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99화
[어때요 군단장님? 감쪽같죠?]
에르제베트가 짠! 하고 본인의 작품을 공개했다.
지금 병실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건, 시몬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었다. 그것도 거미줄로 만들었다.
"......으음."
시몬이 찝찝한 표정으로 눈썹 사이를 어루만졌다.
"뭔가 불쾌할 정도로 리얼한데."
[그렇사와요! 소녀가 매일 껴안고 부비부비하니 리얼리티는 보증해요.]
"......제발, 에르제."
그렇게 늦은 밤, 병실에 가짜를 두고 시몬과 에르제베트는 피어의 유적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유적 입구에 마중 나와 있던 아케뮤스가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덩치가 원체 커서 무슨 곰이 몸을 구부리는 줄 알았다.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네, 이제 괜찮아요. 아케뮤스도 수고했......."
잠깐.
이 타이밍에 뭔가 아케뮤스에게 점수를 딸 수 있지 않을까?
전투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런 말은 너무 뻔하니까.
"아케뮤스는 이번 전쟁에서 '주교'를 죽이지 않고 포획한 유일한 에이션트 언데드셨죠."
[!]
아케뮤스의 눈이 커졌다. 시몬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와 군단의 사정을 생각하고 애써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아케뮤스의 어깨가 감격으로 떨렸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도련님!]
이거 먹히는 것 같다. 시몬은 불안한 표정으로 엄지를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저는 아케뮤스의 충심에 보답할 만한 게 아무것도......."
콸콸!
아케뮤스의 눈물이 쏟아지는 소리였다. 그가 통곡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충심은 대가를 바라고 하지 않는 것임즉! 그저 주군으로서 군림하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몸과 영혼을 다해 싸울 것입니다! 도련님!!]
[비키시와요.]
에르제베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케뮤스를 거미줄로 붙잡아 날려 버렸다.
[크흡! 도련니이이임!!]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를 뒤로하며, 시몬은 유적 내부로 들어왔다.
[어, 시몬이다!]
프린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피어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시몬! 시몬! 저번에 그 지팡이 여자 대단했어!]
프린스가 주먹을 휙휙 내지르며 말했다.
[공간을 넘어 우리를 부를 줄은 몰랐다니까! 멍 때리고 있다가 갑자기 불려가서 깜짝 놀랐어!]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래도 이번 전투의 최고 공로자는 군단화된 헤르세바였다. 본인의 소유물인 미라들을 넘어서, 세 명의 에이션트 언데드까지 불러들여 전세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바로 그 문제 때문인데."
시몬이 아공간에서 헤르세바를 꺼내 제단에 내려놓았다.
"헤르세바의 의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이번 전투에선 샤텔의 결투평가에서 '모래의 세계'를 썼을 때 이상으로 한계를 넘어섰었다.
피어가 다가와 말했다.
[먼저 본체를 살펴봐야겠다. 소년!]
"네."
시몬이 팔찌 아공간에서 헤르세바의 본체를 꺼내 제단에 놓았다.
라이프베슬은 제대로 두근두근 뛰고 있었으나, 칠흑의 잔량은 바닥을 보인 채 회복되지 않았고 그녀의 정신도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은 회복부터.'
헤르세바의 상태를 살펴본 시몬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도와주세요."
시몬을 중심으로, 피어, 에르제베트, 프린스, 아케뮤스가 둥글게 서서 리치의 라이프베슬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사념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다섯 손바닥에서 검푸른 칠흑이 흘러나가 헤르세바의 라이프베슬을 채워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바닥만 보이던 라이프베슬의 칠흑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 칠흑을 담는 용량이 생각보다 크네.]
프린스가 중얼거렸다.
이번에 헤르세바가 군단형 언데드로 각성하면서 생긴 변화인 것 같았다. 네 명의 에이션트 언데드들이 칠흑을 공급하는 데도 빠르게 차지 않았다.
[소년!]
상황을 지켜보던 피어가 시몬을 불렀다.
[칠흑 공급은 우리에게 맡기고, 소년은 마법진의 회로를 손보는 게 좋겠군. 끊어지거나 헐거워진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게 좋겠네요."
바로 역할 분담에 들어갔다.
시몬은 라이프베슬의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룬어나 핵심 수식은 문제없었지만 연륜 있는 피어의 조언대로 헐거워진 회로가 몇 곳 보인다.
'소환형에서 군단형 언데드로 바뀌면서 회로가 변한 거야.'
헐거워진 부분은 바로잡고, 엇갈린 회로는 제대로 맞춰서 교차해 주었다. 고치면 고칠수록 점점 라이프베슬에 빛이 일어났다.
이내 세 개의 띠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칠흑을 펌프처럼 빨아들여 전신으로 퍼뜨렸고, 두개골의 소환 마법진에도 칠흑이 공급됐다.
이내 제단에 올려놓았던 지팡이가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앞부분에 달려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어어? 어?]
드디어 헤르세바가 눈을 떴다.
[나 아직 멀쩡하네? 꼼짝없이 소멸한 줄 알았는데!]
"말했잖아."
시몬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면서도 웃어 보였다.
"절대 널 잃지 않을 거라고."
나름 감동할 만한 포인트라고 생각했지만.
[죽어어!]
헤르세바가 공중에 콩콩콩 시몬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시몬이 머리를 감싸며 물러섰다.
"가, 갑자기 왜 그래?"
[날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겠다?! 누가 네크로맨서 아니랄까 봐! 이길 때까지 죽도록 써먹으면 다냐?]
피어와 프린스는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에르제베트는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리치 따위가 날 재치고 스킨쉽을!]
[구타도 스킨쉽으로 치는 거야?]
프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렇사와요 프린스. 저런 플레이야말로 어쩌면 궁극의.......]
[네 이상한 취향은 알고 싶지 않다. 에르제베트.]
아케뮤스가 딱 잘라 말했다.
실컷 시몬을 때린 헤르세바가 힘이 다 떨어졌는지 헥헥 댔다. 시몬도 털썩 제단에 주저앉아 손뼉을 쳤다.
"그럼 잠깐만 주목해 주세요. 군단장으로서 모두에게 발표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
모두의 시선이 시몬에게로 향했다.
"에르제베트의 말대로, 헤르세바는 아직 어리고 에이션트 언데드도 아니지만 그녀가 가진 힘과 역량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봐요."
아케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흩어져 있는 모두를 던전 안으로 불러들인 능력은 가히 대단했습니다. 도련님.]
[미라 부대를 보유하기도 했지.]
"네, 그러니-"
시몬이 손바닥을 세워 헤르세바 쪽을 가리켰다.
"이제 군단화된 헤르세바를 여러분과 동등한, 미라 부대의 '대장'으로서 대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피어가 큰 소리로 웃었다.
[크하하! 그럴 가치는 충분하지!!]
에르제베트가 이마를 짚었다.
[으으, 싸가지가 없지만 소녀도 능력은 인정하와요.]
뒤이어 프린스와 아케뮤스도 동의했다. 이내 모든 에이션트 언데드가 군단의 격식에 맞는 자세를 취했다.
[군단장의 허가 아래 나 관리자 피어의 이름으로, 망자의 격을 올리겠다!]
우우웅!
헤르세바 본체의 몸이 광채에 휩싸였다.
지금 피어가 하는 건 군단형 언데드의 제약을 해제하고, 명령이 없이도 '자율 행동'이 가능한 대장으로서의 권한을 주는 거였다.
[.......]
헤르세바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지팡이에 달린 그녀의 눈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헤르세바."
시몬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감동할 포인트라고 생각했지만.
[감투 하나 던져주면 안 맞을 줄 알았냐!]
헤르세바가 날아와 시몬의 정수리를 연타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웃음소리가 흘렸다.
이렇게 군단에는 새롭고 막강한 주축이 생겼다.
아버지 리처드의 유산이 아닌, 시몬 자신의 힘으로 만든 존재가 새로운 '대장'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병동으로 돌아온 시몬은 오늘도 칠흑과 신성을 섞어 공허를 만들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퍼어어엉!
물론 이번에도 실패. 칠흑과 신성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다. 흩어지거나, 신성이 칠흑을 정화해 버리거나, 과하게 부딪히면 폭발하기 일쑤였다.
'어렵네.'
시몬이 털썩 침대에 누웠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티끌만 한 가능성도 안 보여.'
시몬을 가장 초조하게 만드는 건, 보이드를 만들어낸 몸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땐 그냥 쓱 하고 합치면 됐었는데.'
물론 그때는 '그 존재'를 만난 직후였으니 가능했다. 지식이나 이론의 이해 없이, 몸의 감각만으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지도 몰랐다.
"그럼 발상의 전환으로!"
시몬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오른손을 펼쳤다.
손끝에 작은 마법진을 그린 다음, 피와 칠흑을 뽑아내 6:4의 비율로 뒤섞어 마법진을 통과시키자 영롱한 에메랄드빛 연기가 흘러나왔다.
<클라우드>
사실 이번 사건으로 워낙 크게 대여서 그럴까, 실라지가 가르쳐 준 클라우드를 쓰는 게 조금은 찜찜했다.
하지만 결국 이 기술도 내가 갈고닦은 힘이고, 내 자산이다. 굳이 봉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이제 이 클라우드에......."
시몬이 오른손에 클라우드를 유지한 채 왼 손바닥을 펼쳤다.
"신성을 일으켜서 부딪치면!"
꿀렁!
이번에는 폭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클라우드와 신성이 만나자 묘한 모습이 되었다.
마치 꼬리잡기 놀이처럼 물고 물리듯, 신성과 클라우드가 서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시몬이 급히 구석에 놓아둔 배지 모양의 피어의 분신을 쿡쿡 찔렀다.
"피어! 피어! 이것 좀 봐주세요!"
[음? 뭐냐, 소년.]
시몬은 피어의 분신을 들어 잘 보이도록 위치를 조절했다. 피어의 분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크흐흐! 뭐냐? 이 괴이한 건!]
"클라우드랑 신성을 섞었더니 이렇게 됐어요!"
빙글빙글 회전하던 힘이 이내 펑!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다행히 파라한의 소음 차단 마법진으로 소리는 새어 나가지 않았다.
"한 번 더......!"
다시 클라우드와 신성을 일으켜 부딪쳤다. 이번에도 빙글빙글 팽이처럼 회전하는 힘이 만들어졌다.
[음, 그렇군!]
"뭔가 알아냈어요?"
[눈을 크게 뜨고 잘 봐라 소년.]
피어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클라우드가 분해되고 있다. 신성이 클라우드를 자극하면, 클라우드 내의 칠흑은 신성을 피해 구석으로 쏠리지. 봐라, 클라우드의 끝부분이 검게 물들어 있다!]
"아......!"
회전하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피어의 말이 정확했다. 클라우드의 끝부분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신성과 클라우드의 조합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왼쪽에는 신성, 중간에는 시몬의 'SM-1'혈액, 그리고 오른쪽에는 칠흑이 남게 된다.
신성이 상극인 칠흑을 정화하려 덤벼들지만, 중간에 가로막고 있는 'SM-1'에 의해 가로막혀 빙빙 회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피의 막이 얕아져서 칠흑과 신성이 충돌하는 순간.
쾅!
지금처럼 폭발하는 것이다.
"이거 재밌는데요!"
시몬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대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크흐흐! 글쎄다. 실용적인 쓰임새는 잘 모르겠군.]
"이 기술을 쓰면 적에게 칠흑과 신성의 피해를 동시에 입힐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미 새로운 발견에 흥분한 시몬은 피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클라우드와 신성을 뭉쳐서 회전하는 힘을 만든 다음, 공중에 살짝 띄워보았다.
"!!"
그런데 갑자기 통제를 벗어났다. 팽이처럼 회전하던 두 힘이 병실을 예측 불가능한 궤적으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더니, 이내 창밖으로 빠져나가 근처에 있던 나무에 부딪혔다.
충격으로 SM-의 막이 흩어졌고, 신성이 칠흑에 침투하는 것으로.
꽝!
폭발이 일어났다.
나무가 크게 휘청이며 쏴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봐, 봐요 피어!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충분히 가치가......!"
"어떤 놈이야!!"
시몬이 잽싸게 몸을 샥 낮추었다. 창문 너머로 격분한 기숙사 관리원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달려오고 있었다.
시몬은 바깥을 슬쩍 내다보고는 민망한 듯 뺨을 긁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 실전에서 쓰려면 조금 개량이 필요해 보이네요......."
피어가 큰 소리로 웃었다. 멀쩡하던 놈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는 정신줄을 놓는 모습도 리처드를 똑 빼닮았다.
[조금이 아니라 많은 개량이 필요할 거다. 하지만 네가 썼던 그 '보이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네. 공허의 힘과는 확실히 멀어졌어요. 그래도."
공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한, 완전히 새로운 시몬만의 오리지널 기술.
"아직 시착 단계지만 이름을 붙여준다면......."
칠흑도 신성도 아닌 힘.
시몬은 머릿속에 칠흑과 피와 신성이 뒤섞여 어지럽게 회전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혼돈(Chaos)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