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96화
쩍!
쩌저적!
공허로 차원을 베어 실라지를 처치한 직후, 헤르세바의 세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큭!'
동시에 시몬도 어마어마한 탈력감과 반동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에 쥐고 있던 공허의 검도 해제되어 사라졌다.
시야가 뒤틀리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이대론 위험해.'
여기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실라지는 확실히 베었지만, 아직 혈천교 전원을 처치한 게 아니다. 저 잔당들을 밖에서 상대해야 했고, 무엇보다 아직 혈석성의 효과가 잔존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정신을......!'
쩌저적!
쩍!
쨍--!
세계가 산산이 부서진다.
시몬에게 뭐라고 외치며 다가오던 에르제베트와 아케뮤스의 몸이 사라진다. 혈천교와 싸우고 있던 프린스도 사라졌다.
미라들은 물론, 황금도시와 데스랜드, 거미굴과 정글.
좀비, 송장거미, 스컬윙까지.
헤르세바가 이곳으로 '불러온' 모든 존재들이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간다.
이내 주위의 경관이 바뀌며 제3권능을 쓰기 이전의 장소로 돌아왔다.
던전주의 방. 드높은 검은 절벽들과 광석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보인다.
'혈석성은?'
그런데 실라지가 시전했던 그 혈석성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날카로운 것에 잘려나간 흔적이 보인다.
"나, 나왔다!"
"그 끔찍한 세계에서 빠져나왔어!"
혈천교의 광신도들은 그저 '모래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환호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건 시몬. 바닥에 힘없이 떨어져 있는 헤르세바. 그리고 힘이 거의 다 소진된 피어뿐.
이내 광신도 잔당들의 시선이 시몬에게로 향했다.
"이제 확실히 지쳤나 보군."
그들이 무기를 들고 저벅저벅 다가왔다.
시몬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신을 유지한 채 눈을 뜨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대주교님도 쓰러트린 꼬맹이라."
한 광신도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네 목을 바치면 최소 주교 자리는......!"
그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사방에 빨간 검격이 그어지더니 열댓 명의 광신도들의 몸에서 동시에 피분수가 솟구쳤다.
푹! 푹! 푹! 푹! 푹!
공중에서는 순백의 깃털들이 날아와 광신도들의 목덜미에 명중했다. 그들 모두 입에 거품을 물거나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뭐, 뭐야!"
"기습이다!"
광신도들은 혼란에 빠졌다. 시몬은 고개를 들었다.
'아.'
마치 하늘에서 구세주가 강림하듯.
한 쌍의 천사와 악마처럼.
두 명의 소녀가 내려왔다.
한 명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다른 한 명은 백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중력으로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치켜 올라갔다가, 천천히 어깨와 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몬! 괜찮아?!"
검은 머리의 소녀가 다급히 물었다.
"후훗. 역시 살아 있을 줄 알았어요~"
상앗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여우 같은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윙크했다.
"로레인! 세르네! 너희들이 어떻게......!"
와락!
시몬이 말을 멈췄다. 로레인이 달려와 그를 와락 껴안은 것이다. 은은한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고생했어."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나 막강하고 위엄 있는 모습만 봐왔는데, 이렇게 위태로운 그녀의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와, 치사하게 그렇게 혼자 껴안기 있어요?"
세르네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틈을 타서 광신도 하나가 뒤에서 다가오다가, 공중에서 날아온 깃털에 맞아 쓰러졌다.
"......발터, 아니. 실라지 교수의 짓이지?"
로레인이 물었다.
대충 혈석성 등의 흑마법을 보고 파악한 모양이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괜찮아."
로레인이 그를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뒤는 우리한테 맡기고, 푹 쉬어."
그 한마디에.
시몬은 필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이성의 끈을 비로소 놓았다. 그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
"......."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가 기절한 시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공간을 열고 베개를 꺼냈다.
지극히 본인 취향 가득한 프릴 달린 핑크색 베개. 낯선 장소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그 아끼는 베개를 시몬의 머리맡에 대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악!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서 분노어린 안광이 번뜩였다. 광신도들이 움찔했다.
[대가를 치러라.]
그녀의 이마에 두 개의 뿔이 솟아올랐다. 뒤편의 허공이 입처럼 벌어지고, 그 안에서 시뻘건 죽음의 섬광이 광신도들에게 뻗어 나갔다.
압도적인 화력.
경로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붉은 기둥이 가로지를 때마다, 대지가 갈라지고 광풍이 휘몰아쳤다. 혈천교 잔당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세르네! 한 놈도 놓치지 마!!"
이능을 난사하며 로레인이 소리쳤다.
"아까부터 박박 성질 긁어대시네?"
세르네가 두 팔을 교차하며 깃털을 날려 보냈다.
"명령하지 마요. 나는 당신이 아니라 시몬을 위해서 일하는 거니까."
촤르르르르르륵!
수백 장의 깃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것 중의 몇십 장은 결계를 펼쳤고, 몇십 장은 하늘에 '다크 플레어'를 띄웠다. 그리고 몇십 장은 바닥에 떨어져 '깃털병사'가 되어 광신도들의 퇴로를 막았다.
극강의 화력과 현란한 유틸.
이러나저러나 손발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아무리 혈천교 신도들이 질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간혹 키젠 1학년 수준을 뛰어넘는 프로 네크로맨서급의 강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두 소녀의 화력에 조금도 대응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가,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습니다!"
"저것들이 진짜 학생이라고?!"
혈천교 잔당은 순식간에 제압되어갔다.
[크흐흐흐! 역시 차세대 지배자들인가.]
바위에 걸터앉은 피어가 중얼거렸다.
"저기."
로레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광선을 사방으로 쏴대면서도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당신은 시몬의 에이션트 언데드인가요?"
피어는 히죽 웃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만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역시 시몬은 배신의 군단장......."
"어머나~ 이제 알았어요?"
깃털들로 혈천교 잔당들을 농락하던 세르네가 가슴을 펴고 말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어. 엄마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만."
"그거 안됐네요~ 나는 시몬이 '직접' 말해줬는데."
로레인이 퉁명스러운 눈으로 세르네를 쏘아보았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런 소릴 할 때가 아냐."
시몬이 실라지를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 건지, 던전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피의 고리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곧 어른들이 던전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 전에 수습해야 한다.
"세르네. 저 사람들의 기억을 지울 수 있지?"
"어렵진 않죠~ 매번 해온 일이니까."
세르네가 능글맞은 눈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당신, 내가 인간의 기억을 지울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맨날 추궁하지 않았어요?"
"......."
예상 못 한 일격에 로레인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고, 세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신 그런 짓 하지 말라 해놓곤, 한 입으로 두말하려고요? 네프티스의 후계자가?"
"......그럼 그쪽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시몬이 붙잡혀 배신의 군단장으로 처형되는 건 그쪽도 바라는 그림이 아니잖아?"
처형이라는 단어에 이번엔 세르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슬쩍 음흉한 미소를 꾸며내며 말했다.
"어머나~ 지금 시몬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가요? 나중에 시몬이 알게 되면 슬퍼할 것 같아~"
"사람 속 긁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시몬을 구할 힘이 있는데도 이대로 방치하는 게 훨씬 더 큰 죄악이야."
"하여간 키젠은 늘 이런 식이라니까요. 언제나 지들이 갑인 줄 알지?"
"나는......!"
[크흐흐흐!]
갑자기 들리는 웃음소리에 두 소녀가 말을 멈췄다. 바위에 걸터앉은 피어가 히죽 웃고 있었다.
[차세대의 지배자들. 물리적인 실력은 대단하나 피차 정신적인 성장은 더 해야겠군. 지금은 감정적인 신경전을 벌일 때가 아니다.]
피어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무너지는 하늘을 가리켰다.
[정 아니면 키젠과 상아탑. 둘 다 영원히 연을 끊고 내가 소년을 데리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다만.]
피차 쌓인 감정이 많았기에 시몬 앞에서 폭발했을 뿐, 사실 로레인이나 세르네나 지금은 힘을 합칠 때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서두르자."
*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한없이 무의식 속을 유영하던 시몬은 눈을 떴다.
하얀 천장, 창밖에서 스며드는 햇살, 재잘대는 새소리.
평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몇 번 끔뻑이던 그는 간신히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키젠 병동이구나.'
환자복 차림이었고 몸 곳곳에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후각이 돌아왔는지 뒤늦게 약물 냄새도 났다.
창밖에는 익숙한 키젠 캠퍼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내 조금씩 머리가 돌아가며, 비로소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둘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몬은 가장 끝자락의 기억을 되살렸다.
-뒤는 우리한테 맡기고, 푹 쉬어.
마지막으로 들렸던 로레인의 목소리.
다행이다.
눈을 뜨면 키젠 본부의 지하감옥이 아닐까도 생각했는데, 이렇게 멀쩡히 캠퍼스에 돌아와서 병실에 누워 있는 걸 보면 그 두 사람이 뒤처리를 잘해준 모양이었다.
"윽!"
잠깐 기억을 더듬었을 뿐인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시몬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내자,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시, 시몬 학생! 일어나셨군요!"
병동 관리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가 복도 쪽으로 뭐라뭐라 말하며 손을 휘젓자 분주한 발소리가 여럿 들린다.
"시몬 학생!"
뒤이어 병동 의사도 들어왔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뭐라고 중얼거리며 시몬의 이마를 짚어보거나 마법진의 수치를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 다른 애들은요?"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몬 학생의 활약 덕분이죠."
그렇게 말한 병동 의사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제까지 거기 있을 겁니까?"
하얀 시트가 뭉실뭉실 떠오르더니 뿅 하고 올라왔다. 그것이 마구마구 이불보를 걷더니 이내 작고 귀여운 은빛 머리의 소녀가 '화아!' 하고 튀어나왔다.
"안뇽! 오랜만이야~"
"네프티스 님!"
시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타다다닷!
그때 복도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병실문이 열렸다.
키젠의 정예 네크로맨서, 까마귀 두 명이 네프티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프티스 님! 전황에 대해 보고드립니다."
의사는 굳이 학생이 쉬고 있는 병실에서 들어오냐고 화를 냈지만, 네프티스는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주고는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까마귀들은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병실을 나섰다.
"무, 무슨 일 있나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시몬이 물었다.
"응!"
네프티스가 빵긋 웃었다.
"사실 지금 혈천교랑 전쟁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