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59화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하루. 괜히 일을 크게 벌였다가 수습이 안 되는 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었기에, 현실성 없는 안건은 과감하게 제하기로 했다.
그렇게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하니 제법 그럴듯한 기획서가 완성되었다.
"그럼."
메이린이 서류들을 탁탁 책상에 내리쳐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인 교수님 연구실은 우리 기숙사랑 가까우니까, 내가 교수님께 전달하고 올게."
"저도 메이린이랑 같이 갈게요! 다들 수고하셨어요!"
여학생들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딕이 끄으읍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시몬."
"응."
"진짜 그거 할 거야?"
"해야지."
"음흐흐! 너답긴 해."
딕은 키득거리면서 걸어가다가 학생회실의 서랍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그럼 이것도 가져가."
"뭔데?"
"일회용 메모리얼 수정구. 학생회 비품이더라."
메모리얼 수정구는 영상이나 음성을 녹화하는 기능을 가진 수정구 아티팩트였다. 딕이 수정구 하나를 시몬에게 던졌다.
"이걸로 뭘 하란 건데?"
시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모르지~ 그래도 혹시 알아? 요긴하게 쓰일지도."
의미심장하게 말한 딕이 수정구 하나를 챙겨서 품에 넣었다. 그러곤 총무답게 물품 비품란에 두 개를 소모했다는 표시를 써넣었다.
"그럼 난 적당히 시간 보내다가 맹독학과 신고식 끝날 즈음에 들어갈란다."
"알았어, 조심해."
* * *
시몬은 딕과 헤어져서 소환학과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가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피어의 유적에는 새벽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우.'
그리고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캠퍼스와 소환학과는 은근히, 아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리가 멀었다.
한참을 어둡고 으슥한 숲길을 걸어서, 마침내 소환학과 건물에 도착했다. 시몬은 장식품 스켈레톤 경비병을 넘어 기숙사 안으로 들어왔다.
로비와 휴게실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 제군아!"
익숙한 목소리에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동아리 선배인 벤야 바닐라가 음식 재료를 잔뜩 짊어진 채 공용부엌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밴야 선배님!"
그녀는 신고식 때 먹을 요리와 술안주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녀의 주위에 다른 3학년 여학생들도 보였기에 이들에게도 인사했다.
"학생회에서 이제 돌아왔구나!"
"네, 다른 애들은요?"
"지금 한참 학과 환영회 중이야."
"어디서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건물 뒤로 나가서 금지된 숲 쪽으로 쭉 걸어가면 있을 거야."
시몬은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 뒤, 빠른 걸음으로 벤야가 알려준 곳을 향해 달려갔다.
숲이 어두워서 헤맬 거라고 생각했지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곳곳에 불빛이 있어서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우엑! 우우우우우엑!"
그리고 곳곳에서 나무를 짚거나 엎드린 채 구토를 하고 있는 학생들.
옷깃에 빨간 배지를 찬 걸 보니 2학년들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저러는 건가? 그게 아니면.......'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시몬은 더 빨리 고함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장소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2학년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 토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있는 건 전체 석차 12위의 3학년 '윌'이었다.
"아~ 어이가 없네, 한 모금 마시고 뭐 이렇게 엄살들이야."
그리고 윌의 앞에는 익숙한 인물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토토!'
시몬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꿇어앉은 토토의 앞에는 커다란 해골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더러운 구정물이 가득 차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건더기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시라고 이 새끼야. 내 말 안 들려?"
윌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너 이거 다 못 마실 때까지 기숙사에 못 들어갈 줄 알아."
"모, 모모모 못하개써여......."
토토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차가운 대꾸였다.
"원망할 거면 니 동기들한테 해."
윌이 히죽 웃으며 옆을 가리켰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2학년들이 얼른 토토의 눈길을 피했다.
"의리게임이었잖아. 안 그래? 다들 우리 마지막 주자인 '토토'를 위해 성의껏 마실 줄 알았는데, 한 모금 마시고 나가떨어지네? 혀 한번 대고 오만상 쓰면서 차례를 넘기는 새끼들도 있고. X발 이게 키젠이냐? 하여간 니네 기수들 X나 빠졌어. 내가 오늘 버릇 제대로 고쳐준다."
윌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꿇어앉은 토토의 뒤통수를 붙잡았다.
"자, 마셔야지? 건더기는 특별히 봐준다."
그가 부르르 팔에 힘을 주어 토토의 얼굴을 해골접시의 내용물을 가까이 댔다. 토토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됐다.
"모, 모모모모 못마시게써여! 으흫흑! 살려주세여!"
"이거 마신다고 안 죽어 인마! 야, 야! 팔에 힘 안 빼?"
토토가 해골접시를 붙잡고 끝까지 버티자, 윌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접시에 얼굴 처박아야 마시려나?"
윌의 팔에 칠흑이 일렁였다.
그대로 토토의 얼굴을 해골접시에 담그려는 순간.
처억!
그의 팔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차마 못 보고 시선을 돌리고 있던 2학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토토도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몬!!"
윌이 히죽 웃었다.
"......왔냐?"
윌이 토토를 놓아주었다. 시몬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윌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흐흐흫흐! 어쩌겠냐. 이게 다 키젠의 오랜 전통이야. 선후배 간의 단합과 친목 도모를 위해......."
"친목 도모? 저는 괴롭히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2학년 나부랭이가 선배 말도 끊고. 개판이다 개판."
윌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우리라고 뭐, 좋아서 하는 줄 아냐? 아니 그 전에, 우리는 이거 안 한 줄 아냐? 3학년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마시고 마지막엔 혓바닥으로 해골그릇도 핥았어! 탓할 거면 벌칙에 당첨된 본인 운이랑, 의리게임에서 의리 없이 저버린 동기들을 탓해! 자, 계속 들어간다."
윌이 토토의 얼굴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시몬이 이번에도 말리자 윌의 표정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거, 학생회가 자꾸 '학과 일'에 왈가왈부하네! 뭐 어쩌라고? 너 이거 월권 아니냐? 심지어 아직 학생회장 임명식도 안 했잖아?"
"의리게임이라고 하셨죠."
시몬이 교복 재킷을 벗었다.
스륵.
그의 검은 재킷이 풀밭에 내려앉았다. 넥타이를 흔들어 풀어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뒤이어 흰 셔츠까지 벗자 시몬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마치 옷 안에 근육이 고밀도로 밀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와."
남학생들은 순수한 감탄성을 흘렸고, 여학생들은 벌게진 얼굴로 눈을 가렸다. 물론 손가락 사이로 몰래 훔쳐보고는 있었다.
"뭐냐."
난데없는 근육질의 몸에 윌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평정을 가장하고 대꾸했다.
"뭐 어쩌라고 새끼야! 지금 나랑 한판 뜨자고?"
"토토 대신, 제가 마시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주위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안 됩니까?"
"시몬!!"
토토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반면 윌의 입꼬리는 귀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안 될 건 없다만, 괜찮겠냐?"
질질 끌 것도 없이, 시몬은 단숨에 크고 납작한 해골그릇을 들어 올려 입으로 직행했다. 꿀떡꿀떡 목울대가 울렁이며 내용물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새끼가......!"
윌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저걸 진짜로 마실 줄이야.
쿵!!
시몬이 무표정한 얼굴로 해골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건더기 같은 것들은 남아 있었지만, 모든 국물은 다 마신 뒤였다.
'해독.'
맹독학 교수 별야가 학년 최고 수준이라고 인정했던, 시몬의 저항계가 발현했다.
혈독이 일어나면서 체내에 흑마법 효과가 적용된다. 체내에 들어온 불순물들을 분석하여 나쁜 독성분은 모조리 몸의 외부로 잡아당겼다.
여기에.
'칠흑 체내 분화!'
탈의한 시몬의 상체에 방울방울 칠흑의 공이 떨어졌다. 방금 저항계로 불순한 성분을 한곳으로 모으고, 칠흑 체내 분화로 칠흑과 혈독을 뭉쳐 몸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투둑.
툭.
데구르르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검붉은 방울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몬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됐습니까?"
퍽!
시몬이 바닥에 떨어진 방울 하나를 짓밟으며 말했다.
역력히 당황한 표정의 윌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 새끼, 지금 뭘 한 거지? 왜 멀쩡한 거야?'
"이거 그거야. 윌."
윌의 뒤에 있던 3학년 한 명이 조용히 귓속말로 말했다.
"그 새로운 맹독학 교수가 가르친다는 저항계. 독을 중화하는 기술이야."
"......뭐?"
그릇에 든 건 역겨움을 유발하는 오염된 물이었지만, 시몬은 사실상 그냥 맹물을 마신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지간한 독도 통하지 않는 시몬에게, 이 정도의 해독은 간단했다.
"시, 시몬......."
토토가 감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몬은 옅은 미소를 보이고는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서 입었다.
"이제 다 됐으면......."
"아니."
윌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직 안 끝났어. 새끼야!"
계획대로.
시몬은 속으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키젠의 학과 환영회의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본게임. 즉 학과대표가 직접 참여하고 3학년과 2학년이 어울리는 정상적인 술자리가 있다. 그곳에서 게임을 하게 되는데, 패배하거나 벌칙에 당첨된 학생은 '신고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토토와 함께 구정물을 마신 학생들이 그랬다.
신고식은 3단계로 진행되며, 세 가지를 모두 겪은 학생은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지게 되기 때문에, 보통은 본게임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기숙사에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신고식이 끝나면, 본게임에서 다음 벌칙자를 선정해 신고식으로 보내는 식이다.
결국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 번은 신고식을 겪게 된다.
신고식을 하지 않는 학생들은 선배들의 예쁨을 받는 극소수의 학생들이나 2학년 학과대표 정도다. 이들은 이날 이후로 신고식을 빼준 선배들에 대한 충성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같은 시각, 본게임 장소.
"이야~ 이번에도 피해갔네. 운 좋은데 로레인!"
"......."
환영회에 참가한 로레인은 제비뽑기에서 아무 표시도 없는 제비를 뽑았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레오나드가 유쾌하게 말했다.
"자, 자, 됐고. 술이나 한잔 따라줘. 오늘 밤은 달려야지!"
레오나드는 로레인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폭풍처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대부분 3학년이었고, 2학년은 학과대표 헥토르와, 아세라즈, 그리고 로레인이 전부였다.
"......예."
3학년들은 로레인이 직접 따라준 술을 황송해하며 마시는 동시에, 분위기를 열심히 띄우고 있었다. 술을 따라주면서도 로레인의 표정은 시시각각 굳어지고 있었다.
'이대론 곤란해.'
그녀도 '신고식'의 소문은 들은 바 있었다. 이를 파헤치려고 일부러 신고식에 걸리려 했지만, 매번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실 이 게임은, 3학년들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극도로 정밀하게 조작하고 있었다.
네프티스의 딸이 '신고식'에 가는 것만큼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으니까.
"선배님."
결국 견디다 못한 로레인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벌칙 받으러 간 애들이 걱정되는데, 잠깐 보러 다녀와도 될까요?"
"니벤!"
레오나드가 옆의 3학년을 보고 소리쳤다.
"신고식 애들 걱정되신단다! 상태 좀 보고 와."
"오케이!"
니벤이란 이름의 학생이 후닥닥 뛰어갔다. 로레인이 놀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 아뇨! 제가......!"
"아~ 됐어, 됐어."
레오나드가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자리에 앉혔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많이 피곤하지? 특별취급 당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힘들고, 짜증 나고. 나도 이해해."
"......."
"그럴수록 네가 우리 일반인들이랑 섞여서 잘 노는 모습을 보여야지. 그래야 총장님도 만족하실걸? 이건 기회야. 내가 여기 애들이랑 다 친하게 만들어줄게. 여기! 로레인 술 좀 따라줘!"
레오나드가 로레인을 철벽마크 하고 있었다.
네프티스의 딸인 로레인은 격식 있는 자리 위주로 다니면서 타인의 숭상과 우러름을 받으며 자랐지만,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레오나드는 온갖 눈칫밥을 다 먹으며 성장했다.
키젠에서는 선배들과 교수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안 해본 짓이 없을 만큼 경험이 풍부한 멘탈리스트.
경험이 달랐다. 그런 레오나드가 작정하고 만든 덫에서 로레인이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아.'
그나마 레오나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핑계인 화장실 화제를 꺼내면, 또 귀신같이 3학년 여학생 선배들이 달라붙었다.
'요주인물, 네 명.'
레오나드가 로레인과 잔을 부딪치며 와인을 쭉 들이켰다.
'막무가내 세르네는 당연히 불참. 시몬은 학생회에 불려갔고, 벤야는 식재료 준비시키러 보냈어. 로레인은 내가 마크하고 있으니, 완벽해.'
그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부디 사고만 치지 마라. 윌.'
그러나 이미.
사고는 레오나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