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30화
쏴아아아아-
에메랄드빛 물결이 치는 아름다운 바다.
살짝 후덥지근한 느낌이 드는 온화한 날씨.
이것이 쿨라의 원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녹은 쿨라의 바다를 배경으로, 시몬과 이스라필이 서 있었다.
"여기 있어요."
잘그락.
그녀가 건넨 것은 백금으로 세공된 고삐 같은 물건이었다. 신성이 은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레테에게 보고는 들었답니다."
언제나처럼 눈을 감고 있는 이스라필이 빙긋 웃었다.
"신수의 사물화. 그리고 빛과 번개의 전차. 그에 걸맞은 신성 아티팩트를 준비해 보았어요."
시몬은 감격한 얼굴로 아티팩트를 받아들었다.
금속처럼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무겁지는 않았다. 섬유 같은 편안한 감촉에 절대로 찢어지지 않을 것 같은 끈끈함이 있었다.
"어떤 아티팩트를 선물할지 고민을 많이 했답니다. 신수들의 빠른 속도를 제어하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스라필 님!"
시몬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임무를 무사히 완수해 주었으니, 제가 더 감사하죠."
"저도 임무를 떠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신성연방에 와서 많은 걸 배웠어요."
"호호호! 다행이네요."
두 사람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가운데, 관심에서 밀려난 레테는 어쩐지 뚱한 표정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시몬의 발을 힘껏 밟았다.
"이스라필 님, 괜찮으시다면...... 아악!"
시몬의 발등에서 별이 통! 튀어 올랐다.
레테는 모른 척 지나가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레테!"
"무슨 일 있었슴까?"
이스라필이 입을 가리고 우아하게 웃었다.
"못 본 사이 두 사람, 사이가 더 좋아졌네요."
레테가 발끈하며 돌아보았다.
"좋아지긴 개뿔! 그리고 이스라필 님! 이번 숙소 건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어머, 무슨 일 있었나요?"
"모른 척하지 마세요!"
이스라필은 그저 천연덕스러운 웃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보수금 1만 골드는 브로커를 통해 레스힐로 보내겠다고 시몬에게 약속했다. 환전절차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자, 남은 뒤처리는 프리스트들에게 맡기고."
이스라필이 시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우리 조카는 내일 암흑연합에 돌아가도록 하세요."
레테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버, 벌써요?!"
"어머나~ 레테. 아쉬운 건가요?"
"자꾸 뭔 소리예요!"
레테가 빼액 소리 질렀다.
"안나 언니께서 적어도 신년엔 시몬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신년은 가족들끼리 오붓하게 보내야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필이 레테를 돌아보았다.
"레테도 다시 성녀의 의무를 시작해야 하고요."
레테가 '윽!' 하는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성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각성 직후 1년이에요."
이스라필이 웃는 낯으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레테는 신인 성녀임에도 벌써 보름이나 자리를 비웠죠. 에프넬의 높으신 분들이 노발대발하고 있답니다. 당장 내일 저녁부터 성녀 로브를 입고 행사에 참석하도록 하세요. 만민에 이름과 얼굴을 알리고, 영향력을 쌓는 게 중요하답니다."
레테가 축 처진 얼굴로 '......네에.' 하고 대답했다. 시몬이 씩 웃으며 격려했다.
"힘내세요, 성녀님."
즉각 분노의 돌려차기가 얼굴로 날아왔다.
* * *
"안녕히 가십시오! 성녀님! 그리고 숀 프리스트님!"
"마을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정든 쿨라 사람들과 작별하고, 시몬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이동했다.
국경에 도착한 뒤에는 레테, 이스라필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국경 앞 비밀창고에서.
"......또 이거네."
시몬은 씁쓸하게 웃으며 짐 마차의 나무상자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분 후 암흑연합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상인으로 위장한 브로커가 말했다.
이제는 익숙했다. 아니, 체념한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 격렬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혹사당할 허리에 미리 적응할 시간을 주고 있는데.
타다다닷!
검은 로브를 입은 수상한 사람이 창고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누, 누구요!"
브로커가 팔을 벌려 막았다.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그러나 그 사람은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브로커의 팔 아래로 빠져나가더니 시몬에게 불쑥 다가왔다.
"누구......! 웁!"
단숨에 얼굴을 붙잡힌 시몬이 나무상자 안에 구겨지듯 밀어붙여졌다.
"빨리 옆으로 비켜요!"
바람결에 로브가 걷히고, 하얀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몬이 입을 딱 벌렸다.
"레, 레테?"
"쉿! 쉿! 이스라필 님께 들키겠슴다! 빨리 옆으로 비켜봐요!"
시몬이 물러나기도 전에, 레테가 그 안으로 거칠게 몸을 들이밀었다.
'으악!'
성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뭐 이렇게 막무가내일까.
그녀가 비좁은 공간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는 바람에, 두 사람은 전신이 바짝 밀착하게 됐다.
시몬은 그대로 돌이 되듯 굳어졌다. 빨개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여기 팁임다!"
팅!
그러거나 말거나 홀로 다급한 레테는 동전을 브로커에게 튕겨주었다.
그것은 받은 브로커가 '오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문 닫을게요."
레테가 짐 상자의 뚜껑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 레테! 성녀 수업이랑 앞으로의 일정은 어쩌고?"
"알 게 뭐예요!"
레테는 막무가내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같이 암흑연합에 넘어가서 안나 선생님 얼굴을 볼......!"
스르륵.
레테의 허리에 하얀 선이 휘감기더니, 비명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졌다.
"아이처럼 고집부리면 안 된답니다. 레테."
또각 또각.
선명하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브로커는 즉시 바닥에 엎드렸고, 시몬은 짐 마차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스라필 님!"
걸어오는 이스라필, 그리고 공중에서는 붙잡힌 레테가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거 놔요! 이스라필 님!"
"어쩐지 얌전하게 넘어간다 싶다더니, 내가 안 된다고 했죠?"
이스라필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왈가닥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요."
레테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거 놓으라니까요!"
따악!
이스라필이 손가락을 튕기자 레테를 묶고 있던 끈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레테."
이스라필의 구두 굽 소리가 바닥을 타고 번졌다.
엉덩방아를 찧고 아파하던 레테가 고개를 들자, 검은 동공을 드러낸 이스라필의 모습이 보였다.
"......!"
눈을 드러내는 건 이스라필이 어지간히 화났다는 의미이기도 했기에, 레테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잠깐의 충동으로, 평생을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도록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타이르듯,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웠다.
"이번에도 말없이 떠나면 성녀 자리가 위태로울지도 몰라요."
"저는 그깟 자리 없어도......!"
"성녀의 힘 없이-"
이스라필의 눈길이 시몬에게로 향했다.
"레테가 우리 조카를 이길 수 있을까요?"
"......."
레테가 입을 다물었다. 이스라필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눈을 감은 모습으로 돌아와 브로커에게 물었다.
"출발까지 얼마나 남았죠?"
브로커가 더더욱 깊게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5분 남았습니다!"
"좋아요."
이스라필이 손짓으로 브로커를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나누도록 하세요."
이스라필과 브로커는 그대로 걸어서 창고 밖으로 나갔다. 브로커가 슬쩍 말했다.
"제, 제가 감히 참견할 부분은 아니지만, 괜찮겠습니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답니다."
이스라필의 두 눈이 반달로 휘었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알아들었을 거예요. 레테는 똑똑한 아이니까요."
* * *
"하아아."
문이 닫히고, 레테가 한숨을 쉬었다. 시몬도 상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혼날 줄 알았어."
"......조용히 하십쇼."
레테가 얼굴을 붉히며 툴툴댔다. 시몬이 슬쩍 웃으며 팔짱을 꼈다.
"네 편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이스라필 님 말씀이 맞아. 성녀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우는 건 좀 아니지."
"......뭐."
레테가 새침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도 알고는 있슴다."
"알고 있다니 됐어."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5분이란 시간은 짧았지만, 뭔가 말이 훅 나오지가 않았다.
"언젠가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녀의 눈동자가 시몬을 비췄다.
"우리는 싸우게 되겠죠?"
"......아마 그렇겠지."
레테가 픽 웃었다.
"그때는 내 손으로 당신을 쓰러트릴 검다."
"이쪽도 봐주는 건 없어."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조용히 웃었다.
"뭐,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연방민을 대표하는 성녀로서 이번 일에 협조한 건 감사드릴게요."
"그럼 다음번엔 네가 암흑연합에 와."
"네?"
시몬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음번엔 이쪽에서 네게 의뢰할게. 사실 우리 암흑연합도 프리스트가 없어서 고생하는 일이 많거든."
병의 치료나 회복, 언데드 정화 같은 분야는 프리스트 쪽이 우월하다.
그리고 저주나 독기나 가득한 공간, 데스랜드 같은 장소도 프리스트들이 있었다면 진작에 해결했을 문제이리라.
제안을 들은 레테가 눈을 내리깔았다.
"......암흑연합."
예전에 안나의 치료약을 들고 국경을 넘을 때만 해도, 제 발로 지옥으로 기어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해볼게요."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그럼."
"네."
레테가 생긋 웃었다.
"잘 가요. 시몬."
* * *
혹한이 그치고 쿨라는 맑은 하늘을 되찾았지만, 드높은 설산의 꼭대기는 자연적인 눈보라가 불고 있었다.
그리고 설산의 동굴.
지금은 사라진 카리사 던전의 입구를, 신성연방의 팔라딘들과 학자들이 조사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던전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그러게."
중앙에서 파견된 팔라딘들은 갑옷 위에 털옷을 감싼 채 툴툴댔다. 그중 한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학자 양반. 뭐 좀 알아냈소?"
"예."
학자가 돋보기안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주 흥미로운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흔적?"
"이 던전의 결계. 미제나시 가문의 마법사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소."
"하지만 그들의 힘으로 이 결계를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팔라딘이 몸을 홱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놀랍게도 이 결계의 구조는 신성과 칠흑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복합 마법진입니다. 두 속성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해제할 수 있죠."
팔라딘들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칠흑이라고 했소? 이 북부 산골짜기에 칠흑 결계가......!"
"저도 믿기진 않지만 사실입니다."
팔라딘이 창백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중앙으로 끌려간 미제나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해 봐야겠소. 그리고 별의 성녀님께도 연락해 어떻게 결계를 풀었는지도 알아볼......."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팔라딘이 고개를 돌렸다.
"대장, 왜 말을 하다 마십니까?"
그런데.
방금 말하고 있던 그 대장이 사라져 있었다.
"대, 대장?!"
스르르르륵!
스르륵!
동굴을 지키고 있던 팔라딘들의 몸이, 공간이 일그러지듯 소용돌이치더니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팔라딘들의 존재가 삭제되었다.
"허, 허억!"
겁에 질린 학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팔라딘들이 전부 사라지고, 동굴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무언가가.
아니, 입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신을 로브로 뒤집어써서 그 끝이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로드 너머의 어둠 속에는 두 개의 안광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 결계는 내가 만들었다.]
인간이 아니다.
살아생전 겪어본 적 없는 지독한 공포에 학자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누, 누구시오!"
"궁금해?"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학자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산발인 머리카락을 쭉 내려뜨린 여자.
그러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은 그늘이 얼굴에 붙은 것처럼.
"안 가르쳐 주지~"
퍽!
꾸드득!
피가 튀었다.
학자의 목뼈와 척추가 불가능한 방향으로 비틀리더니 풀썩 쓰러졌다.
"이제 어쩔 거예요 어르신?"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혈천교에 이어서 던전주 카리사까지. 어르신이 깔아놓은 말들이 하나하나 박살 나고 있잖아요."
로브 속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말은 아직 많다. 하지만.]
스스스스.
새까만 로브 속에서 말라붙은 한쪽 팔이 튀어나왔다.
[키젠과 에프넬.]
그 손바닥에서는 검푸른 광채가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역시 그 두 곳을 먼저 없애야겠구나.]
* * *
다음에는 레테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으로 약속하고, 시몬은 국경을 넘었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던가, 시몬은 탑승감 최악인 짐 마차에서 태연하게 눈을 붙였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안정감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 중립지대에 도착하고,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암흑연합의 영토로 이동. 마차를 타고 레스힐까지 왔다.
레스힐에 도착한 뒤부터는 직접 두 발로 산맥을 달려가 날이 저물기도 전에 집에 도착했다.
"시몬! 어서 오렴!"
"수고했다, 시몬! 처제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시몬은 안나, 리처드와 포옹하며 재회했다.
안나는 바로 앞치마부터 챙겼다.
"아들, 많이 배고프지?"
"아, 아뇨! 오면서 간단히 군것질해서......."
"맛있는 거 만들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당연하지만 시몬에겐 선택의 권리는 없었다.
잠시 안나가 밥을 차리는 사이, 시몬은 방으로 올라왔다.
"......아."
그런데 뭔가.
책상 앞에 편지가 좀 많이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