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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482화 (482/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82화

쏴아아아아아아―

늦은 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에 툭툭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

시몬은 바닥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끼익하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죄송해요. 신세를 졌네요."

바힐의 수석조교, 체헤클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 아닙니다. 조교 선생님! 편하게 쓰세요."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미안해요."

고개를 꾸벅 숙인 그녀가 시몬의 앞에 앉았다. 약간의 비 비린내와 함께, 물에 젖어 희석된 듯한 희미한 향수 향이 난다.

머리는 감았지만, 옷은 여전히 비에 젖은 그대로였다. 시몬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비를 많이 맞으셨는데 샤워라도......."

"아뇨."

고개를 내저은 체헤클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어차피 또 밖에 나가야 하니까요. 샤워는 제 숙소에서 할게요."

"아, 알겠습니다."

시몬은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긴장감이 몰아치고 있었다.

금기 중의 금기. 기숙사 방에 여자를 들였다. 그 여자가 학생이 아닌 조교라도 얄짤없다. 사감에게 걸리면 최고 벌점은 물론, 퇴숙조치까지 이뤄져도 할 말 없는 상황이다.

괜히 불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몬이 침대 쪽을 보았다.

"토토는......."

"조금 깊게 잠들게 해뒀어요. 우리가 너무 큰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이미 체헤클이 손을 써둔 모양.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토토는 팬티 바람으로 배를 긁적이며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시몬은 그의 품위를 위해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쨌든."

시몬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조, 조교 선생님께서 제 방엔 무슨 일로......."

"시몬 학생, 아니. 학생회장님께 부탁 있어서 왔어요."

"그, 그냥 평소처럼 편하게 불러주세요. 혹시 그 부탁이 바힐 교수님에 대한 건가요?"

"네."

이야기를 나누던 체헤클이 눈을 깜빡였다.

시몬의 상태가 이상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게진 채, 말도 더듬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

비 때문에 셔츠가 젖어서 속옷이 드러나 있었다. 체헤클은 가슴께를 가리며 무안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학생 앞에서."

"아, 아닙니다."

비로소 눈 둘 곳을 찾고 냉정을 회복한 시몬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바힐 교수님은 로크섬에 돌아오신 건가요?"

"네. 별장에 잠적해 있던 교수님을, 다른 학과 교수님들과 까마귀들까지 동원해 찾아냈죠. 간신히 설득해서 일단은 로크섬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했어요."

시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일단'은 성공했다라.

"솔직히 말하면, 교수님의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체헤클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상심이 너무 컸던 모양이에요. 수업에 의욕도 못 내고, 평소처럼 이상한 헛소리도 안 하고, 그냥 멘탈이 나가서 하염없이 천장만 보고 있어요. 그런 힘 빠진 모습은 저도 처음이에요."

시몬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혹시......."

"네, 아마도 시몬 학생과의 일 때문이겠죠."

시몬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바힐 교수님 같은 분이 저 하나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게 이상해요. 혹시 달리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면......."

"학생 하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 맞아요."

그렇게 단정 지은 체헤클이 씁쓸하게 뒷말을 붙였다.

"교수님이 시몬 학생에 대한 집착과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마 본인은 잘 모를 거예요."

"......아."

시몬이 그동안 봐왔던 건 가면을 쓴 바힐의 모습들뿐이었다.

물론 시몬은 자신에게만 콤펠로니아 및 '4대 저주'를 가르쳐 주는 등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더 잘해준다는 느낌은 당연히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의 거절 때문에, 아직도 바힐의 멘탈이 나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한심한 사람."

바힐의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체헤클의 눈에 분노와 짜증이 실렸다.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마구 휩쓸며 짓씹듯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시몬이 얼굴을 붉히며 휘익 고개를 돌렸다.

"?"

머리카락을 넘기던 체헤클이 뒤늦게 '아하하' 웃으며 가슴께를 가렸다.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시몬이 다시 고개를 되돌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체헤클 조교 선생님도...... 바힐 교수님께 마냥 좋은 감정만 가진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네, 사실은 그래요."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원한이 더 크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는 덤덤한 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바힐 교수님이 아직 신인 교수이던 시절, 그는 당시 키젠 학생이었던 제 재능을 높이 샀고, 저를 가지고 싶어 했어요."

바로 당신처럼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시몬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결국 저는, 그의 숱한 방해를 받아 2학년을 다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죠. 그는 제가 교복을 벗고 기숙사에서 짐을 싸기 무섭게 조교 자리를 제안했어요."

당시 체헤클은 그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큰 병에 걸려서 당장 치료를 위한 돈이 필요했으니까.

바힐은 부모님의 치료를 책임지는 건 물론, 체헤클에게 차기 저주학 교수 자리까지 보장했다.

그녀는 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수의 부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원한은 갈수록 커져만 갔죠."

체헤클이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나는 교수 뒷바라지나 하고 학생들 준비물 챙겨주는 노릇이나 하고 있는데, 내 동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학창 생활을 보내면서 빛나는 미래로 달려가고 있는 거예요. 빗자루로 바닥을 쓸다가 지나가는 동기들이나 후배들을 보면 굽신굽신 고개나 숙이는 꼴이라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

시몬은 착잡한 얼굴로 두 손을 바닥에 댔다.

"그럼 지금까지 조교생활을 버티면서 수석조교 자리까지 오르신 것도."

"맞아요. 그에게 복수하고 싶었어요."

체헤클이 웃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도를 했죠. 중요한 정보를 경쟁자에게 유출하거나, 그의 논문을 반박하는 논문을 기재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 사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만 깨달았어요. 그는 진짜 천재예요. 나 같은 범인이 그런 천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죠."

바힐을 실력으로 뛰어넘어 찍어누르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체헤클은, 본격적인 네거티브 방식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그의 교수 자격이 흔들릴 만큼 막대한 피해를 줬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체헤클을 탓하지 않았고.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그저 내 곁에 남아만 주십시오. 체헤클.

그 어떤 경우에도 체헤클의 사표를 수리해 주지 않았다.

'단순히 교수 조교 사이가 아니라, 복잡한 사연이 얽힌 관계였구나.'

시몬은 체헤클의 얼굴에 드러난 여러 표정을 보았다.

애증(愛憎)의 관계.

아마도 체헤클과 바힐의 관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리라.

"물론, 난 아직도 그 사람에 대한 복수를 포기한 건 아니에요."

체헤클이 착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무기력해진 사람을 상대로 복수를 성공하고 싶진 않아요."

"조교 선생님......."

"사설이 길었네요. 다시 처음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시몬 학생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다리를 옆으로 빼놓고 앉아 있던 체헤클은, 공손하게 무릎을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무릎을 꿇는 자세처럼 되었기에 시몬도 기겁하며 같은 자세를 취했다.

"조, 조교 선생님......!"

"바로 내일이, 수강신청일이죠."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리려는 건 아니에요. 시몬 학생이 처음으로 수강하는 일반과목을, 바힐 교수님의 저주학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시몬이 눈을 끔뻑였다.

시몬은 이미 학생회 멤버들과 맞춰서 시간표를 다 짜둔 상태였다.

물론 바힐의 저주학도 신청하긴 했지만 두 번째고, 첫 번째 수업은 제인의 칠흑역학으로 정해둔 뒤였다.

"......하, 하지만 그 정도로 될까요?"

"어른이 됐지만, 그 사람의 정서는 어딘가 어린애 같은 면모도 있어요. 천재나 괴짜들의 특징이죠."

체헤클이 한숨을 쉬었다.

"비록 2학년이 된 시몬 학생은 아론 교수님을 선택했지만, 적어도 그다음은 바힐 교수님이라는 믿음을 준다면."

그녀의 눈에 이채가 일렁였다.

"폐인이 된 그 사람을 되돌릴 수 있을지 몰라요."

* * *

다음 날 아침.

밤 내내 퍼붓던 빗줄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히 오늘 수강신청 시즌을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다.

2학년 학생 400명은 지급받은 우비를 교복 위에 걸치고는 2학년 캠퍼스 외부에 위치한 출발라인에 섰다.

"흐아암."

학생들 앞에 선 어른들 중에서는 익숙한 얼굴도 한 사람 보였다.

카드의 네크로맨서, '엔돌라스 보드빌'.

네프티스와 함께 대륙 10대 미스테리 중 한 사람. 시몬이 1학년 때는 BMAT를 주관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엔돌라스는 피곤이 찌든 얼굴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비 오는 새벽부터 철야했더니 죽을 맛이로군."

"어휴,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엔돌라스 님!"

키젠 직원과 엔돌라스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수강신청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뭐? 이제 와서 순서를 바꾼다고?!"

시몬은 학생회 멤버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메이린이 콩콩 뛰며 소리치자 시몬이 뒷목을 긁적였다.

"응. 갑자기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정말 미안해."

시몬은 결국 체헤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힐이라는 사람 자체를 떠나, 시몬은 그가 가르치는 저주학이 좋았다.

바힐이 가르치는 실력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훌륭했고, 개인적으로도 바힐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다. 특히 그가 가르쳐 준 '콤펠로니아' 덕분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생명의 은인이 이대로 망가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저 신청 순서를 두 번째에서 첫 번째로 바꾸는 정도로 그를 구할 수 있다면, 시몬은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시몬! 부담 가지지 마세요."

카미바레즈가 방긋 웃었다.

"신청 순서만 살짝 바꿨지. 제인 교수님, 바힐 교수님, 홍펭 교수님의 수업을 우리 넷 다 같이 듣는 건 동일하잖아요?"

"응, 맞아."

"꼭 예전처럼 넷이서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카미바레즈의 격려에 시몬은 더더욱 힘을 얻는 걸 느꼈다. 한편 딕은 팔짱을 끼고 고민 중이었다.

"으음- 그러면 그냥 우리도 시몬을 따라서 저주학 1순위로 가는 건?"

"아냐, 아냐. 내 변덕으로 너희들이 피해를 볼 필요는 없어."

사실 딕은 어젯밤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최단거리 루트를 짜놓고, 엔돌라스 보드빌이 설치한 카드의 위치를 체크해 둔 뒤였다.

순서를 바꾸면 딕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건 물론, 너무 많은 변수가 생긴다.

"걱정하지 마. 혼자서 행동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어떻게서든 세 과목을 다 수강해 놓을게."

시몬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때 키젠 직원과 엔돌라스 보드빌이 앞으로 나왔다.

"자, 2학년 여러분! 지금부터 수강신청의 룰을 설명하겠습니다!"

시몬은 이미 딕에게 들어서 다 아는 내용이었다.

현재 2학년 캠퍼스는 엔돌라스 보드빌의 이능으로 바뀌어서, 몬스터들이 출몰하고 여러 공간이 혼재된 '이상한 나라'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교수들은 캠퍼스 건물의 본인 연구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수강신청서를 들고 방문해서 교수의 사인을 받아내면 수강신청이 완료된다.

물론 정원이 다 차버리면 수강신청은 불가능하다. 해당 교수에게 가는 데 걸린 시간과, 몬스터와 함정을 간파하느라 소모한 칠흑이 무의미해지는 것이기에, 순간순간의 판단력이 중요했다.

"여러분들 모두 이 방호슈트를 착용하고 입장하게 될 겁니다!"

엔돌라스가 조끼 형태의 방호슈트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방호슈트는 제가 만든 카드 몬스터의 공격을 수치로 변환해 '배리어 게이지'를 소모합니다. 배리어 게이지가 0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30분 동안 그 자리에 설치된 결계에 갇혀서 멈춰 있어야만 합니다."

학생들이 기겁한 소리를 흘렸다.

30분이면 한 과목을 신청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야, 몸 사리면서 해야겠네~"

딕이 중얼거렸다.

"지금 경쟁률에서 30분 정지면 끝장이라고 봐야지."

그렇게 말한 메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몬?"

"응."

"말해두지만, 첫 과목으로 제인 교수님 수업을 선택한 애들이 수업 정원 전체보다 많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과목으로 제인 교수님을 선택한 애들보다 먼저, 바힐 교수님 찍고 제인 교수님께 도달해야 한단 거지."

"맞아. 이제 와서 말릴 생각은 없지만, 정말로 할 수 있겠어?"

메이린의 진심 어린 걱정을 느낀 시몬은 씩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응. 무조건 해낼게."

딕이 '역시 회장!'을 외치며 지도 하나를 시몬에게 건네주었다.

"다행히 저주학과 건물이랑 칠흑역학과 건물이랑 거리가 가까워! 남들보다 두 배 더 빠르게 움직이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해!"

"오케이."

"그럼 학생들 모두 준비되셨습니까?"

엔돌라스 보드빌의 외침에 모든 학생들이 '네에!'하고 외쳤다.

"지금부터 수강신청 시즌을 시작하겠습니다! 부디 원하는 수업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망토가 펄럭이며 그의 팔이 내려갔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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