전을 클리어하는 수밖에 없어!'
더더욱 속도에 박차를 올렸다. 중간중간 여기까지 도달한 몇몇 학생들이 보였지만 전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샤텔마저."
큼지막한 동상이 보이길래 누군가 했더니 거인 혼혈의 샤텔 마에르였다.
저 정도의 강자도 당한 걸 보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조혈주사.'
피를 바꾸는 저주. 그리고 시몬 혼자서만 증상이 늦었다.
이 사실을 미루어보아 누가 범인인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었다. 시몬의 잇새가 빠득 갈렸다.
[소년! 도착했다!]
"네."
정신없이 산꼭대기를 밟고 달리는 그의 시야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인 좁은 협곡이 들어왔다.
[......우으! 끔찍해.]
헤르세바가 몸을 떨었다.
던전주에게 향하는 협곡을 지키고 있는 몬스터들이 전부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던전주에게 가려면 이 수를 전부 상대해야 했다니, 조금 아찔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시몬은 시체의 협곡을 힘들이지 않고 무혈입성했다.
[결계의 흔적이다. 소년!]
던전주의 방으로 향하는 길에 결계가 완전히 산산조각 난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던전을 전부 박살 내놨다.
시몬은 성큼성큼 망가진 결계를 넘어 마침내 던전주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드높은 바위산으로 틀어 막혀 있는 널찍한 분지 같은 공간.
그곳에 있는 건.
'아.'
던전주.
수천, 수만 개의 하얀 촉수를 움직이는, 사슴을 연상케 하는 순백의 몬스터의 가슴이 시뻘건 창에 꿰뚫려 있었다.
벌써 누군가 던전주를 해치웠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그리고 던전주의 앞에 서 있는 남자.
가을 낙엽 같은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의 남자를 보는 순간 시몬의 눈에 커다란 분노가 일렁였다.
"발터 교수......!"
"그 이름은 버렸네."
발터가 안경을 벗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며 음침하게 웃었다.
"실라지 교수라고 부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