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79화
그날 저녁.
소환학과 기숙사 자습실.
시몬과 토토, 그리고 오랜만에 같은 동아리의 '피츠제럴드'까지 합류한 삼총사는, 책상에 둘러앉아 열심히 소환 재료학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
자습실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 이따금씩 팔랑거리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으으, 이해할 수가 없어!"
갑자기 노트에 빼곡하게 필기하던 토토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소환전공인데, 왜 이런 걸 공부해야 하는 거야?"
이번 '소환 재료학'의 과제는 거의 책 한 권 분량의 유인물을 싸그리 암기하는 거였다. 일반 식물과 식물 몬스터 도감의 복사본이었다.
시몬이 타이르듯 말했다.
"키젠 교수님의 지시잖아. 암기하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으, 응. 그렇겠지."
토토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깃펜을 들었다.
방금 '만드라고라'를 끝내고 다음 페이지로 넘긴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피츠제럴드의 모습이 보였다.
뿔테 안경을 쓰고, 언제나 책을 끼고 사는 그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자 학자 타입의 동급생이다.
"피츠제럴드."
"음."
"과제도 안 하고, 무슨 책을 그렇게 보는 거야?"
그는 또 이상한 책을 펼쳐놓고 읽고 있었다. 제목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었는데, 어쩐지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파져 왔다.
"책은 마음의 양식."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방금 저녁을 먹고 배를 채웠으니, 머리에도 일용할 양식을 줘야 해."
"안 주면 어떻게 되는데?"
"뇌가 정신적 배고픔을 호소해. 결국엔 지적 탐구심이 거세된 채 허영으로 채워진 공허함의 비극적 말로로 치닫겠지."
"?"
참고로 그는 동아리 선배인 '벤야 바닐라'와 같은 과다.
이상한 녀석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 복사본."
피츠제럴드는 시선은 책에 고정한 채, 손끝으로 과제를 가리켰다.
"난 벌써 원본을 몇 번이고 달달 읽어서 따로 공부 안 해도 됨."
시몬이 헛웃음을 흘렸다.
"......여러 의미에서 대단하긴 하다."
"그보다 너무해 피츠!"
깃펜을 끄적이던 토토가 찌릿 피츠제럴드를 흘겨보았다.
"난 2학년 때 돌연변이 멤버 셋이서 쭉 지낼 줄 알았는데! 수업 때 맨날 M반 애들이랑 붙어 다니고!"
"그거 이상하군."
피츠제럴드도 농담조로 반격했다.
"난 A반 출신들끼리 붙어 다니느라 날 따돌리는 줄 알았는데."
"우, 우리가 그럴 리 없잖아!"
세 사람이 자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다시 하던 일을 시작하려는 데, 자습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의 옷깃에 붙어 있는 금색 배지를 본 세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3학년 선배였다.
"아, 아. 그러지 않아도 돼. 편하게 있어."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진 곰처럼 순박한 인상의 남학생이었다.
"레오나드랑 윌도 지금 임무 하러 떠났고, 당분간 너희들한테 뭐라 할 사람도 없거든."
"아, 넵."
세 사람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3학년은 본인의 캐비닛에서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참."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캐비닛 위로 손을 가져갔다.
"이거 먹고 해."
숙제에 집중하던 돌연변이 멤버들은 깜짝 놀랐다.
요즘 유행이라 로체스트에도 없어서 못 산다는 '러브쿠키'. 달고 가성비도 좋아서 학생들 사이에서 야식 최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포장지를 보고 바로 러브쿠키인 걸 알아본 토토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저, 정말로 이걸 저희가 먹어도 돼요?"
"그럼."
3학년 선배가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 무안한 표정이 되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으, 그냥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모든 3학년들이 너희들을 미워하는 건 아냐."
"......아."
"나는 너희들이 정말 좋아. 우리는 같은 숙소를 쓰고, 같은 공부를 배우는 선후배잖아? 왜 그렇게 2학년 기를 꺾어야 한다면서 괴롭히라는 건지, 내 개인적으로는 잘 이해가 안 돼."
시몬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배님."
"비록 난 아무 힘도 없어서 윌이랑 레오나드를 말릴 수는 없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그냥 3학년 모두가 너희들을 경계하는 건 아니라는 거. 그거 하나만큼은 알아줬음 해서."
3학년 선배가 순박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앞으로도 기숙사나 학과생활에 모르는 게 있다면 물어봐.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
토토가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시몬과 피츠제럴드도 일어나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3학년 선배는 마실 것까지 챙겨주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와 동시에 긴장했던 토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몬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으신 분이네."
"응! 저게 진짜 선배지!"
"동감."
피츠제럴드도 덮어뒀던 책을 다시 펼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다시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과제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머리를 열심히 썼더니 달달한 게 땅겼던 시몬이 러브쿠키를 집어 들었다.
"어, 잠깐."
그때 피츠제럴드가 팔을 들어 올려 시몬을 제지했다.
"......우리가 방심했을지도 모르겠어."
"방심?"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왜 굳이 레오나드 선배와 윌 선배가 떠났다고 언급한 거지? 왜 뜬금없이 캐비닛에 책을 꺼낸다고 했다가 과자를 꺼내서 챙겨준 거고? 그는 정말로 우연히 자습실에 책을 꺼내러 온 걸까? 만약 그가 우리를 위험에 빠트릴 생각으로-"
얌.
시몬은 그 말을 무시하고 쿠키를 집어 먹었다.
피츠제럴드가 놀란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
시몬은 빙긋 웃어 보였다.
"약이나 이상한 거 탄 거 아냐. 그냥 맛있는 쿠키야."
"......음."
피츠제럴드가 뻘쭘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웃겨서 시몬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의를 받고 의심부터 하는 거야? 좋은 습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눌러썼다.
"방심하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
"아니 아니, 완전히 경계를 풀란 건 아냐. 하지만 이번 3학년 선배님은 누가 봐도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어. 그렇게 의심에 얽매여서 평생 사람들의 선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시몬이 빙긋 웃었다.
"그게 언젠가 뒤통수 한 번 맞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아닐까?"
"......!"
피츠제럴드는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듯 입을 벌렸다.
이내 그가 다리를 꼬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팔짱을 끼거나 하는 등 포즈를 바꿔가며 시몬의 말을 음미하더니, 마침내 자세를 다잡았다.
타악.
그가 마침내 손에 든 이상한 제목의 책을 덮고는, 아론의 소환학 과제를 위해 교과서와 노트를 펼쳤다.
"벌써 다 읽은 거야?"
"배부르니까."
피츠제럴드가 사각거리며 깃펜을 움직였다.
"방금 네 말로 저녁 할당량은 채워졌어. 더 양식을 먹을 필요는 없겠군."
"......."
시몬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걸렸다.
1년간 같은 동아리였지만, 피츠제럴드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는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비로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조금은 더 알게 된 것 같았다.
"냠냠. 너희들 안 먹어? 이거 진짜 맛있어!"
벌써 러브쿠키를 열 개째 집어먹고 있던 토토가 두 사람을 보았다.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그제야 시몬과 피츠제럴드의 팔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 * *
과제는 저녁 늦게서야 끝났다.
시몬과 토토는 잡담을 나누며 기숙사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토토는 먹다 남은 러브쿠키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어?"
시몬이 걸음을 멈췄다. 토토도 뒤따라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시몬?"
"우리 방문 열어놓고 과제 하러 갔던가?"
"잘 모르겠어."
시몬은 날카롭게 눈을 뜨고는, 방문을 잡아당기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책상 위의 물건들도 그대로 있다.
그런데.
"이히히히히!"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시몬의 침대에서 하얀 이불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히익! 귀, 귀신?!"
토토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시몬은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이내 이불보가 확 걷히며 은빛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귀신이다아아! 무섭지!"
작은 소녀의 외모로 와앙! 하고 위협을 가하는 귀여운 귀신을 보며, 시몬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프티스 님."
"네프티스 님?!"
짧은 시간에 너무 충격을 받은 토토는 선 채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때 네프티스가 침대에서 폴짝 내려오더니 오도도 토토에게 달려왔다.
"어, 어어어어."
암흑연합의 지배자가 눈앞에 있다.
당장 예를 취해야 했지만, 너무 놀라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네프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어......!"
화가 나신 게 틀림없었다.
뭐 때문에 화가 나신 거지?
내가 뭐 로레인에게 잘못한 게 있었던가?
아니면 그냥 인사를 안 해서?
'나, 이대로 죽는......!'
"토토."
시몬이 토토가 끌어안고 있는 과자상자를 가리켰다.
"그거 드시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응?"
토토가 과자상자를 내리자 네프티스가 눈을 빛내며 가져갔다.
"쿠키다!"
그러고는 바로 냠냠 쩝쩝 입가에 가루를 묻힌 채 먹기 시작했다.
토토는 그대로 영혼이 빠져나온 얼굴로 주르륵 자리에 무너진 다음, 벽에 탁 들러붙었다.
"네프티스 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 참!"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잠깐 따라올래? 시몬!"
시몬과 네프티스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텅 빈 기숙사 방을 바라보며 토토의 입에서 으허허 하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참, 시몬은 학생회장이었지. 총장님이 직접 오실 만하구나.'
그의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조용조용하게 잘 지냈던 1학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시몬의 룸메이트가 된 지금은 스케일이 너무 커지고 많은 사건들이 마구 벌어져서 심장에 좋지 않았다.
'대, 대체 시몬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 * *
시몬과 네프티스는 인적이 드문 숲길을 걸었다.
풀벌레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지는 포근한 밤이었다. 사부작거리는 풀 밟히는 소리도 좋았다.
"기억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아, 죄송해요 네프티스 님. 입학식 전날 밤에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신입생 인솔일을 맡아버려서......."
"아니, 아니! 그거 말고!"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다시 시몬을 보았다.
"내가 선물 주기로 했었잖아!"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이걸로는 네 부탁을 완전히 다 들어준 건 아니니까. 나중에 내 개인적인 선물도 줄게. 괜찮지?
-선물이요?
-응! 그건 아직 비밀이야~ 신학기 선물로 줄 거거든!
1학년 마지막 혈천교 사태 때 실라지를 쓰러트린 대가로, 네프티스는 언젠가 시몬이 합법적인 군단장으로서 활동하기 위해 7군단에 대한 인식과 여론을 바꾸는 밑작업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번에 학생회장 임명식 때 그녀가 직접 나온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다.
하지만 원래 시몬의 부탁은 '7군단의 죄의 사면', 그녀는 자신이 부탁을 다 들어준 게 아니라며 개인적인 선물을 주기로 했었다.
"이거야."
그녀가 품에서 꺼낸 건 작은 진주 같은 구슬이었다. 시몬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바닥에 떨어뜨려 봐."
시몬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구슬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손을 착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물론 키 차이 때문에, 팔을 뻗은 그녀가 시몬의 손에 매달리는 느낌이 되었다.
"이제 이 구슬을 나랑 같이 반반씩 밟는 거야. 동시에!"
"알겠습니다."
시몬과 네프티스가 동시에 다리를 들어 올리고는, 구슬을 밟았다.
"!"
주위의 경관이 바뀌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숲의 정경이 펼쳐져 있다.
"아공간?"
시몬의 눈이 커졌다.
"조금 특별한 아공간이지. 사물이 아닌 사람도 일시적으로 들어올 수 있으니까! 자, 이쪽으로 와!"
이번에도 아공간이 선물일까. 시몬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내려오는 낙엽이 쌓여서 만들어진 커다란 언덕이 보였다.
"이게 뭔지 알겠어?"
시몬은 낙엽 끝에 삐쳐나온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이건......!"
그것은 커다란 뼈였다.
네프티스가 가볍게 두 손을 맞부딪히자, 낙엽들이 모조리 날아가며 용의 뼈가 온전한 자태를 드러냈다.
시몬이 신성연방에서 상대한 경험이 있던 던전주 카리사보다 더욱 거대했다. 죽어서 뼈만 남아 있을 뿐인데, 아직도 잔존한 마력이 일렁거리고 있다.
"네게 주는 선물이야, 시몬."
그녀가 빙긋 웃었다.
"본 드래곤. 네가 언제쯤 이걸 다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