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26화
레테가 스스로 성녀 신분을 드러냈다.
어떤 사람들은 즉각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려 레테를 경배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중앙 에프넬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않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 요!"
에스카일 마을의 남자가 목소리를 높이다가, 슬쩍 레테의 눈치를 보았다.
"저 쓰레기 같은 쿨라 놈들에게 당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피해자는 우리가 훨씬 많지."
쿨라의 영주가 이를 빠득 갈며 앞으로 나왔다.
"외람되오나 이쪽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성녀님! 피를 본 이상, 결코 여기서 물러날 수는......!"
[아아아 말 존나게 기네 X발!]
신성이 담겨 울려 퍼지는 성녀의 목소리에서 상스러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레테가 하늘로 치켜든 팔을 흔들자, 드높은 공중에서 별들이 일렁였다.
하늘을 본 사람들이 움찔하며 자세를 낮췄다.
'아오, 씨. 진짜 맘 같아선 양쪽 다 확 쓸어버리고 싶은데.'
이 지역 내의 정치적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신인 성녀에 불과한 레테가 말썽을 피우면 에프넬에서도 귀찮은 일들이 펑펑 터질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명심하세요 레테. 기왕 성녀의 힘을 썼다면, 모두가 성녀에게 기대하는 바를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멘토인 이스라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레테는 '어휴' 하고 한숨을 쉬더니 하늘로 향한 팔을 내려서 백마법을 발동했다.
<메타 그레이트 힐링>
화아아아아아아악!
레테를 중심으로 눈을 아리게 만드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상처가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무기에 찔린 중상자들도 마찬가지. 구멍 난 부위는 살이 차오르고 엉망이 된 장기와 뼈가 바로잡힌다.
그녀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쓰러져 있던 두 마을의 부상들이 하나둘씩 흐느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됐슴까?]
레테가 양 허리에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쿨라에 당한 사람도 없고! 피를 본 사람도 없어!]
"......."
영주와 에스카일 청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레테가 등을 홱 돌렸다.
[들어오십쇼. 일단 마을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하죠.]
"하, 하지만 쿨라 놈들이 마을의 결계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혹한이......."
따악!
레테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결계가 찢어졌던 곳이 신성으로 뒤덮이며 막이 형성되었다.
[이제 됐슴까!]
"......아."
레테가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보지 않는 사이, 몇몇 사람들이 슬쩍 무기에 손을 가져가려 했다.
[나 이제 성녀로서 할 거 다 했다.]
그들의 동작이 움찔 멈췄다.
[이제 어느 쪽이든, 먼저 시비 거는 쪽은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말살이다.]
그녀의 살벌한 일침에, 영주와 에스카일 측은 기겁하며 무기를 내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성녀 레테의 명령으로 에스카일 마을 사람들은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쿨라 사람들의 몫까지 준비하란 말에 몇몇 사람들이 반발했다.
레테는 최근에 열심히 배운 성녀 미소를 보이며, '곧 설명하겠지만 이 혹한에는 여러분의 책임도 있답니다. 그리고 마을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건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어요?'라고 사근사근 타이르듯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하라면 해. X발!]
레테의 일갈에 노발대발하던 사람들도 헐레벌떡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상 레테가 두 쪽을 화해시킨 게 아니라, 마을을 장악해 버리고 두 세력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형국이 됐다.
"여기 있어요."
"고, 고맙소."
그런데 새벽만 해도 너 죽고 나 살자 살벌했던 분위기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과정에서 조금은 풀어졌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고, 뭐든 먹고살려고 하는 짓 아니겠는가.
혹시나 또 싸움이 날까 봐 지켜보던 레테도, 비로소 성녀의 힘을 거두어들인 다음 고개를 돌렸다.
"페트리아."
그동안 마을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페트리아가 벌벌 떨며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레아...... 아니! 레테 성녀님! 성녀님인 줄도 못 알아보고 그만!"
레테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나도 정체를 숨기고 왔으니 그쪽 이야긴 됐어요. 그보다 에스카일 사람들이나 불러오세요. 쿨라에는 내가 이야기 해놓겠슴다."
그렇게 레테는 두 마을 사람들을 마을회관에 불러들였다. 네니아 미제나시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널찍한 공간이었다.
먼저 도착한 레테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가운데.
"흘흘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시몬이 상대했을 네니아 미제나시가 떡 하니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네니아가 아니었다.
"쿠, 쿨라에서 점 봐줬던 할머니 맞죠?"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을 뵙겠습니다."
"......깜짝이야. 그 몸으로 어떻게 이 설산까지 왔어요?"
"업혀 왔습니다. 영주가 마을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레테는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흠흠 목을 푸는 시늉을 했다.
"......할머니가 점으로 봤던 그 미래. 언데드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을 살려서 일으키는 거였어요?"
노파는 그저 웃었다.
"쇤네는 점을 볼 뿐입니다. 받아들이는 건 개인의 몫."
노파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러 갔다. 고향에 와서 그런지 그리움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레테는 그런 노파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근데 그 하늘을 난다는 건 언제지?'
* * *
잠시 후, 마을회관에 에스카일과 쿨라.
양측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레테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으니 다시 에프넬 교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자그마치 수십 년이 넘는 갈등과 반목이었네요."
레테가 연단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외부인인 내가 이제 와서 '닥치고 사이좋게 지내세요.'라고 하진 않을 검다. 하지만 적어도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겠죠."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마을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실을 말씀드리죠. 혹한의 정체는 설녀의 분노 따위가 아니라, 던전의 이상현상이었습니다."
즉각 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에스카일 쪽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는 틀림없이 설녀를 봤어요!"
"그럼 댁들은 던전엔 가봤슴까?"
레테가 날카롭게 말했다.
"나랑 시...... 아니, 숀 선생님은 직접 산맥의 정상에 있던 동굴에 가서 던전의 정체를 확인했습니다. 그게 혹한의 원인인 것도 확인했고요.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까, 미제나시 사람들이 저희를 둘러싸고 죽이려 하더구요."
"......!"
레테가 빙긋 웃었다.
"생각해 봐요. 마을이 위험에 빠졌는데, 미제나시 사람들은 어디 있었을까요?"
"그, 그러고 보니......!"
"네에, 저희를 입막음하러 간 거였어요. 설녀의 분노가 사실은 던전의 이상현상이란 걸 들켜선 안 됐겠죠. 당신들이 전멸하는 것보다요."
에스카일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레테는 이번엔 쿨라 사람들 쪽을 보며 말했다.
"그들은 설녀 전설을 꾸며내 연막작전을 펼치고, 던전의 정체를 은폐했습니다. 굳이 던전을 지키면서 이상현상을 유지한 이유는 하나. 바로 옛날에 자신들을 쫓아냈던 쿨라 사람들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몇몇 쿨라 주민들이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에 대한 분노가 공멸을 부를 뻔한 사태. 레테와 시몬이라는 외부인의 난입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렇게 됐을지도 몰랐다.
"여, 역시 믿을 수 없소!"
"성녀님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않습니까. 명확한 증거 없이는......!"
차박. 차박.
그때 지팡이를 짚고 연단으로 올라오는 노파가 있었다.
"성녀님의 말은 모두 사실이오."
쿨라의 점 보는 노파였다. 그녀의 등장에 양쪽 모두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네니아 미제나시의 동생, 안지아 미제나시."
쿵! 그녀는 언니와 똑같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는 습관을 보이고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언니와 가문 사람들은 내게 던전의 이상현상으로 쿨라에 복수하겠다고 했소. 나는 이에 반대했고, 마을에서 쫓겨났지."
"그, 그럼 정말......!"
"미제나시의 이름을 걸고, 성녀님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하겠소."
이내 주위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레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쿵!
이번엔 뒤쪽의 문이 열리더니 눈이 머리에 내려앉은 시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쇼, 숀 선생!"
"프리스트님!"
레테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왜 이렇게 늦었슴까! 이 바보!'
시몬은 레테에게 슬쩍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입을 열었다.
"미제나시의 마법사들은 모두 결박해서 던전 근처에 묶어두었습니다. 조금 이따 다 같이 가서 확인하시죠. 그보다."
시몬이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사태는 끝난 게 아닙니다."
"끝난 게 아니라고?"
"저와 레테 성녀님이 던전에 들어가 봤지만, 가장 중요한 던전주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몬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던전주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던전과 혹한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아!"
"그리고 던전주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웅성 웅성 웅성!
사람들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 도대체 그게 누굽니까 숀 선생님!"
"말씀해 보세요!"
시몬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에스카일 마을 분들은 알겠지만, 미제나시는 설녀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강행했죠. 하지만 젊은 사람을 희생하는 인신 공양은 마을 사람에게 큰 반발로 돌아올 수 있기에, 미제나시는 모범을 보여 자신들의 후계자들을 스스로 제물로 바치고, 거기서 살아 돌아온 사람만이 미제나시의 이름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 제물로 바쳐진 미제나시 소녀이자, 지금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미제나시. 그리고 던전에서 유골이 발견되어,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
시몬의 눈이 돌아갔다.
"당신이지? 페트리아."
모두의 경악한 시선이 페트리아에게로 향했다. 역력히 당황한 그녀가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네, 네에에?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을......!"
"네니아 미제나시가 모두 자백했어."
시몬이 차갑게 말했다.
몇 시간의 전투에서, 시몬은 혼돈의 힘을 사용해 미제나시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그리고 혼돈의 특수효과.
제대로 맞으면 이성을 흔들고 환각 및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던전주가 어디 있는지 말하세요.
시몬이 물었지만, 그들은 혼돈의 효과를 받는 중에도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미제나시의 독함에 혀를 내두르며,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도망쳐! 도망치셔야 합니다!
네니아 미제나시가 반응했다.
-페트리아! 아니, 페트리아 님! 도망치셔야 합니다!
페트리아는 그녀의 손녀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높여 부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오래된 던전에 남아 있던 그 죽은 선생님으로 변신한 용족 몬스터.
그렇다면-
"난 인간이에요! 내가 그런 괴물일 리가 없잖아요!"
페트리아가 버럭 소리 질렀다.
"게다가 저는 미제나시지만, 빙결 마법도 쓰지 못해서 불려가지 못한 무재능이에요! 말이 안 되는......!"
"페트리아?"
레테가 연단에서 쪼그려 앉아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를 본 페트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레, 레아! 아니! 레테 성녀님! 성녀님은 저를 믿어주시는 거죠?"
"응."
레테가 빙긋 웃었다.
"죽음으로 증명한 뒤에."
쐐애애애애애애액!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측면에서 광채와 함께 신성화살이 날아왔다.
"레테!"
시몬도 이번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의 화살이 페트리아의 몸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날아가 벽을 뚫고 날아갔다.
"너무 지나치잖아!"
시몬의 항의에 레테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모습을 보고 말하는 게 어떻슴까?"
"뭐?"
시몬의 고개가 돌아갔다.
페트리아가 싸늘한 표정으로, 신성 화살을 오른손으로 붙잡은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의 오른팔에 얼음비늘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법, 쓰지 못한다며?"
레테가 연단에서 내려오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그거, 사실 빠르기만 하지 회복기능이 달린 신성마법임다."
"......."
페트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