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15화
쏴아아아아아아-!
욕실에서 시몬이 몸을 씻고 있었다. 뿌연 수증기가 차오르고, 향긋한 세정제 냄새가 났다.
레테는 뚱한 표정으로 등을 돌린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소리 너무 잘 들리는 거 아냐?'
욕실의 벽은 유리였고 시몬은 홀딱 벗었지만, 다행히 욕실 내부의 수증기로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물이 꺼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욕실 밖으로 나온 시몬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물도 잘 나오고 따뜻해. 키젠 목욕탕에 온 기분이야."
"......."
레테가 이마를 짚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고뇌하던 그녀가 결국 '으아악!'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며, 명심하십쇼! 혹시나 이상한 짓 하면 진짜!"
"......안 해."
아직도 자신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바닥인가 싶었다.
레테는 시몬을 지긋이 한번 노려보더니, 옷가지와 수건을 가지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쏴아아아아―
잠시 후 물소리가 났다.
아무 생각 없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던 시몬은 불현듯 입가가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얇디얇은 유리 하나를 두고 한 방에 있는 상황.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이쪽 보지 마! 새꺄!"
"......안 봐."
뒤이어 레테가 허리를 굽히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스르륵 하고 면이 살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물소리를 뚫고 귓가에 파고든다.
유리창에 낀 흐릿한 수증기 너머로 레테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
시몬은 한숨을 쉬며 이 건물의 설계에 대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욕실이 유리고, 욕실 문도 잠금장치 하나 없이 덜렁거리게 한 걸까.
설계자는 무슨 의도로 이 건물을 지었을까.
시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뿐이었다.
우웅!
그때 욕실 앞으로 '신성방패'가 펼쳐졌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이내 욕실 전체가 수 겹의 신성방패로 뒤덮었다.
"뭐야?"
"그쪽 양심을 믿을 바엔 내 실력을 믿겠슴다!"
그렇게까지 한 뒤에야 안심한 레테는 샤워를 시작했다.
* * *
"하아아."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가운으로 갈아입은 레테는 소파에 앉아 살짝 붉어진 뺨으로 와인잔을 굴리고 있었다.
꽤 능숙하게 와인잔을 굴리던 그녀가 잔 끝을 입으로 가져갔다. 생동감 넘치는 붉은 액체가 그녀의 입술을 지나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좋아~"
그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늘어졌다. 스르륵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어 노곤한 소리를 냈다.
"피곤했나 보네."
시몬은 옆에서 젖은 수건들을 널고 있었다.
"말도 마십쇼."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에 낀 와인잔을 빙글빙글 굴렸다.
"성녀가 되니까 뭐 그렇게 부르는 곳이 많고 배울 게 많은지. 심지어 사람의 미소도 스물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거 아심까?"
"......진짜로?"
"상황에 맞는 미소를 지어줘야 한다나 뭐라나. 막 하인이 그러는 거예요. 성녀님, 오늘은 성만찬일이니 일곱 번째 미소와 열네 번째 미소 사이의 레퍼토리만 사용하셔야 합니다."
시몬도 리처드로부터 예절을 꽤 빡세게 배웠다고 자부했으나, 저런 건 듣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다.
"난 신성연방에 대해 잘 몰라서 말하기 좀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없죠!"
레테가 극도로 흥분하며 소리쳤다.
"전부 허례허식일 뿐임다! 사실 가르치는 사람들도 몇 번 미소인지 구분 못 할걸? 툭 까놓고 말해, 그런 거 강조하는 노인네들 생각도 약간 그런 거 아님까? 우리도 젊을 땐 다~ 그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한번 당해봐라!"
"하하! 그건 너무 꼬인 생각 같은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됨다 진짜."
개운하게 샤워한 뒤 마시는 와인 한 모금.
레테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시몬도 오전의 일도 있고 하니 그녀의 말에 적극적으로 맞춰주었다.
"웃차, 그럼 노는 건 여기까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제 이마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백마법으로 술기운을 날려 보내자, 발그레하던 뺨이 원래의 빛깔로 되돌아왔다.
"시작하죠."
"뭘?"
그녀는 뒤돌아서 테이블에 올려둔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뭐긴 뭐겠슴까. 오늘 밤은 안 재울 검다."
"?!"
시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잠시 그의 시선이 레테에게 머물렀다.
아직 물기에 젖은 하얀 머리카락, 그녀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감싼 가운. 그리고.......
빠악!
날아오는 책에 얼굴을 얻어맞은 시몬이 침대에 쓰러졌다. 레테가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야, 시선 관리 안 하냐? 뒈질라고 진짜!"
시몬이 끙 소리를 내며 얼굴에 부딪혀 떨어진 걸 들어 올렸다.
"이게 뭐야?"
"......애들 가르칠 공책임다."
시몬이 촤르륵 공책을 넘겨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명심하십쇼. 우리가 에스카일 마을에 방문하는 구실은 '악'의 수사가 아니라, 애들을 가르치러 가는 검다. 선생님이란 거죠."
"뭐, 그렇지."
"그러니 지금부터 부지런히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함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능숙하고 프로페셔널하게 보여야 해요. 폐쇄적인 마을이라고 하니 외부인에 대한 경계도 심하겠죠. 수상하다 싶으면 바로 쫓겨날 거예요."
과연 맞는 말이었다.
레테가 이것저것 놀이재료들을 침대로 휙휙 던졌다.
"이스라필 님이 주신 가방인데, 역시 준비를 잘해놓으셨네요."
그녀가 색칠놀이 책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시몬도 이제야 관심이 동하는지 놀이재료를 살펴보았다.
"음, 커리큘럼을 세밀하게 짜둬야겠네. 아이들에게 뭘 가르칠지, 어떤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할지."
"바로 그검다! 혹시 애들 가르쳐 본 경험 있어요? 아님 뭐,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누굴 가르쳐 본 경험은?"
시몬이 고개를 좌우로 젓자, 기대 어린 눈을 하고 있던 레테가 입술을 삐죽였다.
"도움이 안 돼. 도움이."
"그거 미안하네. 그러는 넌 애들 가르쳐 본 경험이 있어?"
"많죠."
탁.
그녀가 대륙어 교재를 테이블에 올려두며 말을 이었다.
"나는 어릴 때 고아들을 모아 키우는 성당에서 지냈으니까요. 인력 부족이라서 나이 조금만 먹은 뒤엔 애들 가르치고 통제하는 일도 했고 뭐."
"......아."
"잔말 말고 준비나 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빠르게 수업 계획을 짰다. 레테는 색칠놀이와 대륙어 글자 수업을 준비했다.
"당신은 뭘 가르칠지 정했슴까?"
"신수학은 어때?"
레테가 뭔 헛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직 신성도 못 쓰는 애들을 상대로 뭔 놈의 신수학?"
"신성을 일으키는 신수들이랑 뛰어놀게 하면서 신성 적합도를 높이는 훈련이지."
"......오?"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디어였는지, 레테의 얼굴에 화색이 들었다.
"그럼 신수는 어떻게 할 거예요? 란을 애들이랑 놀랍시고 꺼내기엔 좀 위험한데."
"나도 신수는 있어. 세 마리 정도......."
시몬이 수업 내용을 설명하려는 바로 그때.
꽈아아아앙!
창밖에서 폭음이 들렸다.
"?!"
시몬과 레테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펑! 펑! 하고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시몬이 제일 먼저 창밖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대혼란.
도시의 사람들이 아우성을 내지르며 도망가고 있었다.
* * *
"도망쳐! 계속 도망치세요!"
"회관 방향으로 달려!"
그 조용하던 도시가 난리가 났다. 경비병들도 나와서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임까!"
숙소 밖으로 뛰어나온 레테가 소리쳤다.
"산맥 몬스터들의 공격입니다! 몇몇은 벌써 방호선을 넘어 시가지로 들어왔습니다!"
경비병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산에 잘 살던 몬스터들이 왜 갑자기 마을을 공격하는 거죠?"
레테를 곁눈질로 살피던 경비병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아, 아무래도 혹한을 피해 온 것 같습니다! 산맥에 살던 몬스터들도 견디지 못할 만큼 혹한이 강해져서......."
"됐슴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레테가 경비의 말을 끊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시몬은 눈치껏 이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칼리온!"
신성 아공간에서 곰 형태의 신수인 아칼리온이 튀어나왔다.
시몬은 바로 신성을 불어넣어 덩치를 부풀린 다음, 그 위에 훌쩍 올라탔다.
"레테!"
레테는 잔말 없이 시몬의 손을 붙잡고 뒷자리에 올라탔다.
"꽉 잡아. 출발해 아칼리온!"
-우어어엉!
아칼리온이 육중한 발소리를 일으키며 마을 골목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좌우로 길을 비켜주었다.
"아! 이 신수가 그거네요."
시몬의 허리를 안고 있던 레테가 아칼리온을 훑어보며 말했다.
"우리 쪽 에프넬 학생이 빼앗겼다는 그 신수."
시몬이 뜨끔하며 레테를 돌아보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야?"
"그냥 건너 건너 아는 사이요."
레테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걔도 쪽팔린 걸 아니까 입 꾹 다물고 있어요. 세상에 신수가 자기를 버리고 네크로맨서를 선택하다니! 에프넬 상부에 알려졌으면 바로 쫓겨났을 검다."
"......흠흠, 혹시 만나면 미안했다고 전해줘."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레테가 인상을 구겼다.
"미안할 거 없슴다. 신수의 선택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까. 애초에 조급증 걸려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신수를 다루려 하는 게 더 웃긴 거예요."
그사이 아칼리온은 현장에 도착했다.
마을 자경단들이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화이트 고블린. 눈처럼 하얀 털에 갈색 눈을 가진 고블린의 일종이었다.
"뚜, 뚫린다!"
"몸으로라도 틀어막아!"
무너진 울타리 한 귀퉁이를 자경단원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고블린들의 공세가 너무 강했다.
"거기 비켜요!"
시몬이 소리쳤다.
"누, 누구? 허억!"
자경단원들이 기겁하며 비켜나고, 아칼리온이 커다란 덩치로 돌격해 몬스터들을 들이받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아칼리온이 콧김을 뿜으며 포효했다.
"고, 곰?"
"신수다! 프리스트님이 오셨다!"
자경단원들이 환호하건 말건, 레테는 시몬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아칼리온에서 내렸다.
"공격은 맡기겠슴다."
"맡겨줘."
레테는 바로 울타리로 달려갔고, 시몬은 아칼리온을 이끌고 화이트 고블린들에게 뛰어들었다.
스릉!
시몬이 아공간에서 꺼낸 장검에 신성을 불어넣은 다음 휘둘러댔다. 하얀 검이 궤도를 그을 때마다 몬스터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신성만 써야 해서 아쉽긴 하지만!'
신성연방에서 칠흑은 봉인이고, 혼돈은 준비시간이 오래 걸린다.
검면에 휘갈기듯 마법진을 그려 넣은 시몬이 양손으로 손잡이를 붙잡고는 강하게 한번 휘둘렀다.
부아아아앙!
휘두른 방향으로 부채꼴의 신성 칼날이 날아가 고블린을 동시에 다섯이나 베어냈다. 곳곳에서 자경단원들이 환호했다.
한편 울타리 쪽으로 달려간 레테는 제일 먼저 무너져 가는 울타리를 손보았다.
<홀리 인챈트>
파아아아앗!
도시의 모든 울타리들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케게게!
울타리를 박살 내려던 몬스터들의 공세가 단번에 막혔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울타리를 넘으려 했지만, 레테는 택도 없다는 듯 팔을 치켜세웠다.
<그레이트 월>
쿠르르르릉!
울타리를 중심으로 신성의 장벽이 높게 올라왔다. 울타리를 지키던 자경단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순식간에 보잘것없던 울타리가 웅장한 성벽이 되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 * *
시몬과 레테의 활약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특히 레테의 보조능력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매스 힐>
곳곳에서 고통을 호소하던 사람들의 몸 곳곳에 하얀빛이 일렁였다. 상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물었다.
"사, 상처가 회복됐다!"
"가자!"
광범위 회복에 광범위 축복까지, 레테는 본래라면 큰 전력이 되지 않을 자경단원들을 치료하고 강화해서 다시 전장에 돌아가도록 유도했다.
자경단원들도 강화된 완력과 속도에 신이 났다. 일검 일검에 몬스터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밀어붙여!"
전세가 바뀌었다. 레테가 달려가고 있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시몬이 아칼리온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잡아!"
레테가 시몬의 손을 착 붙잡았다.
그가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고, 레테도 몸을 돌려 뒷자리에 사뿐히 탑승했다.
"이쪽 구간은 다 막았슴다. 계속 울타리를 타고 이동하면서 들어오는 몬스터들부터 막죠!"
"알았어."
시몬과 레테는 정신없이 전장을 활보했다. 도시가 큰 만큼 방어해야 할 구역도 많았다.
그러나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처음 왔던 구역보다 몬스터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방어선은 진즉에 무너져 내렸고, 몬스터들은 울타리를 넘어섰다.
살아남은 자경단들이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전멸 위기다.
"하나하나 잡으려면 끝도 없겠슴다. 몬스터들을 한 번에 쳐야겠어요."
그녀가 팔을 움직여 신성 아공간을 열었다.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백룡 란을 꺼내는 건가?'
그동안 얼마나 컸을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