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23화
"구질구질 설명이 길어질 필요는 없겠죠. 가장 핵심부터 짚고 넘어가겠슴다."
레테는 그렇게 말하면서 공책의 제일 뒷장을 펼쳤다.
"핵심이라면?"
"혹한의 정체."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낀 깃펜을 까닥거렸다.
"지금 이 지방을 뒤덮고 있는 혹한은 설녀의 분노도, 일시적인 기후변화도 아님다."
"그럼 뭐라고 생각해?"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던전의 이상현상."
시몬도 이미 아는 개념이었다.
대륙에 던전이 발생하는 순간, 그 주위는 자연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재해가 일어난다.
그것을 던전의 이상현상이라고 대륙에서는 정의하고 있다.
"혹시 던전에 가본 적 있슴까?"
"응. 바로 최근에."
시몬도 직접 던전의 이상현상을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1학년 마지막 시험이었던 '진급평가' 때 배를 타고 갔었던 그 화산섬.
원래 그곳은 토착 주민들이 모여 살던 평화로운 섬이라고 했다. 그런데 화산이 일어날 수가 없는 지질학적 구조임에도, 대규모 화산이 폭발했다.
그리고 마그마의 한복판에 드러난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 아직도 1학년 전교생이 마그마에 다이브했던 기억이 또렷했다.
"그렇담 이야기가 빨라지겠네요."
레테가 깃펜을 붙잡고 산 정상에 있는 동굴을 공책에 슥슥 그려 나갔다.
"며칠 전에 제가 백마법으로 산을 환하게 밝혔을 때, 당신이 봤다는 동굴은 대충 이런 느낌이죠?"
"......너 진짜 못 하는 게 없구나."
레테는 스케치도 수준급이었다. 그녀가 깃펜 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저는 바로 이 동굴이, 던전의 입구라고 생각함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내 생각도 그래. 이 예측이 맞다면, 던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지금의 이상현상도 끝나겠지?"
"그렇겠죠."
레테는 눈을 감고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차를 한 모금 호로록 마셨다. 따뜻한 곡식 냄새가 났다.
"이 던전은 꽤 긴 시간 클리어되지 않고 존재했을 검다. 산맥을 넘어 쿨라까지 이상현상이 미칠 정도니까. 적어도 수십 년은 됐겠죠."
"그럼 설녀 전설과 미제나시 사람들은?"
"아까 제가 동화책 이야기해 드렸죠? 당신은 이 미제나시 사람들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심까?"
시몬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복수."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자신들을 차디찬 산맥으로 쫓아낸 쿨라 마을에 대한 복수."
레테는 대답 대신 시크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두 사람은 짝! 소리가 나게 하이파이브했다.
"정답임다. 원래 쿨라는 미제나시 쪽 사람들이 살았던 곳일 검다. 하지만 쿨라 사람들에게 속아서 이곳 설산으로 쫓겨나게 됐고, 그들은 쿨라에 복수심을 품고 있죠."
그녀가 깃펜을 들어 아까 그렸던 동굴에 북북 원을 그렸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그들은 어느 날, 설산에서 우연히 이 던전을 발견하게 됨다. 그리고 던전이 일으키는 이상현상을 이용하기로 하죠. 설녀 전설? 설녀의 분노? 그냥 싹 다 미제나시가 꾸며낸 이야기예요. 던전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기만술이죠."
신성연방에서도 던전이 발견되면 성기사와 프리스트, 트레저헌터 등을 모아 공략대를 파견한다.
그러니 미제나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던전을 숨기려 했을 것이다. 던전이 파괴되면 쿨라에 대한 복수도 불가능해지니까.
"여기 이거."
레테가 아공간의 가방에서 찢어진 종잇조각들을 떨어뜨렸다.
"우리가 어저께 설산을 수색했을 때, 바위에 붙어 있던 검다."
"이게 뭔데?"
"부적. 순수 원소 마법을 이용한 결계임다. 환상을 보게 하거나, 길을 잃게 만드는 효과죠."
시몬은 가만히 부적의 잔해를 훑어보았다.
"미제나시 사람들 짓이네. 그 누구도 던전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마법을 써서 막고 있는 거야."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근데 전 아직 그 '제물'이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슴다."
"그것도 미제나시 측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설녀의 존재를 증명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
시몬은 최악의 경우 인신 공양. 사람을 설녀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미제나시의 통제를 벗어나거나, 비밀을 목격한 사람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으리라. 앞서 왔던 선생님들도 제물로 희생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심하자. 우리도 얼마든지 타깃이 될 수도 있어."
"네에."
레테가 하품을 크게 한번 했다.
"그럼 잠시 눈 좀 붙였다가 오늘도 새벽에 출발하겠슴다. 쿨라의 상황도 걱정되고, 최대한 빨리 던전을 찾아내 결판내고 싶어요."
"오케이."
안방으로 들어가려던 레테가 휙 시몬을 돌아보았다.
"아직 표정이 개운하지 않은데, 뭐 걱정되는 거 있슴까?"
"설녀 전설이 미제나시가 꾸며낸 거라면......."
시몬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내가 계속 봐왔던 그 회색 머리의 여자는 뭐지?"
"아하."
레테가 빙긋 웃었다.
"당신 뒤에 있는 그 여자요?"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시몬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휘이이잉―!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되돌리자 레테가 배를 잡고 '아하하!' 웃고 있었다. 시몬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시뻘게졌다.
"레테!!"
"흥이네요. 대성당에서 성녀 운운하면서 놀린 복수임다."
그녀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안방으로 도망쳤다. 시몬이 한숨을 쉬었다.
"뻔하지 않슴까."
그때 방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설녀 흉내를 내서 우리를 겁주고, 경고하고 있는지는."
* * *
모두가 잠든 새벽.
시몬과 레테는 겉옷을 든든히 챙겨입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혹시나 누가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은밀하게 어둠 속을 달렸다.
"오늘따라 마을이 너무 조용한데."
시몬이 말했다.
"뭐어, 다들 자고 있으니 그렇겠죠."
레테가 말했다.
두 사람은 최단거리로 들판을 가로질러 마을의 출입구에 도착했다.
결계는 투명했지만, 밖으로 나가는 출구 부분만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자."
시몬은 성큼성큼 앞장서서 결계를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안 돼, 레테! 지금 들어오면......!'
시몬이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레테도 그의 옆으로 도착한 뒤였다. 그녀의 동공도 흔들렸다.
"......."
"......."
에스카일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털옷을 입은 채 밖에 나와 무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말했을 터."
타악. 타악.
그리고 사람들의 무리에서 지팡이를 짚고 나온 것은 이 마을의 지도자.
"일이 끝나기 전엔 절대 마을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네니아 미제나시였다.
그녀는 시몬과 레테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두 선생님은 마을의 룰을 어겼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 마을에 온 겝니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레테가 발끈하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시몬이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앞으로 나왔다.
"아이들을 가르치러 왔습니다."
"이 상황에도 거짓말을 하는군. 그대들이 계속 결계 밖으로 나가 수상한 짓을 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네니아가 팔을 뻗어 옆을 가리켰다.
결계를 지키고 있던 경비가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가슴에는 설녀가 한 것처럼 보이는 얼어붙은 손톱자국이 보였고, 결계도 손상되어 있었다.
"설녀님의 분노를 샀어!"
누군가의 그 외침을 시작으로.
"그렇게 있어달라고 했는데!"
"자네들 때문에 애꿎은 마을까지 피해를 입게 됐잖아!"
성난 주민들의 분노와 항의가 쏟아졌다.
레테는 슬쩍 시몬 쪽을 보았다. 시몬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다.
"예, 죄송하게 됐슴다."
레테가 두 팔을 벌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벌을 주시든 받겠슴다. 예를 들면-"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젊은이들을 설녀에게 '제물'로 바쳐서 분노를 잠재운다거나."
그 말에 주위의 웅성거림이 급격히 멈췄다.
레테는 네니아의 옆에 있던 페트리아를 노려보았다. 페트리아는 눈도 마주치지도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페트리아. 마을에 또래 친구들이 없다고 했죠? 규율 때문에 마을에 쫓겨나는 걸 무엇보다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제 발로 나갔을 리는 없고. 외부인인 선생님들도 실종됐고. 이건 역시......."
"그만!"
네니아 미제나시가 지팡이를 짚으며 한 걸음 더 걸어 나왔다.
"역시 전 선생님들의 실종 사태를 조사하러 온 게요? 아마 찾지 못할 겁니다. 그 사람들도 마을의 룰을 어겨 결계 밖으로 쫓겨났으니. 이 설산 어딘가에서 얼어 죽었겠지."
"......."
"이번에도 마찬가지. 우리는 그대들에게 벌을 내리지도, 손을 대지도 않을 거요!"
처억!
척!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그대들을 마을에서 추방하겠소. 지금 당장 떠나주시오."
사실상, 한밤중 혹한이 몰아치는 설산에서 내쫓는 건 그냥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가죠."
"응."
하지만 두 사람은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시몬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으니까.
"숀 선생님! 숀 선생님!"
"안 돼요! 레아 선생님!"
바로 그때, 마을의 아이들이 울음을 펑펑 터뜨리며 달려왔다.
"얘, 얘가 왜 이래?"
"안다!"
어른들이 막으려 했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손길도 뿌리치고 시몬과 레테에게 달라붙었다.
"선생님! 가지 마요! 죽지 마요!"
"안 돼요! 선생님! 흐읍! 훌쩍!"
예상치 못한 상황에, 주위는 정적이 일었다.
시몬과 레테는 자세를 낮추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이 마을에서의 생활이 가짜라고는 해도,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진심이었다.
마음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몬은 아이들에게 미소를 보였다.
"안 죽어요. 나중에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
그때 아이들의 몸이 냉기로 휩싸이더니,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멀어져 갔고, 그 너머로 미제나시의 마법사들이 손바닥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만 나가주시게."
네니아 미제나시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렇게 시몬과 레테는 마을에서 추방됐다.
* * *
휘이이이이이잉!
혹한과 눈보라가 쏟아지는 밤.
시몬과 레테는 두 다리에 신성을 일으킨 채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타임어택이 됐지만, 뭐 좋슴다!"
레테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안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이 지긋지긋한 혹한을 끝내죠!"
"그래야지."
그동안 설산에서 헤매기만 한 건 아니었다.
눈밭을 달리던 레테는 바위를 발견하고는 팔을 뻗었다.
<홀리볼트>
신성마법으로 바위를 강타하자, 주위의 허공이 쩌저적 갈라지며 박살 났다.
"첫 번째 클리어."
이번에는 산 언덕에서 눈사태가 쏟아졌다. 시몬이 팔을 뻗었다.
"시체폭발."
어젯밤, 포인트에 미리 숨겨놨던 좀비들이 빛을 뿜으며 폭발했다.
불안전했던 한쪽 지반이 무너져 내리고, 산사태가 그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두 번째도 클리어야."
그 밖에도 미리 잡아둔 몬스터의 시체를 던져서 다른 몬스터의 시선을 끌기도 했고, 환상을 깨거나 왜곡된 미로 마법에서 똑바로 걸어가는 등, 여러 장애물들을 돌파했다.
경험의 결과.
두 사람은 설산에서 계속 지름길을 찾고 함정을 분석했다.
"이쯤에서 방향을 한번 확인하죠."
레테가 마법진을 발동시키자, 혹한으로 가려진 산맥의 최정상에서 빛이 번뜩였다.
레테가 미리 동굴에 설치해 둔 발광마법, '일루미네이션'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쪽임다!"
"오케이!"
세 시간 만에 여섯 개의 난관 돌파.
두 사람도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몰랐다.
이제 그들은 점점 가파른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저기 동굴이 보임다!"
바로 그 순간.
터업! 텁!
다리가 뭔가에 붙들렸다. 이내 눈 바닥이 일어나며 거대한 얼음골렘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뭐......!"
얼음골렘은 밑이 보이지도 않는 새까만 절벽으로 두 사람을 던져 버렸다. 두 사람의 비명이 점점 멀어져 갔다.
-.......
명령대로 침입자를 처리한 골렘은 다시 자세를 바꾸어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부아아아아앙!
난데없이 방금 떨어뜨렸던 두 사람이 날아올랐다.
오른쪽에는 새 형상의 신수에 매달린 레테가, 그리고 왼쪽에는 아칼리온으로 절벽을 타고 올라온 시몬이 있었다.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소년과 소녀가 동시에 신수에서 뛰어내리며 발차기를 날렸다.
레테의 다리가 골렘의 머리를, 시몬의 다리가 골렘의 핵이 있는 가슴을 강타했다.
꽝!
그대로 골렘이 박살 나며 흩어졌다. 두 사람이 바닥에 착 내려와 신수들을 신성 아공간으로 회수했다.
"좋아. 이제 다 왔네!"
"그러네요."
두 사람 앞에 검은 동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