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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411화 (411/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11화

국경을 넘고 신성연방에 들어온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이스라필이 준비해 둔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연달아 이동해서,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랭거스틴을 연상케 하는 '대도시'였다.

그리고 이 도시에 와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어, 어떤가요?"

고급 양장점이었다.

피팅실의 커튼이 걷히고, 다소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온 시몬은 깔끔한 백색 정장에 홍색 넥타이를 찬 차림이었다.

이스라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어울려요! 우리 조카~"

옆의 종업원도 백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휙휙 끄덕였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시몬은 거울 앞에 서서 하얗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아직은 어색했지만, 계속 보다 보니 또 정감이 가기도 하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스라필이 조용히 덧붙였다.

"이틀이면 원래 머리색으로 돌아올 거랍니다?"

그렇게 정장을 한 벌 구매한 두 사람은 양장점을 벗어났다.

우아하게 거리를 걸어가던 이스라필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주위에 투명한 결계가 펼쳐지는 게 보인다.

"여기, 가짜 신분증과 프로필이에요. 시몬의 이름은 이제부터 숀 하더. 하펜 지방 비제르 제2성당 소속, 18세 프리스트 소년이에요."

시몬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가짜 신분증과 프로필을 건네받았다.

성녀가 브로커를 통한 위장 신분을 주선하다니! 진짜 이래도 되나 싶었다.

"저,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프리스트들의 신성은, 데바 여신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으로부터 발현한다.

그런데 스스로 여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되면, 강박에 얽매이다가 신성을 예전처럼 쓸 수 없게 되는 경우가 간혹 생기는데 이를 '신성 슬럼프'라고 불렀다.

시몬은 바로 그 점을 걱정했지만, 이스라필은 나긋하게 웃었다.

"모든 것은 더 큰 악과 위협을 막기 위한 일! 여신께서도 기꺼이 용서해 주실 거예요."

일단 이 사람은 절대 신성 슬럼프는 안 걸릴 것 같다.

"그런데요. 이스라필 님."

시몬은 완벽하게 세팅된 자신의 차림을 한번 훑어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제 차림이랑, 이번 임무랑 뭔가 관련이 있는 건가요?"

이스라필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가이드부터 데려와야 해요. 그걸 위한 복장이랍니다."

"아. 이제 만나러 가는 건가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네! 같이 구해주러 가죠. 그 아이를."

* * *

성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신성연방에서 태어난 모든 소녀들의 꿈.

반짝반짝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 만민이 우러러보며 찬양하고, 인간으로 태어나 여신과 가장 가까운 반신의 격에 오른 자.

그리고 평소 존경하는 '안나 선생님' 또한 성녀였고, 에프넬에 다니면서는 '안나 크로스'의 재림이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부담감은 더했다.

당연히 안나 선생님의 뒤를 이어 성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언젠가, 오랜 꿈이자 목표였던 성녀가 되는 순간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행복한 걸까.'

레테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속은 웃고 있지 않았다.

대성당 창립 대축일. 수많은 사람들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기! 저기 계셔! 별의 성녀님이야."

"......어쩜 이렇게 고귀하실 수가."

레테는 가지런한 몸가짐으로 선 채, 잘 꾸며진 미소를 만민 앞에서 보였다.

이곳에 '레테 샤르데나'는 없다.

그저 '성녀가 왔다'는 사실만 있을 뿐.

"성녀님."

호위를 맡은 팔라딘이 다가와 레테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시겠습니다."

레테가 얼굴에 붙어버린 웃음으로 대답했다.

"예."

그녀가 하얀 손을 내밀자 팔라딘은 손등에 키스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성녀를 섬기고 호위한다는 영광에, 젊은 팔라딘의 몸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고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다리 아파.'

물론 레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언제쯤 이 지겨운 시간이 끝날지, 그것만이 관심사였다.

* * *

성녀는 보기보다 더럽게 일이 많은 직업이었다.

연방의 굵직굵직한 행사들은 전부 성녀가 관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녀의 참가가 곧 여신의 축복이라고 여겨지는 이 문화권에서, 성녀의 일정에 따라 중대 행사나 기념일이 밀리는 경우가 파다했다.

의무와 본분.

관습과 책임.

가지게 되는 힘과 권력 이상으로, 옭아매는 것들도 많았다.

에프넬 학생 때의 반항기는 통용되지 않았다. 대주교급의 거물들이나 심지어는 다른 성녀들이나 교황까지 직접 와서 교육과 예법으로 레테를 옭아대기 시작했다.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부디 성녀로서의 체통을.

레테가 잘못하면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졌다. 정신적인 압박까지 느끼며, 하루하루 힘겨운 일과를 수행했다.

미소, 목소리, 안면 근육의 움직임, 예절, 말투, 심지어는 내 생각과 가치관까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성녀처럼' 교정 당했다.

-성녀님은 데바 여신님을 대리하는 존재입니다. 만민을 굽어살피시고, 가엽게 여기시고, 결코 미소를 잃지 마시고.......

시간이 갈수록 욕심 많은 에프넬의 늙은이들과 머리 굳은 어른들의 손에, 레테 샤르데나는 사라져가고 잘 가공되고 깎아 만든 듯한 인형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 이제 알았다.

이들은 내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중요한 행사에 웃고 있어줄 인형이 필요한 거였다.

그러다 가끔 전쟁이 나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우다 죽어줄 전투력은 덤이다.

이런 와중에 가장 힘들었던 건, 그녀가 믿고 있던 이스라필도 더 이상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테. 당신이 나와 같은 동등한 성녀가 된 이상, 더 이상의 아이 같은 행동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사수를 자청한 이스라필은 눈물을 쏙 뺄 정도로 혹독하게 예법을 가르쳤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10대 소녀가 성녀로 각성할 시 에프넬 3년 과정이 필수라는 규정이었다. 룸메이트인 리리넷이나 다른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게 됐다.

물론 성녀 수업이 더해지고, 에프넬 수업도 최고 성적으로 이수해야 했기에 부담은 몇 배나 더 늘었다.

그러다 방학이 되고 학교에서 벗어나는 순간, 지옥이 시작됐다.

대체 하루에 몇 군데나 도는지 모를 정도로 살인적인 스케쥴이었다.

"여신과 가장 가까운 딸을 뵙사옵니다."

어디 어디 주교라던가.

이름이 기억 안 난다. 대충하자.

그저 인형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등을 내어준다.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며 여신의 은혜에 감복하며 눈물짓는다.

"허허! 여신과 가장 가까운 딸을 뵙사옵니다."

노망난 늙은이.

돈이 썩어나는 어느 지방의 주교라는 것 같은데, 최근에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써서 그녀의 행사마다 따라오고 있었다.

"아아, 고귀하신 아름다움에 이 늙은이는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입으론 고귀하신 어쩌고 하면서 눈길로는 가슴이나 다리를 훑고 있다.

모를 줄 아나?

더럽고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

'아 X발 진짜.'

가슴 깊은 곳에서 빡침이 솟구쳐 오른다.

'강냉이 부수고, 싸커킥으로 턱 조진 다음에 정신 못 차리는 새끼 무릎으로 인중을 삼연타.'

라고 상상만 하며 인형처럼 미소 짓는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인형이다.

인형이다 인형.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더 편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다.

"여신과 가장 가까운 딸-"

'X까.'

"여신과 가장-"

'뒈질라고.'

"찬란한 미소에 몸 둘 바를-"

'그럼 지옥에 몸 둘 바를 마련하면 되겠네.'

인내심은 점점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몸은 뼛속까지 박힌 예법을 알아서 실행하고 있다.

"감사해요.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이제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

무아지경이다.

"예. 여신께서도 굽어보실 것입니다."

한 발짝 물러나서 보면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이스라필 님 성대모사를 하면서 여신을 파는 모습, 그리고 은혜로움과 자비에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신성연방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모든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고, 레테는 녹초가 되었다. 호위인 팔라딘이 말했다.

"별의 성녀님.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또?

"지금 바로 가는 건가요?"

나름 날카롭게 물었지만, 이 광신도 팔라딘은 전혀 이쪽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성녀에게 있어 최대의 기쁨은 여신의 종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미친놈이었으니까.

짜증이 불쑥 솟구친 레테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 안 도망가니까 여기 있어요."

"어디에 가시든 성녀님을 호위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

순간.

레테의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부아아아아아앙!

그녀의 다리가 맹렬한 돌풍을 일으키며 다가왔고, 이내 구두 굽이 팔라딘의 얼굴 바로 앞에서 척! 멈췄다.

팔라딘의 뺨이 바람에 휘리리릭 물결치며 이빨과 잇몸까지 보였다.

"......야."

"예, 예?"

"말귀 못 알아 처먹냐?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고 X발아."

팔라딘의 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졌다.

너무 뻔해서 짜증 나지만, '우리 성스러운 성녀님이 저런 상스러운 말을 쓰다니!' 같은 표정이다.

"저, 저는 그저 성녀님의 호위를......!"

"그래서 화장실까지 따라올 거냐고 씹새야!"

빡!

결국 그의 대가리를 한번 까버린 레테가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엎어진 팔라딘은 '우리 성스러운 성녀님이 화장실을 가다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진짜.

진심으로 경멸스럽고, 다 죽여 버리고 싶다.

또각또각.

레테가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방 뒤편으로 빠져나가니 텅 빈 복도가 나왔다.

그녀는 걸으면서 머리에 쓰고 있던 장식과 어깨에 걸친 성녀용 로브, 굽 높은 힐까지 죄다 휙휙 던져 버렸다. 겉옷 안에는 에프넬 교복이 나왔다.

아직은 에프넬 학생 신분이었으니, 공적인 자리에는 교복 위에 성녀 로브가 기본 세팅이었다.

'나중에 뭔 욕을 들어먹든, 이후 일정은 무조건 쉴 거야!'

바람이라도 쐬는 게 간절했다.

그리고.

'안나 선생님, 보고 싶어요!'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안나 선생님과 이스라필 님은 이런 시간을 버텨낸 걸까. 진심으로 다른 선배 성녀들이 존경스러웠다.

'리리넷, 네가 보고 싶어질 줄은 몰랐어.'

에프넬에서 사귄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래도 그들에게 이 모습을 들키지 않아서 정말정말 다행이었다.

학교에서 보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고상한 성녀 말투로 늙은이들에게 은총을 내리는 척하는 이 꼴을 보이면 아주 배를 잡고 비웃었을.......

-큭.

웃음소리?

인적이 거의 없던 복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테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하얀 정장에 하얀 머리의 남자가 숨죽여 웃고 있었다.

'이 새끼가. 사람보고 뭘 쪼개는...... 어?'

그녀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남자가 팔짱을 풀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눈동자와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레테의 입술이 벌어지며 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육체와 사고가 얼어붙었다.

어쩌면, 리리넷이나 다른 친구들보다 더더욱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

하지만 그가 여기 오는 건 불가능하다.

드디어 정신이 돌아버린 걸까?

미친 걸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그 모습이 더더욱 선명했다.

"오랜만이야."

귀에 익은 목소리. 낯익은 얼굴. 살짝 장난스러운 미소.

그리고 무엇보다.

"레테."

성녀가 아니라, 여신과 가장 가까운 딸이 아니라.

당당히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남자.

"......뭐야."

레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 다다다 당신이 왜 여깄슴까!! 아, 아니! 그보다...... 봐, 봤어요?"

"뭘?"

후다닥 달려온 그녀가 남자의 넥타이를 붙잡아 꽉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연회장에서 내가 하는 거 봤냐고!!"

그렇게 외치는 그녀의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넥타이를 붙잡힌 시몬이 진정하라는 듯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레테, 숨 막혀."

"잊어! 잊어버려! 머릿속에서 완전히 다 지워 버리라고 이 새꺄!!"

"그걸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해? 근데 너 진짜 성녀님 같던......."

그녀의 얼굴이 한계치에 도달해 붉게 변했다.

레테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잊어어어어어어어어!!"

탁.

그때 레테의 주먹을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시몬의 뒤에서 등장한 또 다른 의외의 인물에 레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여간, 그 주먹부터 나가는 버릇은 고치라고 했죠? 레테."

"이, 이스라필 님......?"

이스라필이 살풋 웃었다.

"따라오세요. 두 사람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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