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50화
"......."
시몬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눈을 감고 와인잔을 입에 가져갔다.
자극적이지 않은 깔끔한 바디감과 은은한 과일 풍미. 화이트와인이었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시몬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애들 또 저렇게 조종하면, 로레인한테 혼나지 않아?"
"에이~ 이 정도야 뭐 어때요? 본 사람도 없고, 본인도 기억 못 하고."
세르네가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방금 그녀의 시중을 들던 남학생들이 인파에 섞여 들어가더니, 정신을 차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끽! 우끽끽!"
"얘 갑자기 왜 이래?"
아까 시몬을 둘러쌌던 여학생들은 여전히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저건 분수를 모르고 '내 것'을 건드린 벌."
여왕님처럼 고고하게 팔을 휘저은 세르네가 레드와인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시몬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누구 맘대로 내가......."
"오랜만에 시몬을 보니까요."
갑자기 향수 향이 훅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세르네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더 근사해진 느낌?"
"!"
시몬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의자에 앉은 시몬의 다리 사이로 그녀의 무릎이 올라왔다. 몸의 곡선은 한껏 두드러지고, 농밀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둥 순진무구한 눈으로 시몬의 얼굴을 훑어 내려가던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휜다.
"후훗, 농담이에요~"
세르네가 다시 몸을 되돌려 자리에 앉았다. 상앗빛 머리카락이 흔들려 시몬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끙.'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시몬은 정신을 다잡았다.
"놀리지 마. 이러면 네가 아까 저 여자애들이랑 다를 게 뭔데?"
"결정적인 게 다르죠?"
그녀가 두 손을 새하얀 무릎 위에 얹은 채 윙크했다.
"저 원숭이들은 권력과 쾌락을 위해서 누구에게나 껄떡대겠지만, 나는 아니에요. 애당초 나와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죠."
그녀의 비취색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난 원숭이와는 대화하지 않아요. 그래서 원숭이를 인형으로 만들죠. 하지만 당신은 인형으로 바꾸지 않고 놔둘 가치가 있어요.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 인정한 존재."
가슴에 손을 올린 그녀가 연약한 척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사실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저는 많은 각오를 하고 있는 거라구요?"
"하아."
시몬이 이마를 짚었다.
"네가 4차원이라는 것 외엔, 도대체 뭔 소릴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서두르지 말아요. 앞으로 차차 알아가면 될 거예요. 왜냐하면-"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시몬에게만 들릴 만큼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도 시몬을 따라, 소환학과에 갈 거니까."
"!!"
시몬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칠흑역학 쪽이 아니라?"
"거기 가봐야 배울 건 뭐 뻔하잖아요? 내가 가치판단을 내릴 때의 잣대는 하나."
느슨하게 내려앉은 눈꼬리가 시몬에게로 향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게 있느냐. 없느냐. 단지 그것뿐."
"......."
갑자기 더워졌다. 시몬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와인잔을 집은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높은 신맛, 그리고 포도주의 농밀한 바디감이 느껴진다.
'어.'
근데 이거 레드와인이다.
아까 마시던 건 분명히 화이트와인이었는데.
"!!"
시몬의 고개가 재빨리 돌아갔다. 세르네가 시몬의 화이트와인 잔을 쥔 채로 흔들고 있었다.
'설마! 아까 가까이 다가온 건 와인을 바꿔치기하려고......!'
"시몬도 차암~ 보기보다 엉큼하다니까."
옅은 홍조를 띤 채 수줍게 말한 그녀가, 시몬의 와인잔 끝에 분홍빛 입술을 대고는 쪽 하고 키스했다.
시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세르네!!"
"호호호호호!"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큭큭큭. 후후후. 허리를 꺾으며 끊임없이 웃었다.
"아~아~ 정말 시몬은 놀리는 보람이 있어요."
그녀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여전히 벌게져 있는 시몬이 분한 표정으로 세르네를 노려보았다.
"갈게."
"가기 전에."
세르네가 말했다.
"내가 비밀 하나 말했으니까 시몬도 하나 말해야죠. 그게 공평하잖아?"
"......무슨 비밀?"
"예를 들면."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기 학생회장에 대한 정보?"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시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보가 빠르네."
"그럼요. 아! 그리고 아직 학생회 자리가 하나 비었던데......."
"임원으로 넣어달라고?"
세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누구 밑으로 들어가는 성격 아니에요. 특히 부회장은 우리 메이린일 거고? 그럼 메이린이 내 상관인 건데? 그 꼴은 못 보죠."
'......그렇겠지.'
"우후후."
세르네가 턱을 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우리 메이린의 입이 많이 근질거리고 있겠네요? 빨리 나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온몸을 비틀면서 참고 있......."
척.
세르네의 말이 멈췄다. 눈동자만 움직여 옆을 보니, 날카로운 식기가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하여간 손버릇 나쁘다니까."
세르네가 말했다.
밤하늘을 바른 듯 검고 탄력 있는 머리카락과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의 소녀가 세르네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몬의 눈이 커졌다.
"로레인!"
"저거 멈추게 해."
로레인이 재차 말했다. 세르네가 여우 같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쟤들, 멈추라고."
우끼기! 우끼끽!
아직도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는 여학생들은 거의 탈진상태였다. 땀범벅에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나름 많이 봐준 건데요~"
세르네가 눈웃음을 흘렸다.
"슬쩍 죽여 버릴까 했는데. 그냥 전교생 앞에서 흑역사 박제되고 여자애들 사교계에서 묻어버리는 선에서......."
"더 같은 말 안 해."
로레인의 붉은 동공에 안광이 일렁였다.
"멈춰."
"......하아."
세르네가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을 두 번 딱딱 튕겼다.
그제야 원숭이 흉내를 내던 여학생들이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로레인이 식기를 내리며 말했다.
"너는 징계야. 세르네 아인다르크."
세르네가 웃었다.
"웃겨.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세르네는 저 여학생들을 깃털로 움직이지 않았다.
깃털을 이용해 저주학과 전공생을 세뇌했고, 그 저주로 여학생들을 원숭이 흉내 내도록 한 것.
당연히 저주를 건 학생의 기억은 이미 지워졌다.
로레인이 저 여학생들의 몸을 조사해도, 깃털에 당했다는 흔적은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 전교생 신체검사를 하면 찾아낼 수 있겠지."
물론 로레인도 그 사실을 짐작하는 바였다.
"한번 해봐요."
세르네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나 하나 벌주려고 개학식이랑 학과선정식 일정도 캔슬하고 신체검사니 뭐니 온갖 야단법석 떨려고? 그런 추잡스러운 건~"
세르네의 눈이 여우처럼 가늘어졌다.
"키젠의 방식이 아니잖아?"
세르네와 로레인이 살벌하게 눈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며, 시몬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두 사람, 1학년 내내 이런 식으로 싸워왔던 거구나.'
"분위기도 식었으니, 이만 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세르네가, 시몬을 보며 깜찍하게 미소 지었다.
"나중에 소환학 수업에서 또 봐요, 시몬."
"응? 아, 그래."
또각- 또각-
세르네가 시몬을 지나쳐 걸어가다가 로레인의 목걸이를 보았다.
목에 착용한 초크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그 꼴, 보기 좋네요."
세르네가 그렇게 말하고는 걸어갔다. 바로 뒤를 이어 그녀의 파벌들이 우르르 몰려와 세르네의 뒤를 따랐다.
"......."
"......."
세르네가 사라지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 안녕. 로레인."
시몬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 시몬."
로레인도 적의를 거두고 비로소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시몬은 그녀가 목에 맨 자물쇠를 다시 철컥! 하고 닫는 모습을 보았다.
"곧 학과 환영회가 시작돼.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알려줘서 고마워."
"그럼 난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로레인은 아직 세르네를 잡을 기회를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등을 돌려 걸어가려던 로레인이 '아' 하고 걸음을 멈추더니 시몬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도."
"?"
"......소환학과에 갈 거야.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홱 돌리더니 서둘러 달려가는 로레인이었다. 시몬은 옆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이번 2학년 학과생활, 엄청 피곤할 것 같다.'
* * *
개학 파티가 끝나고, 조교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자, 두 줄로 서세요. 두 줄로."
조교들은 학생들을 줄 세워 다음 장소로 데려갔다. 시끌벅적 떠들던 학생들은 하나둘씩 입을 다물고 긴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을 지나 긴 복도를 통과해 도착한 곳은, 아까보다 더 크고 넓은 강당이었다.
"니들 혹시 봤냐? 봤어?"
다들 긴장해서 앞만 보고 있는 가운데, 딕만이 떠벌떠벌 잡담을 하고 있었다.
"D반 여자애들이 막 원숭이 흉내 내면서 돌아다니는 거! 그거 진짜 웃겼는데."
"쉿, 조용히 해."
메이린이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고는,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3학년 선배님들이야."
열린 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일곱 개의 커다란 회의장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옷깃에 붙어 있는 황금색 배지. 바로 교내 최정점인 '3학년'임을 상징하는 배지였다.
3학년의 배지 색깔은 특정 해를 기점으로 바뀌는데, 이번엔 황금색이었다.
'분위기 개쩐다.'
'무, 무섭네.'
사각 테이블에 앉은 3학년 선배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는 2학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학과별로 앉았네. 왼쪽 테이블부터 저칠소 사혈맹투."
딕이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유명한 선배들은 다 모였어. 헤일리 선배랑 벤야 선배, 발락 선배도 있다! 어, 근데 최강인 에이젤 선배가 안 보이네."
"에이젤 선배님은 임무 중이라고 했잖아."
"거기, 잡담 금지. 2학년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조교의 통제에 따라 2학년들은 일곱 개의 테이블을 지나갔다.
3학년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과, 앞에 보이는 연단, 그리고 그 중간에 작은 의자가 마련된 자리가 2학년들의 자리였다.
"어우, 부담 시려."
"뒤에 보지 마. 괜히 눈 마주쳐서 찍히지 말고."
2학년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연단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연단으로 향했다.
"반갑다! 이것들아!!"
긴장감으로 굳어졌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니테일로 묶은 와일드한 질감의 회갈색 머리카락, 다소 사차원 같은 복장, 그리고 시원시원한 미소와 함께 삐쭉삐쭉한 삼각형의 상어이빨이 인상적인 여성.
"별야 교수님!"
와아아아아아!
2학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3학년들은 별야를 잘 모르기에 다소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이것들아! 방학 재밌게 잘 보냈냐!"
"네에!"
"좋아, 좋아. 목소리 큰 건 마음에 드네. 애들도 딱 똘똘한 새끼들만 남았어!"
방송 하수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그녀에게 확성 수정구와 행사일정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그녀는 지금까지 생목으로 전체가 다 들리게 말하고 있던 거였다.
"야, 근데 이거 어떻게 읽냐."
방송 하수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속성으로 대륙어를 가르쳐 주었다.
"겨우 개학식 주제에 X나 복잡하네. 쓰읍!"
별야가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에 곳곳에서 자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3학년들도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삭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별야 교수님은 하나도 안 변했네."
메이린이 쿡쿡거리며 말했다. 나머지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오케이. 이제 완벽하게 이해했어."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개학식 겸 학과 선정식을 시작하겠다! 다들 준비됐냐!"
"네에에에!!"
"그럼 개학축사인가 뭔가부터 해야 하는데."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어오쇼."
덜컹!
뒤쪽의 커튼이 걷히며 어떤 노인이 연단으로 올라왔다.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했지만, 허리가 굽어진 것도 없이 떳떳하게 서서 걸어오는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저 사람, 개학식에도 봤고 방학식 때도 봤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키젠 2학년, 그리고 3학년 여러분."
키젠 본부에 소속된 원로 중 한 명.
딕은 바로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고, 메이린과 카미는 조그맣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암흑연합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추적인 역할을......."
너희가 앞으로의 미래다.
모두가 너희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길게 말하는 기술은 대단했다.
별야가 멱살 잡고 끌어올린 분위기가 10분 만에 싹 식어버렸다.
"이상입니다."
원로는 무척 자신의 연설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빨리 좀 가라는 의미의 커다란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원로는 자신의 연설에 감복한 게 틀림없는 젊은이들을 향해 만족스럽게 손을 흔들어주며 떠났다.
"하아암."
별야는 이미 의자에 앉아 고양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원로가 연단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녀가 생목으로 조용히 말했다.
"니들이 열심히 해서 올라온 건데, 어른들이 X나 꼽사리 끼면서 생색내는 거 개싫지 않냐?"
학생들은 표정관리를 했지만 곳곳에서 동의하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별야가 다시 확성 수정구를 들었다.
"그럼 다음이다. 오, 이제야 좀 제대로 된 거 하네."
서류를 읽어내려간 별야가 고개를 들며 진지하게 말했다.
"예비 학생회장 앞으로."
웅성 웅성 웅성!
모든 2학년 학생들이 몸을 돌려 3학년들 쪽을 보았다.
그러나.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린 건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